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 저 기억하시겠어요? 예전에 현수 과외하던 석은지라고.” 3년 전 바닥을 헤매는 성적표를 받아 들고서 공부하기 싫어 휴학을 했고, 여전히 하기 싫은 맘을 어쩌지 못한 채 복학을 했다. 고등학교 때와 별반 차이 없이 학교와 집과 길거리를 오가던 나는 이 무료함을 깨보고자 여기 저기 얼굴을 내밀었었다. 그러다 과 홈페이지에서 선배가 올려놓은, 자폐아동 수학을 가르쳐줄 사람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았다. 순간, 이거다! 싶었던 나는 고민 없이 하겠다고 지원했다. 너무나 많은 물건이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한 채 여기 저기 쌓여 있던 집, 치워도 치운 티가 전혀 나지 않는 작은 공간에서 이상하게도 이 집 주인의 살림솜씨가 보통이 아닐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집안의 작은 공간 틈틈에서 사람이 느껴졌다. 그때에도, 지금 돌이켜 생각해 봐도 그 집은 그녀와 너무나 닮아있었다. 원하건 원치 않았건 주어진 환경에서 빛을 내는 작은 틈들이 꼭 그녀 같았다. 한국에서 장애아이의 엄마로 살아가기 ![]() 아니나 다를까, 그 1년 동안에도 남편의 사업이 두 번이나 부도가 나서 파산신청을 했단다. 그것 땜에 9개월 동안 변호사 없이 법원을 왔다 갔다 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고. 그렇고 보면, 그녀는 언제나 정신이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장애아이의 엄마로 사는 것은 그렇게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아침에 아이 둘을 데리고 지하철로 학교까지 등교시키고, 방과시간이 다른 두 아이를 다시 집에 데리고 온다. 다시 한 아이는 방과 후 교실에, 다른 아이는 복지관에 손을 잡고 버스를 타고 가서, 끝나면 다시 집에 데리고 온다. 그럼 저녁이다. 그래도 지금은 아이들이 커서 낫단다. “얘들이 어릴 적에 둘을 데리고 복지관에 다니는데 얼마나 정신이 없었던지, 내가 바지를 안 입고 거기까지 간 거야. 글쎄. 그게 얼마나 슬프던지.” 그녀가 장애아이를 키우면서 겪어야 했던 힘든 일들은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다. 큰 아이가 특수학급을 다닐 때 아이가 속한 반 담임이 이 아이를 학교에서 내보내야 한다는 서명을 주도적으로 받아 내민 적도 있었고, 3명의 장애아이가 있다면서 4번째인 당신의 아이는 받아줄 수 없다고 해서 민원을 제기했다가 결국, 교육청이 학교의 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적도 있었다. 둘째 아이가 4살 때 다니던 어린이 집에 가보았더니, 아이가 선생님 손을 벗어나 혼자 옥상에 가 누워 하늘을 보고 있더란다. 그녀는 이런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종교를 갖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이제 마음이 여유로워.” 이유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던 나는 되물었다. “불행은 다 지나갔으니까. 나는 둘째 아이가 자폐란 걸 알았을 때 가장 불행했단 말야. 근데, 이미 다 지나가버렸으니까.” “중학교라고 적힌 학교에 가고 싶어요.” ![]() 집 근처 특수학급을 다니던 큰 아이가 특수학급이 있는 중학교를 배정 받았는데, 1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라서 자기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현수가 ‘중학교 라고 적힌 학교에 가고 싶어요.’라고 말할 때마다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몰라. 도우미가 있으면 얘를 일반 중학교에 보낼 수 있잖아. 그럼 나는 둘째만 맡으면 되고.” 어쩔 수 없이 둘째와 같이 다니도록 하기 위해 가까운 특수학교에 보내지만, 학습 능력이 뛰어나서 교장선생님조차 일반학교에 옮기라고 권유를 한단다. 하지만 특수학급이 있는 초등학교 수에 비해 특수학급이 있는 중학교는 월등히 적다. 곳곳에 또 다른 현수가 무수히 존재하고 있다는 걸 뜻한다. 지금은 현수가 특수학교에 잘 적응하는지 물었다. “이제는 내가 이렇게 묻잖아. ‘(특수)학교 갈래, 집에 있을래.’ 그러면 학교 간다고 그래. 그런데 내가 너무 마음이 아프니까. 아침에 책가방을 챙길 때 교과서가 없는 가방을 보면서 한동안 계속 눈물이 나왔어. 현수 반에 아이가 8명인데, 4명이 자기 몸을 못 가누는 애들이야. 담임, 부담임 선생님이 계시지만, 현수 공부 가르치는 건 엄두도 낼 수가 없어.” 현실에서 꾸는 꿈 ![]() 20년 전에 회사 다녔을 땐 토요일 근무 시간을 적정시간으로 줄이기 위해 앞에 나가서 주도했다가 해고 된 적이 있었다 하고, 세계여행에 관한 TV 프로그램은 꼭 녹화해 놓으며 나중에 꼭 이곳에 가야지! 하고 생각했다는 그녀. 이런 그녀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 “3년 후에 작은 애가 중학교 들어가면, 바텐더 하고 싶어. 그럼 기술도 배워야 하고, 작게 차려서 장사하고 싶어.” 바텐더란 말에 ‘역시!’란 생각과 함께 그녀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애 아이를 가진 부모는 그래. 아이가 먼저 (하늘나라에) 가면 다행이라고. 그래도 내가 있을 때 내가 다 처리해 주니까. 우리 아이와 평생 같이 살수는 없거든. 그러려면 돈이 있어야 해. ‘홈스테이’라고 나라에서 선생님은 지원을 해주는데 장소는 부모가 마련을 해야 된대. 우리 아이들 그거 해주려고, 돈 벌어서. 돈이 있어야 해.” 분명 재미난 일이 많을 것만 같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난, 얘기가 진행될수록 왜 모든 이야기가 아이로 매듭지어 지는지, 그녀 자신을 생각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뼈저리게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장애를 가진 두 아이를 낳으면서부터 양육이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고, 아이를 맡아줄 수 있는 곳은 너무 멀고, 비용을 댈 만큼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않았다. 국가에서는 장애아이 한 명당 9만원의 돈이 나올 뿐이다. 14년을 아이와 살면서 그녀는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인 듯 보였다. 그녀의 얘기를 들으며 왜 이 모든 것이 그녀의 문제여야만 하는가에 대해 화조차 낼 수 없는 먹먹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꿈을 꾼다. 그녀의 계획대로 3년 후 자신만을 위한 일을 시작할 수 있기를, 그래서 그녀가 소원을 이룰 수 있기를 빌어본다. “내가 건강해서 우리 아이들을 버리지 않고 돌볼 수 있는 거. 그걸 바래. 우리 아이들은 나 때문에 행복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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