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 피해여성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인정한 첫 판결이 나왔다. 수년 동안 가정폭력에 시달린 끝에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최경주씨(가명)에 대해 18일,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는 가정폭력 피해자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인정해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5년에 처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정신장애의 일종이다. 전쟁과 같은 과도한 체험을 겪게 될 경우 개인이 정서적 스트레스를 받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일상이 한 순간에 무너져 버렸다는 충격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일상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그 상황을 떠올리며 정신적인 해리 상태에 빠지게 된다. 교통사고와 같은 개인적인 사고부터 6.25와 같은 집단적인 상흔, 그리고 가정폭력, 성폭력과 같은 육체적, 정신적 상해 모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십여 년 간 남편의 욕설과 구타, 강간, 의처증을 참아야 했던 최씨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사실에 따르면, 최씨의 남편은 1996년 사업이 실패한 후 술을 마시고 나면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최씨에게 욕설을 퍼붓고 구타를 가했다. 포르노를 보고 그대로 따라 하라고 요구하는가 하면 아들의 혈액형이 실수로 잘못 판명되자 최씨를 ‘더러운 여자’로 취급하며 성적 모욕을 주기도 했다. 그 결과 최씨는 남편의 귀가시간이 가까워질 때마다 공포에 떨었으며 사소한 자극에도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 지난해 4월 최씨는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던 남편을 찾아가 가게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남편은 또다시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순간적으로 격분한 최씨는 우발적으로 가게에서 가져 온 흉기로 남편을 찔러 숨지게 했다. 최씨는 그 날의 상태에 대해 “남편의 얼굴이 시커먹게 보였습니다. 꼭 무엇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전설에 고향에서 나오는 모자를 안 쓴 저승사자처럼 얼굴이 시커먹게 생긴 사람이 서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라고 기술했다. 지속적인 폭력의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현실 지각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최씨는 1심에서 8년 형을 선고 받았지만, 2심에서 재판부는 “범행 당시 피해자로부터 심한 욕설과 함께 모욕을 당하자 이로 인하여 극도의 흥분상태에 이른 나머지 해리 장애에 빠지면서 억제력을 잃고 폭발적이고 충동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이라며 정신장애 사실을 인정, 5년 징역을 선고했다. 이에 대해 서울여성의 전화는 "지금까지 지속적인 가정폭력 피해자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적극적으로 판시한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본 판결은 재판부가 가정폭력 피해자의 피해사실과 심리상태 이해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간 것"이라고 논평했다. 그러나 정신장애를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형량을 5년이나 선고한 것은 가정폭력 피해여성들이 겪은 외상적인 체험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한 판단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최씨 사건을 지원한 서울여성의전화는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과 캐나다 등에서는 가정폭력 피해자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관한 감정의견이 받아들여지면서, 피고 여성의 행위의 위법성을 조각(무죄)하는 정당방위 항변을 보강하는 이론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성의전화 측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위법성 조각사유로 적극적으로 적용하라”고 주장하며, “앞으로는 최씨와 같은 처지에 놓인 또 다른 가정폭력 피해여성들이 정당방위를 인정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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