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과 나, 그리고 인연

풀무학교 전공부에서 만난 박푸른들

여준민 | 기사입력 2008/05/30 [22:47]

땅과 나, 그리고 인연

풀무학교 전공부에서 만난 박푸른들

여준민 | 입력 : 2008/05/30 [22:47]
[필자 여준민님은 ‘장애와 인권 발바닥행동’ 활동가이며, 잠시 활동을 쉬고 현재 풀무학교 전공부에 2학년으로 재학 중입니다. –편집자 주]

▲풀무학교 전공부에서 만난 박푸른들 (오른쪽)
몇 해전 나의 타로점을 봐주던 후배가 문득 이렇게 얘기한다. “언니, 근데 흙이 보이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글쎄 잘 모르겠는데, 암튼 흙이 보여.”, “음, 그렇구나…”

 
그때는 대추리 투쟁으로 마음이 많이 갈라져 있었다. 그 투쟁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주 많이 아프고 상처를 받았다. 우리들의 투쟁이란 것이 늘상 지는 싸움이고 늘상 있는 과정이라 위안해보았지만 아무 소용없이 무력감만 밀려올 때였다. 설명할 수 없고 아무에게도 내색하지 못했지만 그 고통이 나를 흙으로 안내했다.
 
‘흙은 정말 나의 운명인 것일까?’ 요즘은 자꾸 그런 생각이 든다. 엄마가 나를 낳기 전에 꾼 태몽이 골목길에서 호미 세 자루를 주운 것이라고 했고, 1974년 2월 생인데 사주에 土(흙)이 있다는 것도 자꾸 흙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고민 끝에 지난 해 홍성에 위치한 풀무환경농업전문학교 전공부 과정에 입학해 2년째, 그러니까 창업(풀무학교에서는 졸업을 창업이라 한다. 교육의 끝이 아니라 배운 것을 사회에서 써먹는 시작점이기 때문이다)을 앞두고 있는데, 논과 밭에서 기고 쪼그려 앉아 흙과 작물을 매만지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쏙 빠져드니, 내가 자꾸 ‘운명’을 생각하는 것은 나름 이유가 될 것 같기는 하다.


말이 길어졌지만, 요즘은 이런 나에게 ‘진심으로 흙을 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일 자격이 있는가’ 싶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녀석이 있다.
 
그 녀석 이름, 들 

▲ '희망'이란 말을 떠올리게 하는 십대, 박푸른들
‘박푸른들’
이름도 멋진 그 녀석은, 얼굴도 이쁘고 생각도 이쁘고 하는 모든 태도들이 이쁘다. 아니 부끄럽기도 하고 부럽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흙을, 땅을 아주 자연스럽게 지 몸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이명박 정부의 횡포에 대해 이 땅의 미래가 될 우리 10대 여학생들이 먼저 저항하기 시작한 것을 두고, ‘희망’이란 단어를 입에 오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나 또한 다음 세대를 이어갈 그 친구들의 모습에서 ‘절망에서 희망’이란 말을 떠올리게 된다. 근거 없는 희망보다 현실을 깊게 인식하는 절망이 이 시대에 더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확실히 자각하고 반성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희망의 싹이 트는 것 같다.
 
“작년엔가 가족들이랑 무를 캐서 생협에 출하하려고 잘 생긴 놈들을 골라 무게를 재고 포장을 하는데, 갑자기 못생겼지만 튼튼한 놈들이 ‘상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제되고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드니까 화가 나는 거예요. 그 밭에서 고개만 들면 ‘풀무생협’이 바로 보이는데, 도대체 이 무들이 심사를 받아야 하는 저곳은 어떤 곳일까? 생협이라 하면 상품의 가치보다는 농부들이 땀 흘려 정성스럽게 가꾼 모든 작물들이 그대로 가치를 인정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면서 직접 농사를 짓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당시 풀무고등학교 3학년생이었던 들은 그냥 많이 울었다고 한다. 과연 시장에서의 상품가치란 것이 무엇인지, 어리지만 전혀 어린 사람답지 않게, 물질이 중심이 되어 돌아가는 세상을 몸으로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들은 고등학교 학교선생님들 대부분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난 지금도 이 점을 이해할 수 없다. 풀무학교는 더불어 사는 평민을 길러냄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새 대안학교로 유명해지면서 지역의 학생들을 입학심사에서 떨어뜨리고, 농사짓고 살겠다는 학생에게 대학에 갈 것을 권유하고 있다.) 대학 대신 2년제 과정인 전공부를 선택했다.
 
“대학에 가지 않은 거 후회하지 않아요”

▲ 학력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기분 나쁘다고 말하는 '들'
“엄마, 아빠의 권유도 있었지만 아주 자연스런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아빠는 이곳이 고향이고 엄마는 외부에서 온 갓골 어린이집 교사였는데, 1980년대 말 청년들이 갓골 어린이집에 모여 농민운동에 대해 토론도 하고 그랬대요. 그러면서 서로 연애를 하셨고 결혼까지 하신 거죠. 전 여기서 태어났어요. 홍동(면)이 고향이고 초, 중, 고, 지금까지 여기서 살았죠.”

 
머리가 크면 부모로부터 벗어나 독립도 하고 싶고 다른 지역에도 가보고 싶고 호기심이 많아질 텐데, 들이는 전공부를 선택해 인문학을 배우고 농사실습 하는 것이 마냥 좋다고 한다.
 
“대학에 가지 않은 거 후회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학력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건 기분 나빠요. 지난 해 무 포장을 하면서, 그리고 얼마 안됐지만 전공부에 들어와 생활하면서 농사를 기준으로 사회를 보는 시각은 더 확고해진 것 같아요. 전 그 입장에서 세상을 볼 거예요. 그런데 전공부에 들어온 언니, 오빠, 아저씨들을 보면 사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다 온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이 다 농촌에 필요한 사람들이거든요. 농사만 짓는 것이 아니라 농업 관련 활동은 다양하고 농촌은 다양한 사람들을 필요로 하고 있어요. 자기 분야를 적용하면 돼요. 요즘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너무 무식하구나 싶어 자극을 좀 받고 있는데, 그래도 제 중심은 농사가 될 거예요.”
 
기숙사 방에서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다음 질문을 잊고 잠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앳된 소녀의 얼굴을 하고서 열정과 패기로 똘똘 뭉친 이 친구한테 부끄럽기도 했고 한편으론 너무 감사했기 때문이다.
 
농사는 낭만, 마을은 공동체
 
▲ 박푸른들은 농사실습이 마냥 좋다고 한다.
들에게 농사란 무엇일까? 농사가 무엇이길래, 농촌 마을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들이의 마음을 단단히 부여잡고 놓지 않는 것일까? 그의 대답은 좀 생뚱맞긴 했지만 참 그럴싸했다. 들이의 힘이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음…전 아직 농사를 몰라요. 그런데 예전에 동네 아주머니가 농사는 ‘낭만’이어야 한다고 얘기하신 걸 들은 적이 있어요. 그건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 해야 한다는 뜻인 거 같아요. 돈을 벌기 위해 작물재배를 상품으로만 생각하고 농약을 치고 제초제를 치면, 사람이 해를 당하고 생물들과 땅 모두가 죽는 거죠. 기계를 이용해 대규모로 농사짓는 것도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절대 못해요.”
 
모든 일이 그렇듯이 진심으로 소통되지 않으면 막다른 곳으로 통하고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듯이, 농사가 무엇인지 아직 모른다고 계면쩍게 말하지만 들은 몸으로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풀무학교가 지역과 학교를 강조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다 따로따로 제 각각이에요. 끼리끼리만 좋아라 하죠. 문화만을 향유하려는 사람들은 이 지역이 아름다운 공동체 정신이 살아있다고 하고 풀무학교 학생들이 예의 바르다고 말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아니에요. 마을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지만 은근히 원주민과는 상대하지 않으려 하고 어떤 프로그램으로만 해결하려고 해요. 지역사람들 모두가 이웃이라는 마을 공동체성을 갖기 위한 일상에서의 노력과 인식의 전환은 하지 않으려고 하죠.”
 
일년을 지내고 보니 어렴풋이 마을을 터부시하는 고등부의 어떤 묘한 분위기가 있는데, 들은 마을의 주인으로, 일원으로, 이미 고등부 사람들의 속내를 파악하고 있는 듯 했다.


푸른 들은 울지 않는다
 

▲ 들이 울지 않는 세상이 오길 (오른쪽이 박푸른들)
“고등부 후배들이 전공부를 자연스럽게 선택하면 좋겠고, 선생님들도 전공부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제공하고 구체적 교류도 가졌으면 좋겠어요. 요즘은 자꾸 좀더 치열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들과 그의 친구 소망이가 풀무학교 고등부를 졸업한 후 전공부에 오자, 후배들도 전공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자주 찾아오기도 하고 전공부에 대한 질문도 많이 한다고 한다. 그건 농사짓고 산다는 것, 소농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들이를 처음 만났을 때 어쩐 일인지 난 다시 평택 대추리, 도두리를 생각했다. 아마 당시 자주 썼던 ‘들이 운다’는 표현 때문이었을 게다. 들이와 방구석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다시 생각한다. 들이 울게 하는 일은 다시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들이 운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삶이 파괴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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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새눌 2008/09/01 [14:33] 수정 | 삭제
  • 전공부에 이런 이쁜 친구가 또 있구나....전공부에 돌아갈 날을 가끔 꿈꿀때가 있다....
  • 들친구 2008/07/02 [10:39] 수정 | 삭제
  • 들아 멋있어
    진짜 멋지게 살아가는 것 같아
  • 들이친구1人 2008/06/30 [15:53] 수정 | 삭제
  • 왕굳!
  • 하하하하하 2008/06/28 [14:35] 수정 | 삭제
  • (난 지금도 이 점을 이해할 수 없다. 풀무학교는 더불어 사는 평민을 길러냄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새 대안학교로 유명해지면서 지역의 학생들을 입학심사에서 떨어뜨리고, 농사짓고 살겠다는 학생에게 대학에 갈 것을 권유하고 있다.)
    이 점은 조금 아닌 듯 싶네요..;;하하 풀무학교 선생님들께서 대학입학을 권유하시는 것은 다 큰 뜻과 생각이 있으셔서 그러는 것이고, 대안학교로 유명해 져서 지역의 학생들을 떨어뜨리는 것 또한 큰 오해라고 봅니다. 풀무라는 공동체는 그 크기는 유지되며 계속 굴러가야 하는데 외부에 많이 알려져 오고싶어하는 희망자들이 늘어나고, 때문에 지역 희망자와 외부 희망자를 고루 평등하게 보려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선생님들께서도 매우 고민고민 하고 계시고 좀더 지역 학생들의 선택권을 늘려주려고 노력중이신 줄 알고 있습니다.
  • 가자!! 2008/06/05 [15:43] 수정 | 삭제
  • 들아 기사로 널 보니까 기분이 참 좋다.
    진심은 통한다고 하는데 너의 이런 대담하고 예쁜 마음이 모두에게 전해질걸
    생각하니 내가 다 신이 난다. 항상 흔들림 없이 너의 뜻을 이어나가는 모습을 보니
    정말 기분이 좋아진다. 이세상 모든 사람들이 너 처럼 자신의 꿈과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 이 기사로써로 모두들 반성했으면 좋겠다.
  • 유랑감자 2008/06/04 [11:11] 수정 | 삭제
  • 홍성에 일이 있어 자주 가곤했는데.
    지역민으로서 풀무전공부에서 배우고 농업을 하려는 그 의지가 아름답습니다.
    농업은 낭만이라! 힘들어도 그 낭만먹고 살지요-
    글 보니 참 반갑고 좋습니다.
  • 스머프 2008/06/04 [09:27] 수정 | 삭제
  • 풀무학교 옆에서 학교를 아끼고 아는 사람입니다. 요즘 풀무학교가 지역학교, 농업과 농촌에 희망을 주는 학교로 탈바꿈하려고 애쓰는 줄 압니다. 그러나 입시체제 속에서 운영난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개인이 결단한 푸른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글중의 풀무학교에 대한 지적이 그쪽으로 학교가 가는데 좋은 자극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 웃는바보 2008/06/03 [20:09] 수정 | 삭제
  • 희망을 가지게 하는 소중한 한 사람입니다^^
  • .. 2008/06/03 [14:27] 수정 | 삭제
  • 기분이 좋아지네요.
    나도 너른 들판에서 그렇게 뛰어보고 싶은 기분...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란 아이는 도심에서 살아도 자연이 마음의 고향이라고 하는데, 제가 그렇답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더라고요)

    농사일이 힘들겠지요. 농사도 배워야 제대로 짓는 거고, 알아야 할 지식도 많을 것이고, 낭만적이지 않을 때가 더 많을 거예요. 그래도 농사 일은 다른 일에 비해 아름다움이 있는 것 같아요.
  • 하하하 2008/05/31 [19:38] 수정 | 삭제
  • 이야.. 들이가 여기 이렇게 올라 오니깐 너무 신기하다 하하
    들과 같이 확고하게 저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가 어려울텐데
    정말 대단한 아이라는 것을 많이 느껴요 ^ㅡ^
    이 글을 본 독자들이 더욱 농업에 관심을 갖기를 바래요
  • 독자 2008/05/31 [14:13] 수정 | 삭제
  • 사람들의 얄팍한 마음을 넓은 품으로 품어주고, 욕심 없이 다 내어주고, 작물들을 키워주기까지 하는 흙이지요.

    농사를 짓다보면 고마운 것을 알게 되지요. 푸른들님도 그걸 알고 있는 것 같네요. 멋진 이름과도 잘 어울리는 분 반갑습니다.
  • 라라라 2008/05/31 [12:24] 수정 | 삭제
  • 저도 시골에서 태어난지라 깨끗한 공기,흙,물에 애정이 많아요. 서울 생활을 동경에서 비록 지금은 서울에 있지만 여기는 공기도 흙도 물도 퇴색되서 마음이 아픕니다. 고향처럼 맑은 하늘과 구름은 본게 언제인지 모르겠네요. 항상 스모그 뿐인 서울...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환경이 안좋아서 서울 하늘에 적응하기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언젠가 내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면 좋은 사람들과 함께 시골에 내려가서 농사도 짓고 일도 하면서 살고 싶었는데 이 기사를 보고나서 그 꿈이 더 확고해졌네요.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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