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비정상 한국인 가르는 출산장려책

저출산 위기론 속 ‘재생산의 정치학’

백영경 | 기사입력 2006/02/06 [20:24]

정상/비정상 한국인 가르는 출산장려책

저출산 위기론 속 ‘재생산의 정치학’

백영경 | 입력 : 2006/02/06 [20:24]
<필자 백영경님은 한국여성연구소 연구원입니다. -편집자 주>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낮다는 출산율과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는 고령화 속도가 가져올 “위기”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뜨겁다. 정부는 최근 정부예산 1/7 규모가 투입되는 “희망한국 21-저출산, 사회안전망 개혁방안”을 내놓았으며, 각계각층이 참가했다는 “저출산 고령화대책 연석회의”가 발족됐다.

여기에 대해 여성주의자들은 저출산은 위기가 아님을 외쳐야 할지, 아니면 출산장려책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여성적 관점에서 저출산의 해법을 찾아야 할지를 놓고 혼란에 빠진 모습이다. 사실 여성에게 저출산이 문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지만(일다 2005년 7월 25일자 기사 참고), 그 사실만으로는 인구대체율의 절반 정도에도 미치지 못하는 통계숫자의 위력을 꺾기에는 역부족이다. 또한 인구 위기가 가져올 변화에 대해서는 국가뿐만 아니라 많은 개인들 역시 불안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저출산이 누구의 위기인가를 묻기 전에, 인구 구성의 변화가 어떻게 해서 그토록 만연한 위기감을 자아내는지, 인구 위기의 성격에 대해 따져볼 필요가 있다.

정치적인 성격을 띤 ‘인구’ 개념

국가가 “적정 인구”를 재생산하기 위해 인구관리를 하는 것은 근대국가라면 마땅히 해야 할, 당연하고 일상적인 행위라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사실은 “인구” 개념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며 매우 정치적인 성격을 띤다. 당면한 인구 문제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국가 통치 방식이 달라지기도 하며, 개입할 수 있는 방식과 부문도 달라지는 것이다.

서유럽에서 인구가 하나의 독립적이고 자연적인 실체로서 인간이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을 지칭하는 명사가 된 것은 18세기 경의 일이며, 통계학의 발달에 따라 19세기 중반 이후 사회는 인구 집단과 동일시되어 하나의 큰 몸을 이루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 결과 인구 집단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이며, 이 전체 집단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서는 일부의 권리를 제약할 수 있다는 사고가 자리를 잡았다. 전염병 예방을 위해 검역이나 강제 예방접종을 실시한다든지, 상시적인 질병 감시체계를 갖추고 개인들의 세세한 일상적인 행위들에 대해 정보를 수집하고 관리, 통제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인구라는 용어가 균질적이고 폐쇄적인 실체를 떠올리게 할지 몰라도, 인구를 헤아릴 때 시민권의 소유자/비소유자, 합법/비합법 체류자의 구분이 늘 존재하는 데서 보듯이 인구 개념 속에는 늘 배제와 차별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인구 논의는 심지어 시민들 내부에서도 혼인 여부, 성적 지향이나 흡연 여부 등 다양한 기준에 따라 정상/비정상을 가르며, 언제나 개인들의 가치와 질을 평가하게 된다.

따라서 저출산 위기 담론의 경우에도 출산율이 “정상보다” 낮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면 그 전제로부터 이미 낮은 출산율을 초래하는 행동들과 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비정상적이고 반사회적이라는 결론은 피할 수가 없다. 그것이 바로 저출산이라는 인구문제에 대한 해법이 이성애중심주의, 정상가족주의를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다.

어떤 집단의 출산을 장려하는가

UN 발표에 따르면 1995~2000년 기간 동안 인구가 대체율을 밑돌고 있는 국가는 61개국이며,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인구는 세계인구의 44%에 해당한다. 이 중 많은 유럽국가들의 경우, 출산율 저하는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해묵은 문제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 19세기 이래 독일이나 영국 등 유럽 다른 나라들에 비해 낮은 출산율이 문제가 되면서 1세기 이상 출산장려정책을 펼친 결과 유럽에서 가장 높은 1.93의 합계출산율을 보이면서, 한국이 따라 배워야 할 모범 사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임신과 출산에서 혼인여부에 따른 차별이 금지되어 있으며, 직장과 가정을 병행하는데 필요한 사회적 지원 등, 프랑스의 출산장려책에는 물론 본받을 점이 많다.

그런데 프랑스의 출산장려책의 정치학을 좀더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왜 저출산 위기에 대해 단지 더 나은 출산장려책을 요구하는 것으로 맞설 수 없는지가 분명해진다. 그것은 프랑스와 같은 대표적인 친출산국가라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의 출산을 장려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작년 11월 파리 근교 사태에서도 드러났듯이, 프랑스 사회가 이주자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시선은 곱지 않다. 프랑스 국가의 관심은 인구 증가세를 유지하면서도, 이주에 의한 증가나 이주민들로부터 태어나는 자녀 수를 억제하는데 있다(2004년 프랑스 인구는 38만7천 명 정도가 증가했는데, 그 가운데 이주에 의한 증가가 10만8천 명 정도로 집계).

다시 말해, 전체 인구가 증가하는 추세에 있으나 여전히 백인 중산층들의 출산율이 낮은데 대한 우려가 존재한다. 작년 9월 프랑스 정부가 세 번째 자녀를 출산하는 여성의 경우 매월 최대 1000유로까지 현금으로 보조금을 지급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했었을 때, 이 시책이 이전의 출산장려책이 전체 출산율은 높였을지 몰라도 (하층이나 이주자들이 아닌) 중산층 전문직 여성의 출산율은 끌어올리고 있지 못하다는 반성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한 사람은 많지 않다.

이러한 정책이 문제가 되는 것은 시행과정에서 진정한 프랑스인이란 백인 중산층이라는 개념을 확대재생산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출산장려책의 와중에서도 특히 출산율이 높다고 지목되는 서아프리카계 출신 이민을 제한하고, 이미 이주한 사람들의 출산율을 낮추기 위한 여러 가지 조처를 취한다.

파리 근교 사태에 대한 국내외의 보도에서도 접할 수 있었듯이, 이주자들의 주거부족 문제, 청소년 문제, 실업 문제, 가정폭력 문제는 모두 아랍계와 아프리카계들의 높은 출산율 때문으로 돌려지곤 한다. 결국 아무리 좋은 출산장려책이 마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누구의 출산을 장려하고 누구의 출산은 환영 받지 못하는가라는 “재생산의 정치학”(the politics of reproduction)의 문제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저출산에 대한 우려는 단지 낮은 출산율의 문제가 아니라,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인구는 감소하는 반면 바람직하지 못한 인구는 증가한다고 생각하는 데서 나온다. 다른 유럽 국가들의 경우에도 고민은, 아시아나 아프리카, 중동 계 이민이 증가하는데 비해서 ‘진짜 유럽인’들이 감소한다는 점이다. 안정된 인구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미국에서도 라티노나 흑인들의 비율이 증가하고 백인이 감소한다는 사실에 대한 공포가 존재하며, 여전히 인구 감소보다는 인구 폭발이 국가의 의제가 되어야 할 것 같은 인도에서조차 무슬림보다 낮은 힌두들의 출산율을 높이는 방안이 심각하게 논의된다.

저출산 담론의 민족 혹은 국가중심성이나 순혈주의에 대한 비판도 이미 이루어지고 있지만, 민족이나 국가 혹은 지방자치체와 같은 특정한 단위를 떠나서 출산율 숫자 그 자체로 만은 우리에게 아무런 불안을 일으킬 수 없는 것이다.

인구 위기론에 동참해선 안돼

한국에서도 출산율 저하로 인한 노동력의 부족을 우려하는 것은 이주자들의 증가하는 현상에 대한 우려이기도 하며, 결혼과 노동을 목적으로 “한국만 못한 나라”로부터 인구가 유입되는 한편, 바람직하고 정상적인 “한국인”들이 원정출산, 조기유학, 중산층 이민 등으로 유출되는데 대한 우려이기도 하다. 효율성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불임부부들을 지원하는데 5년간 6천9백억여 원을 지원하겠다는 것도, 불임부부들의 출산권을 지원한다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결국 불임시술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정상가정에서 태어나는 “정상적인 한국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출산장려책으로 한국에 태어나는 어린이들이라고 해서 앞으로 한반도에서 산다는 보장도 없고, 전체 인구가 증가한다고 해서 농촌에 아이울음 소리가 들리게 되는 것도 아니며, 지구화 시대에 이주민의 유입을 무조건 막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다시 말해, 이주를 막아야만 하고 막는 것이 가능한 비정상적인 상태로 보고, 한반도에서 살 권리가 있는 사람들을 혈통이라는 관념으로 제한하며, 출산을 하거나 자본에 이윤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생산성 있는” 인구만이 바람직한 인구로 간주하는 등, 갖가지 정상성의 개념을 전제로 하지 않는 한, 저출산 위기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결국 인구 위기론은 우리와 위협적인 타자의 경계를 나누고, 가치 있는 삶과 가치 없는 삶을 끝없이 위계화 한다. 따라서 저출산 대책 비판은 단지 어떻게 하면 일과 가정을 양립하게 하고 행복한 육아를 가능하게 하여 여성에게 필요한 정책을 마련할 수 있을까, 아니면 어떻게 해서 태어난 아이들의 복지를 증진시킬 것인가에 그쳐서는 안 되며, 더더군다나 출산 증대에 효과가 있을 것인가라는 효율성의 관점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저출산 위기 담론의 전제들을 점검하지 않고 얼마간의 지원을 받기 위해 인구 위기론에 동참할 수는 없다. 위기의식이 전제하는 내부와 외부의 경계, 출산을 장려해야 할 집단과 억제해야 할 집단의 구분, 가치 있는 삶과 가치 없는 삶의 위계가 이미 누군가의 삶의 조건에 대한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저출산 위기론을 둘러싼 재생산의 정치학에 주목해야 하면서, 하나의 커다란 위기를 구성하는데 동참하기보다는 내부적 차이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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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EE 2006/02/08 [16:13] 수정 | 삭제
  • 누구의 출산은 장려하고 누구의 출산은 원하지 않는 건지 말이죠.

    비혼여성의 아이 낳고 키우기도 사회가 원하지 않는 출산 양육의 하나죠.

    말로만 지원한다고 하면서 이번에도 실제로 나아지는 정책이 안 나오더군요.
  • 2006/02/07 [17:06] 수정 | 삭제
  • 저출산 관련해서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갈수록 정부에서 내놓은 정책이나 정치인들 하는 말들을 보니까, 출산장려책에 대한 일다의 선견지명이 맞아떨어졌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좋은 관점을 제기해주는 곳이라 자주 들르고 있습니다.
  • choi 2006/02/07 [06:29] 수정 | 삭제
  • 노동력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이주노동자들은 수용하지 않는 것이 모순된 일인 것처럼, 인구통계나 저출산 대책도 혈통주의 입각하에 경제생산력과는 별개로 추진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잘 분석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외국과 비교할 수 있는 한국의 출산장려책의 특성같은 것도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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