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의 아이들’의 죽음

원폭2세환우회 김형율 회장을 보내며

홍여준민 | 기사입력 2005/05/31 [00:17]

‘핵의 아이들’의 죽음

원폭2세환우회 김형율 회장을 보내며

홍여준민 | 입력 : 2005/05/31 [00:17]
최근 가까운 지인들을 많이도 떠나 보냈다. 슬픔에 잠겨 있던 나에게 장애운동을 하는 한 선배는 “네가 아직 젊은 나이지만,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런 일은 계속 있을 거야”라고 무덤덤하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장애와 질병 때문에 짧은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는 처지의 사람들과 구체적 인연을 맺고 살아가기로 마음먹었지만, 여전히 ‘장애’ 때문에 사회적 타살로밖에 정의할 수 없는 ‘그들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감당해야 하는지,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다.
 


고(故) 김형율. 5월 29일 오전, 그이도 흙으로 돌아갔다.

그는 일반인의 30%에 해당하는 폐활량을 갖고 있었다. 걷는 것, 말 한 마디 하는 것조차 힘겨워하면서도 일본과 미국정부가 지난 60년간 원폭에 대한 유전문제를 왜곡, 은폐하며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해왔던 현실에 온 몸을 바쳐 묵묵부답인 사회에 외쳤다.

노점을 하면서도 3남 2녀의 자식을 훌륭히 키워내신 부모님 앞에서, 자식의 입장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병원에서 보내고, 한번 입원할 때마다 병원비로 기백만 원을 지출하게 만드는 자신의 처지가 언제나 송구스러웠다. 그는 나이 들어서도 가족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가 원폭이라는 과거사를 부정하는 미국의 제국주의와 무책임한 국가에 의한 폭력임을 뒤늦게 인식하게 됐다.

그는 <핵의 아이들>, <그날 이후>란 책들을 들고, 아픈 몸을 하고서도 서울, 합천, 일본 등을 마다하지 않고 뛰어다녔다. 원폭2세들과 원폭피해자 단체로부터 “왜 치부를 들춰내는가, 조용히 있어라. 구걸하지 마라” 등의 모욕적인 언사를 듣기도 했지만, 그이의 ‘원폭2세 환우’라는 자기정체성은 일종의 커밍아웃으로 불릴 정도로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그이가 아니었다면 올해 2월 국가인권위에서 원폭피해자와 2세에 대한 실태조사 자료라는 것은 땅 속 깊이 파묻어질 한국 사회의 어두운 역사였을 것이다. 인권시민단체와 공대위라는 연대의 틀을 공고히 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이의 열정적 발품과 땀 흘려가며 외쳤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원자폭탄피해자특별법’이라는 것도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지난 해 그이가 녹색병원에 장기 입원을 하고 있을 때 나에게 전화를 걸어 사진기를 들고 찾아와 달라고 했다. 당시 ‘죽음을 각오하고 투쟁하고 있다’는 무언의 눈빛을 그에게 확인하고는 전율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작은 체구에 몇 마디 말을 하다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잇는 그는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싶다고 했고, 원폭1세 부모님과 장애가 있는 2세 자녀들, 그 가족의 삶을 기록하고 싶다며, 나에게 함께 하자고 제안했었다. ‘그러마’라고 대답을 한지 벌써 몇 개월이 흘러…. 이젠 죽은 자와의 약속이 되어 버렸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그의 아버지 점퍼에는 그가 고통스러워하며 쏟아낸 객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피를 토하며 정신을 잃은 채 아버지 품에 안겨 있던 그가 보이는 것 같아 괴로웠지만, 아버지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운을 차리고 그이와의 약속을 실천하는 것뿐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일밖에 도리가 없었다.

언젠가 그이는 말했었다. “단지, 아프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라고. 그러나, 아파도…, 미쳐 돌아가는 세상 때문에 아파도, 현실은 오늘도 여전히 아픈 국민에게 침묵과 외면으로 일관하며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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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06/02 [12:38] 수정 | 삭제
  • 이런 일이 주위에 있는지 잘 몰랐습니다.
    가슴이 아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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