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부터 언니는 그림만 그리면 상을 타는 거에요. 그런 언니에 비해 저는 별로 창의적이지도 못하고 그림에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정연(27세)은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년을 일했다. 그러다가 모든 것을 접어두고 “내가 좋아하는 걸 하겠다”는 생각으로 뒤늦게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미술공부 하러 새로 들어간 대학교에서 내년이면 졸업한다. 그에게 ‘그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로 다가왔길래 걸음을 멈추고 서성이게 했을까 궁금했다. 그는 언니 얘기에서 이야기를 풀었다. ‘천부적인 재능에 대한 신화’
그는 열등감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했다. “열등감은 우월감의 동전의 양면이라고들 하잖아요? 제가 욕심이 많고, 성취욕이 강해서 성격상 더 그랬던 같아요.” 자기는 그림에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고 살다가, 스무 살 넘어 동아리 활동을 하다가 카툰을 몇 개 그렸다. 그때 주위 사람들의 반응이 ‘잘 그린다’며 좋아해주는 걸 보며 그는 생각이 달라졌다. 그러면서 “그리는 걸 내가 좋아하는구나”를 깨달았다고. 자기가 그림을 좋아하는 걸 알게 되면서 열등감을 넘어설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자신을 돌아보게 되면서 언니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언니에게서 열등감을 키워왔다”고. 언니는 학원이나 다른 과외를 받지 않았는데도 미술에 타고난 재능이 있었고, 주위에서 인정을 받지 않았냐고. 그랬더니 언니의 대답은 의외였다. “언니가 초등학교 때 방과후에 남아서 지도를 해준 담임선생님이 있었대요. 언니에게는 그 선생님이 꿈을 주었던 분이죠. 그리고 입시미술 공부할 때 능력이 탁월했던 한 친구가 있었는데 친구의 그림을 따라 그리려고 노력했다고 그래요. 언니도 나름대로 배우는 과정이 있었던 거죠.” 언니에게서 얘기를 듣는 순간 “재능에 대한 신화를 깨게 됐다.” 세상 그 어떤 누구도 배우지도, 노력하지도 않아도 될만큼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지 않는다는 걸. 그리고 누구든 “재능의 가능성을 봐주고 지지해주는 사람들을 통해 발전할 기회를 갖는다”는 것을. “좋아하는 길을 조용히 가는 사람”
이제 언니와의 관계가 어떨까. “언니는 제게 있어서 중요한 지지자죠.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구요.” 그에 비친 언니는 순수하게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가난하든 말든 큰 생각이나 욕심도 없이 자기가 좋아하는 길을 조용히 가는 사람, 그는 언니를 무척 존경한다. “언니를 닮고 싶지만 잘 안 되는 것 같다”고 말하는 정연은 살짝 웃었다. 정연은 자신의 장단점에 대해 “어떤 것을 해야겠다고 하면 저돌적으로 파고드는 성격이고, 잘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밤을 새워서라도 해내는 편”이라고 한다. 그게 장점이고, 단점이다. 동기부여가 확실하면 몸이 상하는지도 모르도록 집중하지만, 동기부여가 안되면 아무 것도 못하는. 요즘은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있다. 그림 공부를 시작하게 된 배경엔 죽도록 싫었던 회사생활이 있다. 어떤 날은 회사 가기가 죽고 싶을 만큼 싫었다. 그러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마음 먹게 됐다. 무엇을 하고 살든 쉽지 않은 게 인생인데 “그나마 하고 싶은 걸 하면 힘들어도 의미가 있겠구나”를 깨닫게 된 것. 그 동안은 미술을 하고 싶었지만 “늦게 시작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선뜻 시작하지 못했다. 고통스럽던 회사생활이 “하고 싶은 걸 하고 살라”고 그의 등을 떠밀었던 것이다. “학원에 가서 그림을 배우려고 하면 돈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퇴직금을 받으려고, 회사생활을 딱 일년 채웠어요.”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미술수업
“제가 가르치는 걸 좋아하나 봐요. 사람들 앞에서 잘난 척 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 말을 하면서 정연은 크게 웃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자신이 우연히 듣게 된 그림 품평으로 재능을 꺾고 지냈던 시간이 그에게는 후회처럼 남아있다. 그래서 “미술이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누구나 좀 훈련하면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걸” 같이 느끼고 싶다고 했다. ‘나도 누군가를 기다릴 때 그림을 그리며 기다리고 있고 싶다.’ ‘나도 예술가가 된 것 같다.’ 그의 수업을 들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뿌듯하다고. “커리큘럼 하나 드릴까요?” 15주까지 강의 제목과 내용이 정리된 커리큘럼을 건넨다. 앞장을 찬찬히 뜯어보고, 뒷장을 펼치니 이렇게 적혀있다. 우리 미술교실의 원칙. 첫번째 남과 비교하지 마라. 두번째 너무 잘 하려고 하지 마라. ‘너무 잘 하려고 하지 마라’는 두번째 원칙에는 몇 개의 설명까지 덧붙여져 있다. 간단한 문장들에서 그의 마음이 느껴진다. 특히 “작업을 하다가 욕심이 날 때, 그때에는 불을 켜고 하라”는 대목에선 친절함이 배어있다. 혹시 신이 나면 자기처럼 몸이 상하는 줄도 모르고, 열정적으로 집중하는 사람을 생각해서 하는 조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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