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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음악만 좋아하다가 어느덧 재즈에 관심을 가지게 된 시기가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좋아하는 장르는 재즈의 역사를 다루는 책에서도 맨 끝에 몇 쪽 안 되는 분량으로 자리하는, 재즈 ‘전문가’들조차 재즈라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옛 시절의 재즈에 익숙한 세대는 한사코 그건 재즈가 아니라며 고개를 저을 법한, 그런 부류였다.
한국의 재즈와 그 특권적 아우라
럭셔리한 와인보다는 소박한(?) 맥주 한잔이 더 어울리는 클럽들을 위주로 다녔지만, 그래도 연주인들 사이에는 언제나 암묵적인 사제관계 같은 것이 전제되어 있을 때가 많았다. 앞선 사람의 훌륭한 연주에 후배 연주자들이 경이를 표하며 신중하게 감상하려는 태도는 이 시대에 찾아보기 힘든 진지함이긴 하지만, 그만큼 새로움이 움트기 어렵게 만드는 환경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세상에는 굉장히 다양한 재즈음악과 연주자들이 있다. 그들 모두가 하나의 이미지를 가진 범주로 규정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때때로 국내 재즈 씬이 풍기는 배타적인 정신권력적 뉘앙스에는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 이는 재즈가 국내에 유입될 때 작용했던 환경적인 요소에서 크게 기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외국의 어느 음악학교 정도는 나와줘야 하고, 일반인들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음악적 계산과 즉흥연주의 정교함이 거의 곡예수준은 되어야 대가로 인정받을 것 같은 대표적인 이미지들이 있다. 본토 재즈에 대한 엄중함과 존경으로 유지되는 그 집단적 특성. 단순화시켜 말하는 것의 위험성을 피하지 않고 이야기한다면, 국내에서 재즈는 대중음악계의 ‘순수예술’처럼 취급된다. 그러나 기준이 엄격한 만큼 역설적으로 내부와 외부에 많은 이단자를 포함하고 있을 터이기도 하다. 여성의 음악과 여성을 넘어선 음악 조금 다른 얘기로 옮겨가서 남성들에게도 두루 인정받는 여성뮤지션들을 떠올려본다. 여성이 제작한 음악을 여성의 음악으로만 볼 것인가, 여성이라는 특수성을 넘어선 음악으로 볼 것인가. 이는 현대에 이르러 더 첨예화된 쟁점이기도 하다. 음악계에서 쉽게 통용되는 “여성(성)이 만든” 음악이라거나 “여자지만 뛰어난” 음악이라는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평가들은 비슷한 주장을 고집스럽게 하고 있는 듯하다. “(남자들과 달리) 대부분의 여성뮤지션은 성적인 한계를 버릴 수 없지만, 그래도 때때로 (남자만큼 끝내주는 실력의) 뛰어난 여성들이 있지.” 정말이지 지역·인종·계급·문화의 차이도 없이 여자들은 그렇게 언제나 ‘본질적으로’ 동질적이란 말인가? 그나마 “그 여자 음악은 내가 인정하지”라는 짐짓 관대한 말속에도 이미 남성중심적 가치관이 자리하고 있지는 않은가? 예전에 읽은 어떤 음악학자가 쓴 책에서 공감한 바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남자같이’ 음악 하는 여성뮤지션을 존경한다. 인정해준다. 하지만 돌아오는 질문도 예상된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사회가 남성성 위주의 성별이분법을 고수하는 한, 분명 여성뮤지션들은 이미 규정된 성적 특성에 일정 부분 이상 휘둘릴 것이다. 거기에 순응하거나 반대하거나, 대다수는 여성성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위치일 것이라는 말이다. 하다못해 장르 음악들은 은근히 남성에게는 테크닉적 천재성을 요구하고, 여성에게는 감상적인 특수성만을 기대하는 면이 적지 않음을 상기해 보라. 그러나 (당연한 얘기지만) 여성뮤지션의 그것은 여성적일 수 있지만, 남성적인 것과 분명히 구분되는 의미에서 여성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한 뮤지션의 음악을 오로지 성적인 특성에 가두어버리려는 평가가 차별인 것처럼, 여성의 예술작업이 성에 대한 고정관념 따위에는 전혀 영향 받지 않기를 바라는 관점도 차이를 감추라는 명령이 될 수 있다. 나는 이런 지평에서 말로(malo)의 음악을 들어볼 것이다. 그에게서 국내 재즈계의 주류적인 태도와 거기에 온전히 동의하지는 못하는 모습을 동시에 발견하면서, 나는 그가 재즈에 있어 주변적이라고 지칭되는 것을 풀어내는 방식에 대해 말하고 싶다. 말로의 음악이 만나게 하는 것
기존의 것들이 서구 추종적인 방식을 조심스럽게 유지·반복하는 데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면, 말로의 것은 자신의 언어를 가지려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다른 예술장르에서와 마찬가지로 음악에서도 참으로 많은 형식과 내용으로 주체와 객체(타자)의 만남이 그려지듯이, 말로의 음악도 그러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한국적인 재즈의 탄생’이라고 명명했다. 서양의 ‘어려운’ 재즈에 동양적인 미로 통칭되는 정적인 정서가 스민 데다 한국말의 시적인 표현들이 담겨 있으니 당연히 그렇게 여겨질 만하다. 게다가 ‘한국의 엘라 핏제럴드(Ella Fitzgerald)’라는 평을 얻을 정도로 멋진 스캣 실력을 자랑하는 테크닉적으로도 훌륭한 보컬리스트이니 금상첨화 아닌가.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말로의 재즈가 한국적이라고 불리는 원인은 그 형식보다는 재즈를 대하는 접근법과 내용에 많은 부분 기대어 있는 것 같다. (작년에 발매된 4집 앨범 [지금, 너에게로]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 그가 섞는 음악들도 ‘한국적’이라기보다는 서양의 것이 대부분이니 더욱 그렇다. 내게도 말로의 3집을 듣던 순간은 낯설고 새로웠다. 우선 대표곡인 “벚꽃지다”에서처럼 앨범 전체를 휘감는 무드는 흩날리는 서글픔이다. 그렇지만 동양의 정적인 이미지보다도 구체적이고 정서적인 관계들을 함축한 듯한 가사와, 그것을 전달하는 말로의 창법이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떠올랐다. 이상한 일이었다. 말로 음악 속의 어머니는 딸로 자란 내가 익히 알던 그 사람은 아니었다. 여성은 독립적일 수 없다며 모성성을 내면화하고 모방하도록 종용하는 생활 속의 엄마가 아니라, 떠나온 곳(시절)의 어머니였다. “나는 바람 부는 언덕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멀리 떠나지도 못하고” (“1994, 섬진강” 중에서) “다시 꽃 지고 어머니 우시네 불 꺼진 세월 마음 저무네” (“어머니 우시네” 중에서) “눈부신 꽃잎 날려 잠시 빛나다 지네 꽃보다 아름다운 얼굴들 모두 어디로 갔나” (“벚꽃지다” 중에서) “아이야 나도 한땐 흔들리는 깃발처럼 저 푸른 하늘 아래 나부끼고 싶었네” (“아이야, 나도 한땐” 중에서) 속절없는 세월 앞에 선, 마냥 강하지도 위대하지도 않은 어떤 여인의 형상, ‘그녀’의 그리움과 빈 마음이 차례로 떠올랐다. 그리고 ‘여성의 완성은 어머니’라는 신화를 견디는 이의 서러움을 마주하고 있는 듯도 했다. 혹은 다 자라 공적인 세계로 옮아온 어떤 ‘아들과 딸들’이 떠올리는 이미지로서의 어머니가 연상되기도 했다. 물론 말로 음악 전체를 하나의 코드로 환원시켜서는 안되겠지만, 여성인 내게 그의 음악은 이런 지점에서 다른 재즈와 달랐다.
가사를 거의 전적으로 이주엽에게 맡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사의 문학성이 음악으로 완성될 때 드러나는 말로의 작곡적인 필터는 문화적으로 세련되었으면서도 소박한 데가 있고, 돌봄의 정서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이는 기존의 서정적인 어머니상을 답습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아가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의 아들과 딸들이 공통적으로 극복하고 떠나오려 했던 상징화된 공간이 우리 안에서 다양한 이유로 여전히 되풀이될 수 있음을 발견하는 경험이기도 하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타자는 딜레마가 아니다 단편적으로, 언젠가부터 비밥과 프리재즈가 재즈에 대한 사람들의 상상력을 제한해왔다. 그리고 주류문화의 비평적 잣대는 엄청난 기능적 숙련과 고급문화의 체험을 거쳐야만 할 수 있는 예술작업을, 인간 예술혼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단정 지어왔다. 도대체 그 영혼은 누구의 것이며, 어떤 구조와 위치에서 습득할 수 있는 것인가. 굳이 세세하게 따져 묻지 않더라도 우리가 대체적으로 ‘서구, 남성, 지배계급의 것이 우월한 것’이라는 가시적인 도표 속에서 분류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인지할 수 있다. 그러나 글의 초반부에서 말했던 것처럼, 엄격한 규율은 거기서 벗어나는 상황들을 더 많이 동반할 수밖에 없다. 그것들은 해결할 수 없는 난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문화의 특권을 지탱하기 위해 가려져 있던 영역이면서 권위의 한계를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말로의 ‘제 3세계 재즈’는 엘리트주의가 지엽적인 영역으로 축출해냈던 사적이고 절절한 감정선들이 탁월한 예술작업을 추구함에 있어서도 위협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쩌면 말로와 그의 음악에 의미를 두는 사람들에게 중요하게 여겨져야 할 것은 서구와 같아지려는 욕망이 아니라 그들과 우리 사이의 차이이며, 덜 권위적이고 덜 배타적인 재즈에 대한 경험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말로의 음악이 전해주는 것은 흔적을 그리워하고 흔적을 기억하며 흔적을 비추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그렇다 해도 말로의 특수성이 편향적 시선에 갇힐 여지가 있으며 그것이 모든 차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함께 고찰되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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