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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기자교육을 4회에 걸쳐 진행했습니다. 새로운 인연이 생긴 셈이죠. 벌써 독자들과 기사를 통해 만나기 시작한 분들도 있습니다. 기자교육 마지막 시간엔 참가자들이 모여 기획회의를 했는데, 차별과 폭력에 대한 성토대회 비슷한 분위기가 됐습니다.
기자교육을 실시하면서 개인적으로도 느낀 점이 많습니다만, 무엇보다 그 동안 지치고 무뎌진 감수성이 다시 자극을 받았다는 데 의미를 둡니다.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많은 것들을 겪고, 고민하고, 여성주의를 실천하면서 살아왔구나 하는 것을 감 잡을 수 있었고, 그러한 고민들이 <일다>로 이어져 서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기쁩니다. 기자교육 참가자들 중 몇 분은 참가신청 사유에 대해 이렇게 적었습니다. “살아가면서 여성주의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싶다”고, “마음만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아마도 <일다> 기자의 자격요건이란 게 있다면 이런 것이겠지요. 여성주의에 대한 고민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 여성주의란 ‘고민하는 것’, ‘성찰하는 것’의 다른 이름인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때로 주위에서 <일다>에 대해 ‘여성주의 교과서’ 같다는 호평을 해주는 분들이 계신데, 반가운 일이지만 그런 평가가 썩 유쾌하지만은 않습니다. 교과서 같다, 정답 같다, 이런 얘기들 속에는 <일다>가 지금까지 목소리를 내는데 고민해 온 흔적이 느껴지지 않아서 섭섭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사회를 설명해주는 명쾌한 언어들을 원하고, 여러 가지 모순을 해결해줄 정답이 있길 바라며, 그러한 지식을 누군가로부터 한 큐에 전달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사회를 분석하는 틀로서 여성주의를 정의한다고 했을 때, 여성주의적 고민이 깊어질수록 세상은 단순 명료해진다기보다 오히려 복잡하고 더 어려워집니다.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기울어진 세상에 살면서 ‘기울기’를 성찰하며 수평적인 질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을 때, 여성주의는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효과적인 방법이자 힘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이미 기울어진 세상 위에 놓여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세상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주의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갈등에 빠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린 여성성/남성성과 같은 도식화된 이분법에 염증을 내지만, 한편으로 이미 남녀가 명확히 구분된 세상에서 여성들의 힘을 결집시키기 위해 남녀 간 문화를 나누어 분석하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상치되는 일처럼 보이지만, 한 사람의 머리 속에 동시에 공존하는 여성주의적 방법론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어떤 때 어떤 방식이 필요한가 하는 ‘판단’입니다. 여성주의자들은 늘 상황에 맞게 여성주의적 지식을 적용하고 때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해야 합니다. 갈등이 두렵고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 괴로워 판단을 보류하는 순간, 여성주의는 저만치 멀어져 버린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주의적으로 살아내는 데 쉬운 방법은 없습니다. 갈등하지 않는 삶은 도피일 뿐이죠. 돌이켜보았을 때, 여성주의는 정답을 알려준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문제 해결의 열쇠를 찾기 위해 머리 터져라 고민을 계속하도록 압력을 넣어주었을 뿐입니다. 여성주의자로서 살아가는 것은, 여성주의자로서 고민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이 때 가장 선행되어야 할 고민은 바로, 자신의 몸이 얼마나 기울어져있는가를 점검하는 일입니다. 다른 말로 ‘성찰하기’죠. 여성주의에 입문한다는 것은 여성으로서의 차별을 인식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하지만, 자신이 가부장제에 길들여져 있는 부분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이 남들보다 더 ‘가진 것’에 대해서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실 속에서 자신의 ‘기울기’를 점검하지 못한 채 평등과 차별을 이야기하다 보면 그 때부터 삐딱한 선을 타게 됩니다. 성찰하지 않고 얻은 지식은 금방 탄로가 납니다.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말하는 이의 고민이 어느 정도 깊은가에 따라 그 말이 전달되고 사회적으로 공감을 일으키는 폭은 천차만별입니다. 여성주의를 도식적으로 이야기하고 적용하는 방식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때로 ‘계속되는 고민을 감당할 수 있는가’를 자문해봅니다. 가부장제의 틀은 그 역사만큼이나 강고하고, 모든 차별적인 통념은 사람들의 존재 위에 있는데, 여성주의자로 사회의 변화를 모색하며 살아나가는 일이 지치고, 질리고, 답답한 여정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행복한 페미니즘”이라는 말 앞에서 머뭇거리게 되었던 이유인 것 같습니다. 만약 행복한 페미니즘이 가능하다면, 그 행복의 요건이 무엇인지 물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기꺼이 자신의 기울기를 성찰하고, 끊임없이 갈등 속에서 고민하고, 판단하며, 자신의 삶에서 실천해나갈 수 있는가. 행복한 페미니스트란 여성주의가 재촉하는 고민의 끈을 계속해서 부여잡고 살아나가는 것이 곧 행복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건져 올린 여성주의 이슈들과 그에 대한 많은 고민들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었던 <일다> 기자교육 참가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이러한 생각들을 정리해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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