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여성 팝음악의 어떤 환상에 대하여

‘걸스’힙합 그리고 ‘걸스’모던락의 자유분방한 섹시함

성지혜 | 기사입력 2008/05/01 [11:58]

최신 여성 팝음악의 어떤 환상에 대하여

‘걸스’힙합 그리고 ‘걸스’모던락의 자유분방한 섹시함

성지혜 | 입력 : 2008/05/01 [11:58]
영미권을 중심으로 편성된 거대한 세계 팝음악 시장에서 현재 여성가수가 가장 흔하게 표방하는 장르를 꼽자면 바로 힙합과 모던락일 것이다. 힙합의 댄서블함에서, 그리고 모던락의 시원스러운 사운드에서 팝적인 유용함을 뽑아내고 있는 이들과 이들의 제작자는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 ‘인기 있는’ 여성상을 구현한다.  그것은 바로 자유분방함이 주는 섹시함이다.
 
‘걸스’힙합과 ‘걸스’모던락- “I don't wanna be a stupid girl”
 
▲ Avril Lavigne [Let Go] 2002
상징적인 용어이다. 단지 10대 소녀가 부른다는 의미보다는 남성 위주의 힙합을 여성이 (‘여성스럽게’) 부른다는 의미로 ‘걸스’힙합이라는 말이 통용된다면, 나는 여기서 그와 유사하게 ‘걸스’모던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이 글이 말하고자 하는 음악문화들을 지칭하겠다.

 
동질적으로 묶기 힘든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라니스 모리셋(Alanis Morissette)이 음악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에이브릴 라빈(Avril Lavigne)이 맞닿는 지점들이 있다. 그리고 예전에는 소울풀한 장르를 감상적인 발라드로 소화하는 여성들이 주로 조명됐지만, 이제는 카리스마 강한 ‘여성’힙합(알앤비) 사운드도 점차 팝 씬의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들은 저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인형이 아냐”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전문적인 장르 음악들에서 순응적인 여성상에 반기를 드는 여러 움직임들이 꾸준하게 있어왔지만, 그것이 강력한 문화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현 시대의 대중문화에서는 삶에 수동적이며 남성에게 매달리는 여성은 더 이상 대중을 움직이지 못한다. 귀여운 댄스팝, 말랑한 발라드 역시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인기아이템들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여성음악가를 또렷하게 각인시키기에는 부족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인지 특히 그룹이 아닌 솔로 가수의 경우, 그러한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룹이 여러 사람의 매력으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면, 확실히 솔로 가수는 한 사람의 매력으로 승부를 보아야 하는 상황이기는 할 것이다.
 
어찌됐든 우리의 음악시장도 그러한 흐름들에서 멀지 않음을 최근 몇 년 사이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에이브릴 라빈의 ‘Sk8er Boi’를 닮은 윤하의 ‘혜성’이 있고, 비욘세(Beyonce)와 그가 몸담았던 데스티니스 차일드(Destiny‘s Child)는 우리나라 여성가수들에게도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었다.
 
일차적으로 유명 여성그룹의 인기멤버들이 속속들이 가지고 나온 솔로음반들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이효리는 해외 여성가수들의 다양한 매력에서 영감을 받은(?) 곡과 패션을 세련되게 연출하면서, 국내 걸스 힙합의 실질적인 신호탄을 쏘았다(2003년은 이효리 외에도 흑인음악에 대한 전문적인 접근과 보컬 실력을 전면에 내건 렉시와 거미가 데뷔앨범을 낸 해이기도 하다. 또 이효리와 유사하지만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을 거두진 못했던 전혜빈의 [In My Fantasy](2005)도 거론될 수 있겠다).
 
박정아는 2006년에 발매한 개인앨범(대표곡: ‘Yeah’)에서 모던락 코드를 강하게 선보였다. 또한 특정 장르 위주로 꾸미지 않은 음반들에서도 필수항목처럼 들어가 있는 섹시 힙합과 알앤비, 팝적인 락 넘버들을 우리는 흔히 들어볼 수 있다. 그들은 이전의 여성 팝음악보다 더 강렬하고 자발적인 젊은 여성의 이미지로서 다른 여성가수와 구별되려고 한다.
 
그들과 우리가 공유하는 새로운 여성 이상형
 
▲ 이효리 [Dark Angel] 2006 이미지
지금 팝음악과 그에 결부된 문화들은 각기 다른 것처럼 보이는 두 개의 여성상을 보여준다. 하나는 적극적인 성적 에너지로 가득 차 있고, 다른 하나는 자유로운 자아실현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예컨대 모 콜라광고에서 브리트니 스피어스(Britney Spears)와 비욘세, 그리고 핑크(Pink)가 투사로 연기하며 남성권력자(폭군)를 권좌에서 떨어뜨려버린 설정처럼, 대중소비사회의 여성상은 아름답고(섹시하고), 동시에 강하다(도전적이다).

 
‘여성스러운’이라는 표현에 시대마다 조금씩 다른 의미가 부여되었던 것처럼, 과거의 여성스러움이 수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데 반해 현 시대의 여성스러움에는 능동성이라는 새로운 의미가 기입되어 있다. 섹시함과 자아실현은 각자 다른 성질처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통합적으로 하나의 새 여성상을 구축하였다.
 
그것은 ‘스스로 선택한다’는 뼈대에 의해 형성된 구조물이다. 과거에 얽매여 징징대지 않으려면 여성은 이제 내숭을 떨지 말고 스스로 성적 관계를 선택해야 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인생을 성공시켜야만 한다. 자유로운 경쟁사회에서 여성에게 더 이상 억압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기 어려우므로 그들은 ‘각자가’ 자신의 인생 쾌락을 책임져야 한다.
 
섹스에 대한 욕망의 표현은 더욱 직접적이 되었고(“오늘 밤 나를 꼬셔봐”), 한 개인으로서의 자존감을 말할 때에는 추상적인 언어(“눈부신 빛이 비칠 때 나는 날아갈 수 있을꺼야”)를 사용하는 예가 잦다.
 
음악적으로는 미니멀하고 펑키한 힙합 비트 위에서 거친 숨소리와 바이브레이션을 풍부하게 녹여내는 농염함과, 뮤트(mute)주법으로 연주하다가 곡 중심부에서 터져 나오는 기타 리프의 상쾌함처럼 ‘중성적인’ 보컬리스트의 매력이 팝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해방의 신화’
 
▲ Pink [I'm Not Dead] 2006
이러한 ‘인기 있는 악녀’의 성격유형은 남성에 대한 도전이라는 외피를 둘러쓰고서, 차별철폐의 신화를 쉽게 현재완료형으로 만드는 점에서 개운치가 않다. 이는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이 『성의 변증법』에서 ‘해방의 신화’라고 했던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겹겹의 이미지로 둘러싸여 있으나 새로운 여성 이미지들은 유사한 이면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시각문화가 끈기 있게 내세우는 여성의 인간화는 여전히 ‘남성에게 매력적이어야만 하는 여성’을 교묘한 전략과 착각을 동원하여 묘사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능력이 있는 여성-모던락 걸-이 클럽에서는 남성들이 상상하듯 매혹적인 악녀-걸스힙합 걸-로 변신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현 시대의 문화적 무의식을 생각해보라.
 
사회의 일반 남성만큼 사회적 권리가 있다고 배우지만 결국 그것이 현실에서 실현될 수 없음을 경험한 여성들의 반응적인 판타지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여성의 운명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이려고 하지 않는다면, 한 여성이 혼자서 인생을 꾸려나갈 때 그리고 제도와 관습에서 여전히 성적 약자인 그가 대담한 ‘원나잇’을 누릴 때 어떤 어려움과 위험에 당도하게 될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음악에게 모든 문화의 모순과 차별을 해명하라는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개별 음악문화들이 근본적인 골칫덩이를 만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문제의 원인이기보다 결과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들은 상업적으로 환상을 팔았지만, 그것은 사회에 자연스럽게 깔려있는 여성에 대한 남성 중심적인 상상력 안에서 잉태되었으니 말이다. 팝음악의 여성상은 다만 상상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하지만 젊은 세대에게 유포된 이와 같은 ‘최신’ 여성의 표피적인 지위와 권한이 지나치게 천편일률적이며, 그것이 반복되는 여성문제들을 망각하게 만든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더 큰 문제는 그로 인해 여성해방 신화를 비판하는 행위들이 고루하거나 시대에 뒤쳐진 것으로 치워버려질 수 있다는 점이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말처럼, 어떤 면에서 현대 여성은 남성을 성가시게 하지 않을만큼만 독립을 배웠다. 남성에게 경제적, 심적으로 의존하여 생기는 짐을 덜어주려면 “내 인생은 내가 모두 책임질 것”이라고 선언해야 하고, 순결주의에 휘둘려 남성을 짐승으로 몰거나 책임지게 하지 않으려면 개방주의자(과연 무엇을 개방해야 하는지는 생각해 볼 부분이 많을 것이다)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남성의 시각에서 유쾌할 정도로는 여성스러워야 한다. 그리고 ‘진짜’(?) 페미니스트여서는 안 된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남성 중심적 자본주의 문화의 현재를 지탱하는 가장 큰 동력을 해방의 신화라고 본다.
 
자유주의적 환상과 개인화의 한계를 넘어
 
▲ 윤하 [Go! Younha] 2006 재킷
이 환상이 어떻게 이토록 공고하게 유지되고 공유될 수 있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원인의 하나로 자본주의 국가체제가 멋지게 입고 있는 옷인 자유주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태어날 때 가난해도 무한경쟁의 기회가 주어지므로 운명은 개인 노력 여부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논리가 마찬가지로 인종이나 성별문제에 통용된다.

 
“당신에게 무한한 자유가 있다”는 거짓말보다 “행복은 당신 ‘혼자서’ 얻으라”는 체제의 지시사항이 사람들을 더욱 분열되게 만들고 타자와 함께 하는 자아상을 꾸릴 수 없게 만든다.
 
개인주의는 사람들을 문제의 뿌리에 다가서게 하기보다는 낭만주의적으로 미래를 낙관하게 만든다. 한 백인 여성뮤지션이 락음악과 일탈을 싫어하는 숙녀 이미지의 다른 여성들을 비웃을 때처럼, 어떤 흑인 여성뮤지션이 옷에나 신경 쓰는 ‘한심한’ 여성 백인 거식증환자들을 당당하게 놀림감 삼을 때처럼, 우리는 독립적이지 못한 여성들을 혐오하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그들과 우리가 동일하게 마주하는 남성중심성에 대한 비판은 그저 “날 만족시켜봐”, “나는 사랑 따위에 얽매이지 않아”라는 식의 남성문화 모방으로 그칠 때가 많다. 여성도 자유롭게 요구하고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나쁜 것이 아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팝문화의 시각이나 해결점은 현실의 사회적 조건들을 고려하지 않는다.
 
여성 팝문화는 보수주의를 조롱하고 자유분방함을 주창한다. 하지만 그러한 반란들은 실질적인 제도와 관계에 변화를 만들어 내거나 공동의 각성을 이끌어내기에는 모자람이 많다. 그것은 여전히 남성에 의한 여성상의 한계지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적 가치관이 여성 이미지에 편협함과 정치적인 무력함을 한층 강화시킨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개인주의적 권리 획득의 노력은 권리를 갖지 못한 여성들을 계속해서 소외시키고, 그 결과 그들이 사회에서 공공연하게 열등인자로 취급되는 상황을 역설적으로 증가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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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진 2008/05/09 [14:36] 수정 | 삭제
  •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이란 책을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시작은 걸스 힙합이었지만 개인적인 문제의 고민도 더불어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어떤 '여성성'에 대해 생각할만한 계기가 됐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부탁드려요.
  • 독자 2008/05/06 [22:48] 수정 | 삭제
  • 그러나 많이 불만인 것은 아닙니다. 대중음악이니까 유행인가보다 할 뿐이죠. 한국의 드라마에 대한 심정과 비슷하다고 할까나.
  • 독자 2008/05/06 [22:46] 수정 | 삭제
  • 비욘세(Beyonce)류가 유행이었을 때부터 팝음악에 흥미를 잃어버렸는데, 한국의 모방 내지는 답습이 시작되어 어지간히 지겨워졌다는.
  • 레인보우 2008/05/06 [18:57] 수정 | 삭제
  • 비문이 많고 번역체네요. 꼭 번역물을 읽는 느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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