그녀의 상상력, 그녀의 에너지

영화 판에 뛰어든 김수지

이진화 | 기사입력 2005/03/07 [20:35]

그녀의 상상력, 그녀의 에너지

영화 판에 뛰어든 김수지

이진화 | 입력 : 2005/03/07 [20:35]
스스로 게으르기 짝이 없다 말하나 내가 보기엔 늘 누구보다도 부지런한 사람이자 귀여운 술꾼, 수지. 책도 더 많이 읽고 싶고 영화 공부도 본격적으로 하고 싶었던 수지는 작년 2월 학부를 졸업하자마자 직업 전선에 뛰어 들었었다. 당시 집안의 생활고에 대한 책임을 큰 딸인 수지가 상당 부분 떠맡아야 했고 당장 무슨 공부를 어디서 해야 할지도 그리 분명하지 않아 여러 모로 그녀가 진학을 결심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간 수지는, 전위예술 그룹의 실무자로, 월간지의 기자로, 공연 일정에 쫓기고 마감에 쫓기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살았다. 최근 수지는 바로 얼마 전까지 일하던 월간지가 폐간되는 바람에 짤막한 휴식을 가질 수 있었는데, 이 아이, 글쎄 그새 자기가 그토록 원했던 영화를 배우는 일에 뛰어들었지 뭔가. 그리고 새 직장까지 떡 하니 구했다. 일단 이런 그녀의 씩씩함에 짝짝짝 박수를 보내주며, 인터뷰, 시작.

수지의 부담, 그리고 고민

바쁘지 않냐 물었더니 그녀, 이렇게 답한다.

"음 사실 바빠야 하는데, 술 마시고, 밤새 음악 들으면서 혼자 흐느적거리는데 시간을 꽤나 뺏긴 것 같아. 반성하고 있지. 이렇게 내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여유가 나오는지 스스로도 놀랍다."

하지만 난 수지의 이런 여유가 수지로 하여금 자신을 긍정하게 하고 좀 더 기운차게 앞으로 나아갈 에너지를 만들어주는 데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는 걸 안다. 술에 취하고 음악에 취하는 밤은 그녀에게 아이디어의 원천이기도 한 것이다. 수지의 하숙집에 종종 놀러 가 낮부터 맥주 캔을 따며 여러 가지 소망들을 나누던 때만 떠올려 봐도, 그녀가 술 마시는 시간은 그녀 인생의 보고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난 솔직히 늘 그녀가 걱정된다. 혼자서 짊어지고 가는 짐이 너무 무거워 보이기 때문이다. 모든 생활비를 홀로 만들며 불투명한 미래의 그림을 그려나가는 일이 녹록할 리가 없으니까.

"안 그래도, 오늘 그것 때문에 한참 우울한 얘기를 나눴어, 영화제작학교 사람들이랑. 경제력과 영화 판에 얼굴을 들이밀 수 있는 기회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무척 울적해졌어. 사실 영화학교 등록하면서도, 지난주에 하이퍼텍 나다에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 작품 상영회를 보러 가면서도, 영화 판에서 내가 무언가를 발언할 수 있는 날이 그렇게 멀다고만은 생각하

지 않았어. 그런데, 생활비를 스스로 다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짐이라는 거, 갈수록 느끼고 있어. 개인적으로 단편 작업하는 데만 해도 돈이 엄청나게 드니까. 내가 지고 있는 부채를 초과하는 금액이 돼 버리거든. 거기다 내가 빚진 이들 모두 너무 가까운 사람들이라, 부채에 대한 부담은 더욱 커.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각인시키지 않으면, 너무나 관대할 이들이기 때문에."

그래, 역시 걱정했던 것만큼, 수지의 경제 상황은 늘 열악하다. 그런데 그녀, 멋진 말을 하는 게 아닌가. 폐부에 꽂히는 수지의 다음 말을 나는 지금까지 곱씹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사람들이 우울한 말을 뱉어도, 경제적으로 서포트 없이 영화 공부하기는 엄청 갑갑하다는 얘기 들어도, 내가 갈 수 없는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건 꿈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최선의 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영화를 하지 않으면 사는 게 사는 거 같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경제력에 대한 고민은 일단 뒷전으로 하려고 하는데. 물론 동생들에 대한 책임은 지고 나가야겠지만. 아무리 뒷전으로 미루려 해도. 그리고 나는 궁상이 싫어. 어려운 상황 때문에 자기가 이거 아니면 못산다 하는 걸 못하는 건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힘들수록 제 길을 찾아가게 되더라. 신기하게. 절박해질수록 진실해지는 순간들이 잦아지는 듯. 그리고 나, 어떻게 학습지 회사에 취직이 됐다. 다행이지 뭐냐. 직장 구하기도 어려운 데 열심히 다니기로 했어."

힘들수록 제 갈 길을 찾아가게 되고, 절박해질수록 진실해지는 순간들이 자주 찾아오는 것 같다는 그녀. 이건 모든 일이 원래 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녀가 그렇게 믿으며 살고자 하기 때문이 아닐까. 힘들어도, 가야 할 길을 놓치면 안 된다고 굳게 믿고 노력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일 게다. 우리 수지, 기특하다. 친구지만 존경한다.

잡지사 기자에서 영화판 초짜 여자아이에 이르기까지

잡지사 다니면서 수지는 매달 그 달의 절반 정도는 거의 초죽음의 마감 속에서 지냈다. 사무실에서 밥 먹듯 밤을 지새우던 수지. 아무래도 잡지 일은 내 적성이 아닌가 보다, 하던 수지였지만 나는 그녀가 만들던 잡지의 구석구석에 깃든 그녀의 노력을 봤다. 사진 밑에 달리는 별 것 아닌 카피라도 보다 정확한 말로 전달하고자 했던 수지였다.

"잡지 하면서 배운 것도 많고 그만큼 상처도 많이 받았지 뭐. 나 편집장님 참 좋아했다. 정치력 장난 아니고, 필력도 뛰어나고, 너무나 명민하고 마인드도 흠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나를 너무나 갑갑해하고, 그랬지. 폐간 결정되고 나서, 내 원고 보시더니, 한숨 쉬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라. ‘너 한 몸 건사하게 못 만들어서 어떡하냐. 네가 가진 생각들 아까워서 어쩔래.’ 한 마디로 재주가 부족하단 얘기였어. 나, 글 너무 난삽하게 쓰고, 비문투성이에다 독자에 대한 책임감이 결여된 원고를 매번 데스크에 올리곤 했으니까. 이건 마지막 달까지 지속되었어.”

“나의 이 치명적인 무능력함을 끝까지 극복할 수 없었지만, 글을 쓰든, 영화를 만들든, 다른 이들에게 무언가를 얘기하려 할 때 필요한 자세가 무엇인지는 배운 것 같아. 책임감, 전달가능성에 대한 고려, 기타 등등. 아무튼 잡지사에 다니는 동안 자기비하로 소비한 시간이 너무나 길어. 글쓰기 작업에 무능한 나로서는 지옥같이 느껴지는 순간들이 많았어. 문제는 온갖 관념적인 문제들 끌어안고 살면서, 몸이 빠릿빠릿하지 못하다는 거야. 그런데 이번에 단편 작업들 몇 번 하면서, 몸이 먼저 앞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겠더라. 그런 사람들이 보이더라고. 영화판이 완전 노가다판인데 여기서 자신의 몸을 던지면서 의미를 만들어가는 사람.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어. 이왕에 영화할건데.”

나는 속으로 되뇌인다. 할 수 있어, 수지! 그리고 아직 덜 다듬어졌을지언정, 나는 네가 쓰는 글을 무척 좋아한다고 거듭해서 말해 주고 싶다. ‘난삽’, ‘비문투성이’ 같은 건 수지의 냉혹한 자기 평가일 수는 있을지언정, 일상의 감각이 적나라하게 묻어나는 수지 글의 팬인 나로서는 수지의 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떠올릴 수 없는 단어들이다.

그녀에게 영화란, 인생이란

드디어 영화를 하게 된 수지. 영화의 ‘이응’자에 가까이 가게 된 수지. 그런 그녀는 요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영화 정말 힘들다는 거 깨닫고 있어. 그저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야. 그리고, 나 이번에 영화학교에서 만나게 된사람들 너무 좋아. 김기덕을 비롯해 몇몇 감독들 때문에 종종 다투긴 하지만. 아무튼 눈에 띄는 사람들 몇몇 있어. 내가 쓴 시나리오로 작업할 때는 여성들로 이루어진 외부 스텝으로 작업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좋은 사람들이지만 소통에 한계가 있거든. 몇몇 사람들은 소통은 되는데, 영리해서 그런 거지 감정의 파장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느낌이야. 이런 느낌을 주는 사람들은 모두 남자들이지.”

그들은 한계가 있지, 하는 생각이 내 뇌리를 스친다. 멋진 여자 스텝들이 수지 작업에 붙어주면 좋으련만. 내 소망 나무의 수지 몫 가지에, ‘여자 스텝’이라는 쪽지가 하나 매달린다.

수지는 앞으로 무슨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것일까. 수지 상상력의 코어는 무얼까.

“야아, 부끄럽다. 나 연출한 작품도 하나도 없고, 시나리오 써놓은 것도 없어서, 글쎄 당당하게 말하기 되게 쑥스럽네. 그런데 이런 생각은 항상 해왔어. 내가 시나리오를 쓰든, 연출을 하게 되든, 다른 사람들이 외면하고자 하는 생의 이면들을 꼭 스크린에 투사시켜보고 싶어. 메시지에 대한 강박이 너무 강해 버리면 사람들도 내가 하는 얘기를 외면할 게 뻔하니까 어떤 의미를 꼭 전달해보고 싶다는 것은 아닌데, 누구 한 명이라도 내가 느끼는 문제 의식에 공명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지금으로서는.”

“나는 개인적으로 페드로 알모도바르, 혹은 한국영화 가운데 <지구를 지켜라>나,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 가까운 얘기를 하고 싶은 듯. <헤드윅>이나. 물론 내용은 상당히 다른데, 뭘까, 내가 영화로 타인들과 대화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면 이런 식으로 내가 던지는 이야기 혹은 소재에 접근했겠다 싶은 기분. 오늘도 무슨 영화 얘길 하다가 사람들이 내가 보기에는 너무 구리게 뻔한 설정인 영화를 직설적이고 괜찮다고 해서 막 그게 아닌 것 같다고 내 생각을 얘기했지. 그렇지만 참 얘기 안 통하더라고. 내가 가지고 있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갖가지 생각들만 하나 씩 하나 씩 이야기해 나가기만 해도, 상당히 '환영 받지 못할' 저주 받은 시나리오가 될 듯하다는 선배의 생각이 있었는데, 이것 아니면 영화 할 의미가 없으니까…”

수지야, 아무리 충돌이 잦아도,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상황에 굴하지 말고 정말 네가 하고픈 이야길 풀어낼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 해! 영화판 초짜 수지는, 벌써 이제까지와는 다른 영화적 공간을 꿈꾸고 있는 것 같다. 난 각종 콤플렉스들과 오만 가지 성욕에 대해 함께 밤새도록 수다를 떨었던 몇몇 날들을 떠올리며 아무도 제대로 얘기해 주지 않았던 여자들의 경험을 수지와 또 다른 멋진 여성연출가들이 제대로(!) 스크린 위에 풀어 놓아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한 여성연출자의 신화를 일궈내길

“나의 친구들은 두말할 것 없이 나의 에너자이저들. 이제 영화 공부를 하게 되면서 새롭게 만난 사람들이 내게 주는 것은 영화 판에서 감내해야 할 어려움에 대한 각오를 함께 할 사람들이라는 확신을 주는 차원인데, 그것만으로는 내가 버틸 자신 없거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자위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거, 혹은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이야기라는 거, 누보다도 정확하게 모니터링해줄 친구들이 있어서 참 좋음. 여자친구들은 너무나 너무나 너무나 편한 존재라는 걸 여러 번 낯선 집단에 투신해보다 보니 알게 되었어. 편안함은 너무나 위대한 덕목인 듯.”

정말 맞다. 어울려 이야길 나누다 보면 저마다 관심 매체가 달라도 다들 뭔가 창조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 친구들이라 서로 주고받는 영감이 상당하다. 몇 주씩 연락 못하다가도^^; 한 번 만났다 하면,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을 한꺼번에 쏟아놓느라 서로들 바쁘다.

수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 어떤 인생을 살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녀 말하길,

“나는 말로 오버하지 않는 인간이 될 수 있다면 좋겠어. 그리고 끝까지 누군가에게 비겁하게 기대지 않는 사람이었으면 해. 당분간 자아성찰 열심히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삶의 세세한 결들 모두 잡아낼 수 있는 사람 되기를. 양아치 판이라는 영화 판에서 불굴의 의지로 가난한 여성연출자의 신화를 일궈내는 이가 되기를 빈달까.”

불굴의 의지로 가난한 여성연출자의 신화를 일궈내다. 이건 마치 성공담 책 제목 같지만, 수지가 말할 때는 결코 가볍게 들리거나 하지 않는 말이다. 나 역시 소망한다. 수지가 불굴의 의지를 지켜 나가기를, 그리고 여성연출자로서의 정체성을 꿋꿋이 가져 나가기를. 그리고 꼭 자기가 전달하고픈 메시지를 온 세상 널리 널리 퍼뜨리기를, 그녀의 필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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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인 2005/04/11 [00:55] 수정 | 삭제
  • 멋진 청춘이네요.!
  • 둘리 2005/03/10 [00:52] 수정 | 삭제
  • 잡지사 얘기가 마음을 울렁이게 해요.
    저도 글 쓰는 일 하고 있거든요..
    "네가 가진 생각들 아까워서 어쩔래"
    그런 얘기할 수 있는 사람 능력있고 멋진 사람일 것 같아요.
    생각들이 아까워서 수지님은 영화를 만드시면 되죠. ^^
  • 유리 2005/03/08 [17:58] 수정 | 삭제
  • 친구들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 재밌네요.
    아마도 멋진 친구들?
    저도 몇 개의 가지들을 맘 속에 품고 있는데. 친구눈으로 봐도 엄청 멋지고 대견한 그런 친구들이 있다는 거 참 좋은 일 같아요.
  • joyce 2005/03/08 [12:15] 수정 | 삭제
  • 예술적인 감흥이 물씬 느껴지는 인터뷰 잘 봤습니다. (검은 강아지 사진은 직접 찍으신거겠죠? 제가 좋아하는 스탈의 컷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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