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소녀시절과도 화해하고 싶다

늦깎이 여성학도 허선미

정경아 | 기사입력 2007/10/25 [21:19]

이젠 소녀시절과도 화해하고 싶다

늦깎이 여성학도 허선미

정경아 | 입력 : 2007/10/25 [21:19]

‘수학은 잘했어도 국어는 못했거든요. 단어 대신 화살표 같은 걸 사용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이번 기회에 글쓰는 것 좀 배워볼까 하구요.’

일다 "여성의 글쓰기와 저널리즘" 강좌 첫 시간, 수줍게 웃으며 자기 소개를 하던 54세의 여성 허선미.

현재 대전에 사는 그녀는, 20대의 세 아들을 둔 시점에서 늦깎이 여성학 공부를 시작한 흔치 않은 이력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일주일에 두 번 강원도까지 대학원 통학에, 상담활동에, 서울에서 열리는 일다 강좌까지 나오는 놀라운 활동력의 소유자. 궁금하다. 저토록 재기 발랄한 중년 뒤에는 어떤 반평생이 놓여있을지.

소녀시절을 뒤흔들었던 ‘일류병’

“귀여운 학생? 전혀 아니에요. 우울한 아이였지. 그때는 중학교부터 입시였거든요? 우리 엄마가 나를 초등학교 때부터 과외 여러 개 시키고. 불법이지, 하여튼 그때부터 대학 갈 때까지 날 일류학교 가야 한다고 막 볶아댔어. 근데다가 목표하던 중학교에 낙방한 거야. 2차까지.”

요컨대 그녀는 10대 초반부터 입시로 인한 고뇌를 겪어야 했던 것이다.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은 ‘어린 낙오자’는 그로부터 12년을 내내, 입시와 일류 병에 주눅든 채 보내야 했다. 단지 입시에 따르는 긴장과 피로만이 아니라, 열등감과 소외감, 고독감과 경쟁심, 여러 왜곡된 감정이 그녀의 소녀시절을 뒤흔들어 놓았다.

결국 그 시절은 추억은커녕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페이지가 되어 버렸다. 훗날, 당시 친구와 우연히 부딪치거나 혹은 편지를 받는 것조차 거부감을 느껴 도망쳐버리곤 하는 정도. 그 12년을 거쳐 얻은 깨달음이 있다면, 스스로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이 그리 강하지 않다는, 다른 이들도 역시 주눅들어 상처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 정도랄까.

아무튼 그녀로서는 삶의 부조리함에 대해 불만은 있었으나 감히 저항할 생각은 못했고, 대학을 졸업하고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실제로는 꽤 담담해져 있던 것 같다. 더 이상 과한 목표를 짊어지지도 않았고, 집착하지도 않았다. 어릴 적부터 ‘되지 말아야지’ 했던 교사 직도 그냥 받아들였다. (당시는 대졸여성에게 허락된 직업이 별로 없었다.) 다른 이들도 대부분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문화격차가 30년쯤 나는 남자와 결혼하다

“암턴 결혼에 대해서는 할말이 많아. 이거 하나만해도 몇 시간 꺼리는 될듯한데. 말하고 싶지도 않은 기분이야. (웃음)”

그녀에게 교사생활은 시시했고,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목표 없는 삶, 이상과 현실의 차이 속에서 의미 없는 3년이 흘러갔다. 결혼 얘기가 나올 나이가 되었고, 현재의 삶에 별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그녀는 굳이 결혼을 거부할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그만 확 결혼해버려? 어차피 별 수 없는 거야. 이게 인생이란 건가. (하지만 나를 포함해서 결혼해본 사람은 다 안다. 그런 식으로 도망치듯 결혼하는 건 호랑이 굴을 피해 사자 굴로 들어가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거.)

중매로 만난 남편은 가난한 시골농부의 장남으로,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개천에서 용난’ 케이스. 중요한 건, 동갑이지만 ‘문화적 차이가 30년쯤 나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남달리 자존심이 강했던 그녀, 그 시절에 대학교육까지 마친 나름 엘리트 여성이었던 그녀는 남몰래 그려보던 장래 남편감을 당연히 ‘서로 통하는 대등한 상대’로 생각했다. 그런 그녀가 30년 전의 사고방식(그것도 남자의)을 가진 상대와 평생을 살아야 하다니, 꽤나 맥 빠지는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연애가 아니라 결혼이다. 둘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댁과의 갈등까지 연결되기 마련. 결국 이것은 평생 그녀의 생활에 가장 큰 괴로움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일단 결혼하고 나면 후회가 안 통하는 시절이었다. 아이를 셋이나 (그것도 남자아이만) 낳으니 후회할 시간도 없었다. 가장 급한 것은 육아가 너무 힘들다는 것. 객관적인 노동력이 절대 부족했다. 돈도 없었다. 좋든 싫든 벌어야 했고, 그녀가 가진 것은 12년간 붙들고 늘어졌던 입시공부의 경험(그리고 잠시 적을 둔 교사 경력)뿐이었다. 결국 중학생 상대로 수학 과외를 뛰며 준 사회생활을 하게 되는데.

역시, 자신의 학창 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더니, 이 땅의 교육현실이 바로 그렇다. 과외학생 중 한 명에 대한 얘기를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그녀. 아이는 착하고 성실했지만, 성적만큼은 한계가 뻔히 보였던 케이스. 하지만 아이 엄마는 막무가내였다. 결국 선미는 그 여자의 집착과 재촉이 미리부터 진저리 나서 손을 떼는데, 아이가 그녀에 대한 애착으로 울고불고하는 것을 보며 얼마나 착잡했던지.

그렇게 아이를 상처 주면서까지 일류학교에 집착하는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일일까. 그녀 자신, 그렇게 공부, 공부했건만 결국은 이렇게 보통 주부로 살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별로 만족스럽지도 않은 모양새로. “우리 집 딸들이 다 이렇게 주부(전업)로 살아. 다들 대학은 나왔어도. 막내여동생은 석사가 두 개나 있어. 그런데도 주부로 살아.“

“그 시절을 그렇게 보낸 게 너무나 억울해”

“우리 엄마 지론은, 여자는 남자 벌어오는 거 가지고 먹고 사는 게 제일 행복하다. 근데 나도 거기에 대해서 크게 뭐 반발은 없었어. 엄마같이 안 살겠다는 생각은 있었는데, 그건 전업주부로 안 살겠다는 게 아니고, 엄마처럼 애한테 너무 연연하고 애를 마구 볶지 않겠다는 거지. 옆에 직장 다니는 사람(교사였던 고모 등)이 모델링이 좋지도 않고. 그땐 그랬지”

당시 여성의 사회진출에 대한 상황과 통념 그대로다. 게다가 입시교육도 한 영향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학창시절에 들은 얘기라고는 오직 공부, 일류대 진학뿐, 그밖에 다양한 자신의 재능과 미래에 대해 구체적인 고민의 계기는 주어진 적이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수학자가 되리라’ 혹은 ‘대학교수가 되리라.’ 즉, 당장 하고 있는 공부의 연장선 정도에 멈추어있었고, 그 외의 여지는 달리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요컨대 주부로 산다는 것에 대해 의문이 없이 키워졌고, 또 그것을 취사선택할 만큼 자주적으로 키워지지도 않았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 나는, 우리 엄마가 아무 것도 안하고 공부만 하길 바랬는데, 실제로 아무 것도 못하고 공부만 한 것 같애. 속상해. 그 시절을 그렇게 보낸 게 너무나 억울해.’

왜 그렇게 살아야 했을까? 또, 왜 그렇게 살고 있는 건지? 내내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것을 ‘인생 고민이 많았다’고 표현한다. 항상 이리저리 ‘정답’을 구하기 위해 움직여왔다. 중학시절은 도서관에서, 고등학교 때는 불교에서, 아이를 낳고부터는 ‘기독교에 빠져서’.

기독교를 대하는 그녀의 화두는 ‘인생에 절대진리가 있는가’ 였다는데.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픈 욕망? 자신이 살아갈 길에 대한 이정표를 구하고픈 욕망? 아무튼 그녀는 철학자의 기질이 있나 보다. 아니면 (그녀가 재능을 보인) 수학자의 기질일지도 모른다. 정답을 구하고자 하는. 정답에 목이 마른.

정답을 구할 수는 없었지만, 안심이 되기는 했다. 역으로 답을 구하고자 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스스로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위로를 찾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떠오른 생각. 나는 이렇게 저렇게 괴로워하지만, 정작 남에 비하면 내가 받은 것은 많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번엔 내가 돌려주어야 할 땐가.

“완전히 자유부인이지 뭐”

그녀는 봉사활동을 찾았고, 그러다가 소년원 아이들의 검정고시를 돌봐주게 되었다. 어릴 적 아무것도 못하고 (입시)공부만 했다며 속상해했던 그녀. 그 공부한 것을 밑천 삼아 과외를 할 때도 일단은 돈이 목적이었던 그녀,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때 공부한 보람이 제자리를 찾은 셈이다. 무엇보다 그녀가 스스로 납득한 의미와 선택한 목표가 있었으니까.

“내 돈 부어가며 정말 열심히 했어. 그땐 소년원 아이들이 심지어 내 아이들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애들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지. 그들이 살아왔던 세상과는 다른 미래의 여지가 있는 세상, 성과도 상당히 좋았어요, 최고였어.”

자신감이, 아니, 삶의 보람이 조금 느껴졌던 것도 같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의 삶을 일대 변혁시킬 결정적 계기가 다가왔으니, 난생 처음으로 여성학을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구나, 내가 고민했던 모든 것들이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였구나!’

소년원 상담활동을 위해 YWCA의 교육과정을 듣다가 우연히 듣게 된 강의였다. 주제는 ‘여성의 삶에서 직업이 가지는 의미’ 비슷한 것이었는데, 강의 자체는 별게 아니었지만 그것을 계기로 자신의 문제를 새로운 시선, 다름아닌 여성의 시선으로 해석해보게 되었다. 명쾌하고 설득력 있었다. 기독교나 불교하고는 다르게 문제를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총체적으로 연관시켜 그 배후와 현상을 함께 드러낸다. 수학적 두뇌를 가진 그녀에게는 안개가 걷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감동과 함께 새로운 질문이 시작된다.

여태껏 내가 살아온 인생은 어떤 것이었을까? 또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아이들은 이미 다 커서 20대인데, 더 이상 내 삶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순식간에 여성학에 매료된 그녀는 현재 대학원 여성학과정을 정력적으로 이수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남편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그녀가 ‘볶지 않고 키운’(혹시 아이들은 억울해할지도 모르지만) 아이들은 이제 그녀의 가장 적극적인 지지후원자가 되어주었다.

“완전히 자유부인이지 뭐. (웃음) 지금의 포부와 미래? 여성학 공부 마치고, 일(JOB)도 얻고, 경제적 독립도 하고, 여성들을 도우며 살고 싶고, 가부장제와 싸우고 싶은 것. ㅎㅎ”

그렇게 얘기하는 그녀의 얼굴은 생기로 가득 차있다. 자신의 미래와 삶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는 그녀는, 더 이상 주어진 대로만 따라가고 거기에 주눅 들어서 휘돌렸던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그때껏 지워버리고만 싶던 소녀시절과도 화해할 생각이 들어, 그 시절 친구들과 학교까지 다시 찾기에 이르렀다. 자신의 삶 전체를 되돌아보는 글을 쓰고 싶어, 일다 강좌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수줍지만 당당히 밝힌다. “늦깎이 여성학도”라고, “젊은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너무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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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꽃나무 2009/08/23 [16:42] 수정 | 삭제
  • 소녀시절의 꿈을 여성학을 통해서 이루고 있는 과정이시네요.
    이 모든 것이 자기사랑노트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소녀시절의 일류병대신 여성학 공부 마치시고는 원하는 것처럼 일(JOB)도 하고, 경제적 독립도 하고 여성 특히 장애여성들을 도우는 삶을 얻기를 바랍니다.
  • 같은시대녀 2007/11/01 [00:21] 수정 | 삭제
  • 많은 여성들의 고민을 속시원히 짚었네요...좋은 성과 기대합니다!!
  • 뭉클 2007/10/29 [17:00] 수정 | 삭제
  • 눈물이 픽-날 정도로 감동이에요!
  • 열정 2007/10/27 [21:11] 수정 | 삭제
  • 좋은글 감사합니다.
  • 인정 2007/10/27 [12:53] 수정 | 삭제
  • 선미님의 현재에, 그리고 지난 반평생에도 애정을 보내고 싶어요~~
    (일다 글쓰기 강좌 신청하신 분들은 글을 잘 쓰시는 분들인가 보네요. ㅋㅋ)
  • 나비의꿈 2007/10/26 [02:05] 수정 | 삭제
  • 글쓰기 강좌 때 뵌 사람입니다. 멋집니다, 선미님도 경아님도, 감동이에요!
  • tori 2007/10/26 [00:27] 수정 | 삭제
  • 반평생을 이렇게 짧은 인터뷰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니,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읽다가 우리 엄마도 생각나고요.
    그때는 다른 선택이 없었지, 라는 말씀을 살면서 몇번이나 들었거든요..
    이제는 돌려주어야 할 때인가, 하는 그 마음이 예쁘게 느껴지고, 가부장제와 싸우고 싶다는 말에 저도 용기가 불끈 솟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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