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년 전의 겨울, 그는 암울한 표정으로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서있었다. 우울증에 관한 책이었다. 최근에 이야기를 나누다가, 초록님은 당시 자신의 모습에 대해 “실연이라는 특별한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나이 서른에 뒤늦게 만난 세상
이별의 아픔과 정체성에 대한 두려움, 죄책감. 이런 문제로 괴로웠을 때, 인터넷 사이트 검색 창에 “과감하게” 레-즈-비-언이라고 쳐보았다.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좀 덜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과감하게 치셨군요?”라고 웃으면서 물으니, 반복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아직도 비장한 말투다. “겉으로 피곤하고 지쳐 보인다고 하지만, 나의 내면에는 긍정적인 면이 있는가 봐요. 그래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살아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언제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살아내야 한다’는 마음으로 인터넷 검색을 한 결과, 레즈비언단체와 커뮤니티를 만나게 됐다. 그는 당시에 자신이 상담을 요청하면서 게시판에 썼던 글의 내용을 이야기해주었다. “죽을 병 걸린 사람도 사랑을 하고, 살인자도 사랑을 하잖아요. 나는 착하고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인데, 왜 그것(사랑) 하나로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 거냐고요.” 그 시기가 나이 서른, 스스로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이반으로서 정체화를 하고서 레즈비언 커뮤니티에 막 들어섰던 시기다. 이전엔 자신과 같은 극소수의 사람들이 숨어서 산다고 생각했고, 정체성을 드러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이다. “그땐 너무 순진해서” 그러나 다시 태어나는 기쁨은 얼마 가지 못했다. 레즈비언 바에서 처음 만나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며 다가온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6개월 만에 또다시 이별을 겪게 된 것이다. “6개월이 6년 같았다.” 상대는 이미 마음이 옮겨갔는데, 초록님은 그렇게 일찍 마음을 정리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땐 너무 순진해서” 그랬다. “억압 받았던 것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얻고 기분이 좋았었는데…. 여기도 똑같은 세상이구나, 이반이라고 얘기한다고 해서 사람과 안 헤어지는 게 아니구나 깨달았죠. 그땐 커밍아웃했는데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해? 이해가 안 되고,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고 미칠 것 같았어요. 순진했죠.” 바로 그 시기였다. 내가 초록님을 처음 봤을 때, 그는 인생의 의미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사랑의 아픔을 치유하는 데는 시간이 약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로부터 7,8년이나 지났다. 이제 서른여덟이 된 초록님과 성 정체성이나 연애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인생의 다른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도 자신의 삶에서 연애와 관련한 비중이 확 줄었다고 말했다. “연애를 꼭 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아요. 마음 맞는 친구들이 있다면 그것으로 족해요. 예전엔 누군가를 만나서 이곳(커뮤니티)에서만 인정 받고 살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어요. 지금은 그런 생각 별로 안 해요. 살면서 주어진 인연이 있으면 그때 만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죠.” 2006년, 아버지의 죽음
“돌아가시면서 집을 홀랑 날리고 가셨어요. 평소에도 대책 없이 사셨지만, 돌아가실 때까지 그럴 줄은 몰랐죠.” 아버지 병원비를 대느라 보금자리가 사라졌다. 20대 때는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면서 첫 월급부터 어머니에게 가져다 드렸고 동생들 용돈과 생활비도 챙겨주는 맏이였는데, 서른 중반에 남동생 집에 얹혀사는 신세가 됐다. 게다가 카드 빚을 갚느라 주위에 돈을 빌리는 처지가 됐다. 1년간 동생 집에서 살면서 모은 돈으로 카드 빚을 다 갚고 독립해 나오기는 했지만, 갑자기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경험은 초록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내 인생에 카드 빚이라니, 살면서 이런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돈이라는 것에 대해서 벌면 되지 하고 자신만만했는데, 돈을 빌리는 입장이 되고 보니 바뀌더라고요. 아, 사는 게 장난 아니야, 여기서 삐끗하면 노후가 없을 수도 있어,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의 가족들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죽음은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이었다. 크게 사고를 치는 사람이 없어졌으니 말이다.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했다는 아버지, 세 자녀 중 맏이인 초록님은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가끔씩 아버지 생각이 난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그늘이랄까, 나무로서의 역할을 못하셨기 때문에 (아버지가 안 계시다고 해서) 그런 아쉬움이 있는 건 아니고요. 도의적으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죄책감이 있어요. 아픈 사람이었는데, 돌아가실 때 참 외로웠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삼십 대 중반 넘어가면서 달라진 것들
가진 것이라곤 300만원 보증금밖에 없었던 초록님, 그러나 ‘죽으란 법은 없다’고 다행히도 그곳을 무사히 나오게 되었고 그에게 방 하나 내주겠다고 제의한 분도 나타났다. 월세라기보다는 도의적인 의미의 “사례”를 하면서 그 방에서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있다. 갑작스레 치과 치료를 받느라 목돈을 마련해서 나갈 날이 미뤄지고 있긴 하지만, 조만간 독립할 것이다. 삼십 대 들어와 유난히 우여곡절 많은 삶을 살게 된 초록님, 그는 힘든 시기를 거치면서 많이 변화한 것 같다고 말했다. “몸도 37년 썼으니 이제 하나씩 점검을 해줘야 할” 때가 되었고, 성격적인 면에서도 달라졌다. “예전처럼 극단적인 생각을 하지 않게 된 것 같아요. 크게 좋을 일도, 크게 나쁠 일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 같으면 파르르 떨었어야 하는 일들도 없어지고 말이죠.” 헬스를 할 체력이 안 되어서 시작했다는 요가가 많은 도움을 줬다. 다이어트 요가 대신 명상을 하는 요가를 배우게 되어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의식을 외부에 두고서 나를 바라보는 거예요. 내 감정이 무엇인지, 슬픈지, 화가 나 있는지 생각할 수 있게 되면 감정에 더 깊이 빠지지 않고 조정할 수 있게 되죠.” 서른여덟은 “밤샘이 안 되는 나이”, “다음 날을 위해 쉬어야 할 나이”다. 초록님은 어린 시절에 사고가 났거나 운동을 하다가 다쳤던 부위가 요즘 와서는 계속 말썽을 부린다고 한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한창 나이”다.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구조조정 대상이 되는 바람에, 3년 전부터 직종을 바꿔 시작한 학원 강사 일도 “괜찮다.” 아이들이 잘 따라주고,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 맞다. 초록님은 “앞으로 살 날보다 지난 시기가 더 크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지만, 일부러 나이를 앞서 나가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금전적으로는 위축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살아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 긍정적인 마음이 언제나 그의 깊숙한 곳에 탄탄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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