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상처로 아이들을 위로한다”

늦깎이 동화작가 정승희

정희선 | 기사입력 2005/08/01 [23:56]

“나의 상처로 아이들을 위로한다”

늦깎이 동화작가 정승희

정희선 | 입력 : 2005/08/01 [23:56]
그녀는 마흔에 공식적으로 동화작가가 되었다.

이십 대의 그녀는 소설을 쓰고 싶어했다. 어떻게 하다 동화로 관심을 돌렸냐는 물음에 “그냥 자연스럽게 인생이 흘러왔다”고 대답했다.

대학 졸업 후 친구가 같이 지원해보자고 한 어린이 한글학습지 회사에 친구는 떨어지고 혼자 합격했다. 처음 입사해서는 방문교사를 했다. 어릴 때부터 아이들과 글을 좋아했기 때문에 일이 너무 즐거웠고 인원도 나날이 늘어서 교재 개발 부서로 승진이 되었다. 7년 동안 어린이용 한글학습 업무를 했고, 결혼 후에도 아동물 출판사와 글쓰기 그룹과외를 했다. “동화를 쓰게 되려고” 그런 일들을 하게 된 것 같다고 한다.

가족생계를 책임졌던 이십 대

내가 기억하는 십여 년 전의 그녀는 혼자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힘들다고 말은 하지만 표정은 무심한 그런 사람이었다. 당시 나는 가족이 내가 정한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무척이나 부끄러웠는데, 아무런 애증 없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그녀가 부럽기까지 했다.

그녀는 당시 그런 조건들을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었기에 받아들여야 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도 넉넉하지 않았지만 고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셔서 대학에 들어가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 그녀는 등록금만 주면 나머지 학비는 알아서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집에서 받은 등록금으로 대학을 들어간 후, 나머지 학비뿐 아니라 가족생계까지 전부 책임져야 했다.

그녀는 별다른 대안도 없었고 다 자기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 상황에 대해 무감각 해질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같이 살지 않게 되면서, 여자끼리 이사를 다니면 무시를 당한다는 사실도 알게 됐고 오빠 빚까지 갚아 준 적도 있었다.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목돈을 쓰다

그러다 서른 살에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 인도로 배낭여행을 갔다. 계속 돈을 벌었지만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목돈을 써봤다. 통쾌했고, 이렇게 살 수도 있다는 자유로움을 느꼈다고 한다. 그 이후로 그녀는 좀 이기적으로 살기로 했다. 여행도 자주 했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경제적 조건을 무시하고 생각해보기도 했다.

막연히 소설을 쓰고 싶다는 소망만 품고 있다가 한겨레문화센터 동화창작 과정을 들었다. 처음에는 별 확신이 없었는데 강의 횟수가 늘어가면서 동화를 쓰고 싶다는 확신이 점점 뚜렷해졌다. 문화센터 동기들과 소모임을 만들어서 동화 창작을 공부하고 습작 활동 중에 작년 한 어린이 문학잡지에 등단하게 됐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전업 작가로 활동했고 현재는 <어린이와 문학>이라는 잡지의 편집진으로 활동하고 있다.

오랫동안 어린이 사교육 시장에 몸담았던 그녀는 요즘 초등학생들에 대해서 “안쓰럽다는 말로 모자랄 만큼 고생한다”고 이야기한다. 부모가 장악한 초등학생들의 삶은 적게는 4개에서 많게는 7개까지 학원을 다닌다는 것이다. 지친 아이들은 질문을 해도 모른다고 대답한다고 했다. 학원 수강에 비례해 질문도 많아지기 때문에 생각할 여유는 애초에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글쓰기를 통해서라도 조금이라도 아이들을 치유해줄까 싶어 ‘제일 하고 싶은 일’, ‘부모님에게 짜증 났던 일’, ‘요즘 제일 답답했던 일’등을 써보게 했는데, 이곳도 그 많은 학원 중 한 곳이기 때문에 별 효과는 없다고 한다. 비정상적인 사교육 시장에 아이들은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 속의 ‘상처 받은 동심’ 보여야 해

그녀는 한국동화가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면이 부족하다고 평한다. 그리고 문자에만 연연할 것이 아니라 연극이나 뮤지컬 등 아동문학의 장르 확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들의 현실이 너무 가혹하기 때문에, 이들을 위로하는 동화를 쓰고 싶다고 한다. 그러려면 작가는 작품을 통해 우선 자기 속에 남아 있는 ‘상처 받은 동심’을 보이고 치유해야 한다고, 창작 소신을 밝혔다.

그녀의 첫 작품인 <기다려, 엄마>는 외갓집에 가기 위해 추운 겨울 길을 나선 모녀의 이야기다. 가는 도중 길에서 모녀는 무엇이 서로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오해는 무엇이었는지 속마음을 털어 놓는다. 엄마는 어린 딸과 대화를 통해 자신 또한 자신의 엄마에게서 받은 상처와 표현하지 못한 사랑이 있었음을 깨닫고 친정 집이 보이자 “기다려, 엄마”하며 뛰어가고 어린 딸도 같은 말을 하며 엄마를 뒤따라 간다는 내용이다.

이 동화를 통해 그녀에게 내내 경제적 정서적 부담을 주었던 철없는 어머니와, 그래서 상처 받으면서도 착한 척만 하기로 했던 자신을 보듬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지금 나이가 주는 부담 때문에 걱정이 많다. 지금 시작해서 될까, 쉰 살이 되기 전에 무엇인가 해놓지 않으면 인생은 실패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서도 오십 세에 수능시험을 보고 문예창작과에 입학한 사람을 주위에서 보면 용기를 얻기도 한다. 나이와 성별로 구분을 하는 엄혹한 세상을 보면 다시 두려워지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삶에서 긍정적인 부분을 더 많이 보면서 살아왔던 그녀의 성향상 자신의 세계를 무사히 지켜가리라 예상은 하지만, 이 늦깎이 동화작가에게 격려를 더욱 많이 해줘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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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rah 2005/08/04 [22:55] 수정 | 삭제
  • 여성들에겐 특히 치유의 능력을 가진 그런 분들이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상담이나 글쓰기도 보다 내적인 부분까지 파고들어가는 면이 있는 것 같고요.
    동화쓰기가 치유와 관련이 있다는 점을 처음으로 생각해보게 되네요.
    작품도 읽어보고 싶어요. 나중에 딸에게 읽어주고 싶은 내용이네요. 음. 어머니 생각을 하면서 약간 눈시울이 촉촉해질 것도 같아요.
  • 쟈스민 2005/08/02 [16:00] 수정 | 삭제
  • 매력적이다.


    동화작가란 직업이 특별히 매력이 있는 이유는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란 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승희 작가님 인터뷰를 보다가 아, 탁하고 치게 되는 게 있네요.

    자기 어린 시절의 경험과 느낌을 진솔하게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이요.
    동화가 권선징악의 내용만 주입식으로 다루는 것보다는
    상처받았던 일들도 떠올리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더 많은 공감을 자아내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매력적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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