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열린 한국사회포럼2006에서 여성운동과 여성단체들에 대한 여러 고민과 의견을 정리하고 개진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습니다. 그 중에서도 1980년대 중후반 민주화 운동과 여성인권운동을 축으로 설립된 소위 ‘진보적 여성단체’들의 ‘현재’에 대한 문제 의식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기존 여성단체들의 보수화 위기 최근 수년 간 호주제 폐지운동과 건강가정기본법을 둘러싼 여성단체들의 행보들, 여성단체들이 전개하는 평화운동, 통일운동, 17대 총선을 둘러싸고 전개된 여성정치세력화 운동 등에서 ‘위기’의 조짐을 보게 됐습니다. 여성주의가 경계하는 생물학적 여성론이나 가족주의, 모성담론, 전체주의 등에 대해 여성단체들이 비판적 관점을 견지하지 못하고 있거나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됐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가진, 새로운 문제제기를 하는 여성단체 혹은 활동가들이 생겨나면서 상대적으로 기존 단체들의 정체는 더욱 두드러져 보이고 있습니다. 여성들의 권리문제에 있어서도 타 사회진영들이나 정부 혹은 정당이 제기하는 이슈보다 문제 제기하는 속도 혹은 수위가 낮을 때, 개별 여성들이 호소하는 절실함에 다가가지 못할 때,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관련 깊은 낙태, 간통죄와 혼인빙자간음죄와 같은 법, 혼인제도, 사회규범들에 대해 적극적인 개입을 하지 않거나 이슈가 불거졌을 때조차도 입장 표하기를 꺼릴 때, 황우석 사태와 같이 여성인권과 결정적인 관계가 있는 사회적 사안에 대해 대응하기를 언론들보다도 더 몸을 사릴 때, 여성빈곤과 비정규직화를 가장 큰 당면과제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실천적 활동으로 녹여내려는 고민과 시도가 턱없이 부족해 보일 때, 여성단체의 위기를 감지하게 됩니다. 단체 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활동들이 전혀 새로울 것이 없거나 심지어 설득력이 부족할 때, 단체 홈페이지의 배너로 장식되거나 언론사 측의 사진 한 컷으로 담길 수위의 캠페인 이상의 방식이 고민되지 않을 때, 단체에서 내건 기치들이나 이를 활동으로 풀어내는 방식이 많은 여성들에게 “(와닿지 않고) 진부하다”는 평을 들을 때, 변화해가는 여성들의 삶의 모양새와 의식수준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때, 여성단체가 보수화되고 있다, 낙후되고 있다, 여성주의적이지 못하다, 여성들의 삶과 멀어지고 있다, 운동단체가 가져야 할 급진성을 잃고 있다, 등의 판단을 하게 됩니다. 연합체-회원단체 구조가 낳는 문제들 사실 한국사회에는 다양한 여성단체와 조직들, 활동가들이 있고, 기존의 단체라 하더라도 새로운 이슈를 가지고 새롭게 방향설정을 하는 단체도 있으며 특정 사안에 대해서도 각기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보적 여성단체’라 하더라도 한 묶음으로 보아선 안되겠지요. 문제는 한 묶음으로 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연합체’ 시스템이 바로 그것입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28개 회원단체를 둔 연합체로 되어있으며, ‘연합’의 이름으로 전국에 6개 지부를 두고 있습니다. 또 한국여성단체연합의 각 지부들 역시 형식상 해당 지역의 여성단체들을 회원단체로 둔 연합체입니다. 28개 회원단체들 중에서도 한국여성의전화연합은 25개 지부와 1개 지회를 두고 있으며, 한국여성장애인연합이 회원단체 2개와 지부, 준지부단체 8개가 있고, 한국여성민우회의 경우 11개 지부가 있습니다. (각 단체 홈페이지 참고) 그런데 과연 ‘연합체’가 각 회원단체들을 아우르는 대표성을 실제 가지고 있는가, 혹은 가져도 되는가, 회원단체들과 소통이 충분히 이루어지는가, 또는 회원단체들 간 소통이 되는가, 회원단체들과 넓은 의미에서 동일한 목적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각 회원단체들 간 특정 사안들에 대한 관점과 입장이 어느 정도 조율되는가 등의 질문을 던져보면 회의적인 답변이 나옵니다. 즉 이들 여성단체들의 구조는 정직한 운동을 해나가기 어려운 모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연합체’ 시스템은 여성단체들의 활동내용에 있어서 그 실체와 평가가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몇몇 단체가 회원단체 혹은 지부나 타 단체들에 권위적이며, 실제로 단체들이 다양한 목소리와 지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운동진영이 한 목소리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는 점, 결과적으로 보다 급진적인 문제의식들이 사장되거나 드러나지 않게 되는 등 여러 가지 폐해가 있습니다. 적어도 각 여성단체들 간의 입장의 ‘차이’는 선명하게 드러나야 하며, 기존 연합체 회원단체들 외에도 새로운 지향을 가지고 활동을 해나가는 여성운동 조직들이 발전적이고 다양한 여성운동진영을 형성해나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려면 현재의 전체주의적 구조는 해체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신 지금보다 더 많은 소통과 논쟁, 그리고 연대의 관계를 수평적으로 만들어 가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운동의 방법론도 여성주의적으로 지부단체를 두고 있는 단체들의 경우도 지역에서 활동을 하는 단체와 서울에 있는 ‘본부’단체와의 관계 설정에 대해 깊이 성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부 단체들의 경우 각 활동의 내용이나 방식이 서로 다르고 그에 대한 지역의 평가도 상이한 경우, 굳이 ‘중앙-지부’로 존재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문제도 점검이 필요하고, 서울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 속에서 실제로 제기되는 위계의 문제도 여성주의가 추구하는 방식과는 배치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성운동의 씨앗이 자리하기 어려운 척박한 지역 분위기 속에서 기존 활동하고 있는 단체의 ‘이름’이나 지원을 받고자 새로운 여성운동단위들이 특정 단체의 ‘지부’가 되기를 원하는 경우들이 있지만, 지지와 지원의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며 단체는 그 자체 활동으로 평가를 받아야지 ‘이름’의 힘을 빌어오는 것은 정직한 방식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또한 그러한 ‘이름’이 사회적 신뢰도를 잃을 경우, 다른 단체들도 함께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위험하기도 합니다. 여성주의는 운동의 방법론을 이미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성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자매애는 ‘연합체’와 회원단체, ‘중앙조직’과 지부 등과 같은 조직형태가 아니라, 서로 지원하고 지지를 받는 파트너십 관계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요. 사회적으로 보다 큰 힘을 갖기 위해서, 서로 차이가 있을 때조차 이를 무시하고 한 목소리를 내는 구조를 갖는 것을 우리는 ‘위계’라는 말로 설명하고 이해해왔습니다. ‘위계’적인 문화는 여성과 사회적 소수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데 방해요인이 되어왔습니다. 여성운동은 우리 사회에서 많은 것을 변화시켜왔지만,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의 삶 속에 ‘평등’이 녹아 들고 여성주의가 숨쉬게 하려면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 더 다양하고 새로운 문제제기와 방식들, 그리고 노력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여성주의적 가치관이 무엇이며 그 방법론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처음부터 점검하고 논의하고 변화를 모색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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