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말하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

공허한 담론 난무하는 페미니즘의 흐름을 우려하며

최현정 | 기사입력 2009/03/23 [10:44]

다시 말하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

공허한 담론 난무하는 페미니즘의 흐름을 우려하며

최현정 | 입력 : 2009/03/23 [10:44]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라는 말이 우리를 감동시켰던 때가 있습니다. 이 말이 말해진 순간, 여인네들은 황무지와 같았던 자기 삶에 의미와 언어를 선사하기 위한 눈물 어린 시행착오와 피땀 어린 실천의 과정들에 박차를 가합니다.
 
여성주의에서부터 삶을 고민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저를 포함하여 많은 경우 어느 한번쯤은, 너무나 오래되고 유명하여 이제 식상하기까지 하지만 이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문구를 가슴에 품고 각자만의 꿈을 꾸었던 적이 있었을 겁니다.
 
부당하게도 인간다운 삶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향한 동질감과 연대감이 자신의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가가 기억나십니까.
 
어쩌면 나 역시 소외된 인간으로서 의지 있게 삶을 개척해 가는 것이 곧 나의 여성주의였을 수 있고, 상처 입은 인간을 향한 탄탄한 공감능력을 기반으로 나의 여성주의가 세워졌을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누군가에게 여성주의는, 불안정한 정체성을 확고하게 붙들어 매주었던 깊고 단단한 뿌리이자, 미약한 자기를 한없이 허용하고 보듬는 안식처였을 수 있겠지요. 여러분의 여성주의는 어디서부터였습니까.
 
‘상처 입은 치유자’가 유의해야 할 점
 
▲ 정은의 일러스트 <말하는 연습>     © 일다
만약 내가 관습을 명분으로 하는 비인간적인 폭력과 대면하였다면, 여성주의에 의지하고자 했던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여성주의는 상처 입은 인간의 경험을 그대로 인정해주는 역할을 맡을 수 있으며, 또 맡아야 한다고 제가 믿기 때문일까요. 인간성을 존중하는 편에 서는 것이 여성주의가 존재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니까요.

 
여성주의에서 힘을 받은 당신이 이제 다른 이를 위하여 여성주의를 말하게 되었습니다.
 
심리치료에서도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말이 있지요. 치료자 자신이 상처를 가지고 있을 때에 더 뛰어난 공감능력과 이해력을 가질 수 있고, 또 상대를 더 적극적으로 돕고자 하는 열의를 키울 수 있으므로, 상처 입은 치유자는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심리학에서는 상처 입은 치유자가 유의해야 할 점을 강조합니다. 자기 상처에 골몰한 사람은 자기를 넘어서 타인의 심리를 고려하지 못하고 터널 비전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기를 넘어서 누군가를 바라볼 수 있으려면 많은 연습이 필요하기 때문에, 상처 입은 치유자는 물론 다른 많은 치유자들도 거듭되는 훈련을 거칩니다.
 
때로는 상처 입은 사람들이 여성주의를 생활화하는데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상처 입은 치유자에게 필요하듯이, 상처 입은 여성주의자에게도 힘이 되는 동료와 함께 자기 상처를 뛰어넘으려는 끝없는 노력이 필요할 뿐입니다. 사실 이것은 자기 내면의 신념이든 어떤 거창한 ‘-주의’든 간에,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자질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치를 공유하는 진실된 동료가 첫 번째로 필요하다면, 부단히 자기를 고치고 닦아 나가는 끈기도 둘째로 꼽으면 서럽지요. 물론 이는 비단 상처 입은 여성주의자에게만 국한된 과제는 아닙니다.
 
만약 상처가 거의 아물었다면은 새로이 닦아나가야 할 시점임을 알려주는 신호를 잘 감지하는 힘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던 과거의 젊은 여성주의자 ‘나’를 돌아봅시다. 그가 그 동안 겪었던 수많은 시행착오들, 넘어지고도 또 일어서고 또 갈피를 못 잡고 혼란스러워했던 많은 시간들을 향해 더 오래 산 여성주의자로서 열렬히 박수를 쳐줍시다.
 
그 다음에는, 지금 나의 삶에서 ‘사적인 것’을 위해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적 방어’로 무장한 채 고립되어 가는 페미니즘
 
우리는 사적인 것, 즉 인간의 삶의 위한 ‘-주의’를 실천하고자 꿈꾸었습니다만, 생생한 인간 경험은 죽어버린 채 화석화된 학문, 담론, 말, 가십만이 난무하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저는 ‘사적인 것’에 발을 디디고 있는 여성주의로 되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분명 아무에게도 설득시킬 수 없었던 여성의 사적인 고통을 ‘고통’이라 명명하고 설득하기 위해서 여성경험을 위한 개념과 담론을 부단히 만들어내야 했던 시간들을 거쳐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분명 그 와중에 수 많은 여성주의자들의 노고에 힘입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소위 여성주의는 그 노고를 거스르고 거꾸로 가고 있지는 않은가 싶습니다. 사적 경험을 개념화하고 명명하려는 시도가 지나쳐 도리어 사적 경험은 증발해 버린 껍데기를 주절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심리학에서는 정서적 고통을 감당할 수 없어 지나치게 지적으로만 설명하려 하거나, 이성적인 이유만을 대면서 감정에 대해 알려 하지 않고 감정을 고립시키는 일련의 방어기제들을 일컬어 ‘지적 방어’라고 합니다. 저는 지금 한국사회의 여성주의 일부가 이 ‘지적 방어’로 스스로를 무장하면서 고립되어 가고 있음이 걱정스럽습니다. 물론 우리는 사적인 경험을 담론으로 탄생시키는 과제를 완수해야 했으므로, 지적 방어로 흘러갈 여지를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했을지 모릅니다.
 
학문이 지적일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여성학은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주의의 가치를 찾고자 하는 많은 노력들은 지적 방어의 극단에서 파괴될 것입니다. 지적 방어로 무장하면서, 우리는 여성주의가 애초에 다가서고자 했던 인간의 고통과 단절되고 있습니다.
 
여성주의자라고 하면서 인간경험이 제거된 공허한 말을 쏟아내고, 오히려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고 귀를 막으려는 소극적인 폭력을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특히 그 누구보다 권력의 파괴력에 예의주시하고 있어야 할 여성주의자라면 자기가 가진 권력의 영향력부터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거꾸로 가는 여성주의는 여성주의자 개개인에게도 정서적 스트레스를 가중시킬 것입니다. 분명 여성주의 안에 있다고 하는데 자기 경험 속에서 어떤 괴리가 느껴진다면, 점검해 보라는 신호일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를 어려운 소위 여성주의 개념에 탐닉하면서도, 혹시 나는 내 주변 사람의 고통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고통조차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여성주의자인데 여성주의 안에서 행복할 수 없다면, 그 여성주의를 점검해 보기를 권합니다.
 
곁에 좋은 동료가 있기를 바라며, 자기를 닦아 나가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기사 좋아요
  • 도배방지 이미지

  • 자적자 2017/06/07 [18:47] 수정 | 삭제
  • 여적여는 뭐다? 자트릭스에서 생겨난 것. 여적여가 아니라 자적자가 맞는 말입니다. 자적자 서열놀이ww
  • 여성의 적은 2012/09/13 [17:32] 수정 | 삭제
  • 여성의 적은 여성!글쓴이 처럼 타당한 비판을 하는 여성들은 정말 여성주의자들에게 진지하고 도움 되는 반성을 하게 합니다. 하지만 여성학, 여성주의가 뭔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데다가 이제것 역사의 주체자 역할 했던 남성들 위주로 형성된 관습 문화 사회등이 여성에게 여성이기를 교육시켰던 그 요구들을 착실히 내면화 시켜 살면서도, 그것이 곧 여성으로서 자기 자신의 전부 인줄로만 알고 사는 여성들이야말로 정말 여성주의 여성들에게 절망감을 주는 존재들인 것 같습니다. 여전히 남성주심의 사회 경제구조에 의지해서 남성 없인 살 수도 없는 존재들... 그들하고는 권력욕망이 구조해낸 사회, 자본주의 모습이나 유독 약자나 여성들에게 엄하고 독하기 까지한 숫한 관습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수정해 가자는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합니다. 그저 그날 한 드라마의 못된 년이나 놈에 대한 욕들이나 하면 재미있어하고 끼어 드는.... 그런 여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지배와 권력욕에 벌개진 사회라는 것을 보고 깨닫고 그것을 자식 양육을 통해 사람이면 살기 좋을 사회로 서서히 고쳐갈 수 있는 힘과 권력이 여성들에게 있음도 그들은 인식 못하고 오늘도 하나나 둘 뿐인 자식들 학원 하나 더 보낼라고 노심초사하고 불안해 하는 여성들로 넘쳐남니다.... 진짜로 지적인 여성주의자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알 것 같습니다. 실제로 여성에게 권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무슨 권력을 가졌는지 모르고 그래서 그것을 제대로 활용할 줄 모르는 것에 여성주의 또는 여성들의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여성들은 지금도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힘과 권력이 있습니다. 깨닫고 연대해서 실행 (권력행사)을 해 나가면 됩니다. 그 세단계가 너무 어려울 뿐인거죠.
  • 꾸벅 2009/04/14 [13:08] 수정 | 삭제
  • 그러게요. 페미니즘을 통해 고통을 열정으로 승화시켰다고 믿었지만, 페미니즘이 삶의 고통을 줄여주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현실이 많이 바뀌지 않았으니까. 이유는 거기에 있는 게 아닐까요. 나와 그녀들이 겪는 끝나지 않을 고통을 우리가 멈추게 할 수 없다는 것. 공감은 이제 지겨워요. 그건 현실을 덜 아픈 것으로 수용하게 만드는 제스처. 그 고통을 멈추게 할 지혜와 힘이 필요해요. 함께 힘을 모을 사람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 자기 상처를 상대화할 수 있는 강인함도 필요해요. 그리고 우리를 함께 꿈꾸게 할 수 있는 언어도 필요해요.
  • 글쎄 2009/04/12 [19:45] 수정 | 삭제
  • 문학이나 다른 것들처럼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는 거 아닌가요
  • won 2009/04/09 [04:36] 수정 | 삭제
  • 지적 방어라기보다 어찌보면 중산층 여성 중심의 여성주의가 갖는 한계 아닐까요? 이제 여성주의도 메인스트림으로 들어섰고, 페미니즘해서 교수되고 밥벌어 먹고 살 수 있다는 건 (고로 중산층을 지속 유지시킬 수 있는 도구로서의 페미니즘) 자명한 사실이잖아요. 머, 인문사회학으로 밥먹기 힘들다고 푸념할 수 있겠지만, 사실 페미니즘을 이야기 안 하는 분과는 이제 없으니까요. 유학파들도 보면, 있는집 자식들이 유학가는 경우가 더 많고,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던 유학파들도 북미에서 페미니즘을 피해갈 수 없으니까, 항상 수업시간에 주요 이론으로 사용되니까 도구적 이성에서 써 먹는 거잖아요. 제가 너무 부정적인지 몰라도, 사실 학생운동이며 사회운동에 관심 없던 사람들이 교수되고 싶어서 유학가고, 유학가서 페미니즘의 학문적 도구성을 간파해서 금방 페미니즘을 논문에 쓰고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잖아요. 페미니즘을 논문에 쓰기위해 이주노동 여성자들 따라다니며 인터뷰 하고, 논문 쓰면 이주노동자들에게 다신 가보지도 않죠. 그리고 오로지 교수 되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목숨거는 시스템에 맹진하는 거죠.
  • 매실동이 2009/04/01 [08:42] 수정 | 삭제
  • 하지만, 여성주의를 실천하는 과정이 항상 행복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궁극적으로 행복할 수 있을 런지는 몰라도.

    타협해서 사는 것보다 오히려 힘든 길이겠죠. 용기도 필요하고, "타박"도 이겨낼 강건함도 필요하니까, 세상를 바꾸려는 노력이 항상 쉬울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사회의 "반항"을 이겨내야 할테니까요.

    그러니까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해두고 싶네요. 힘들더라도,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 꼬깜 2009/03/27 [16:59] 수정 | 삭제
  • 고이고이 잘 곱씹고 읽었습니다.
  • 화사 2009/03/25 [10:30] 수정 | 삭제
  • 저는 요즘들어 페미니즘에 대한 학습이 제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입장은 현정님과 같습니다..

    현정님 글 잘 읽고 있어요, 감사해요~*^^*

    (그리고 대동아공영권님은 정말 열정이 많고 부지런하신 것 같아요^^)
  • 시로 2009/03/25 [03:03] 수정 | 삭제
  • 현정님 글 좋아합니다. 쉽게 조목조목 짚어주는 느낌이 들어서요.
  • 대동아공영권 2009/03/24 [12:16] 수정 | 삭제
  • 아이디가 대동아공영권이면 문제가 있습니까? 그리고 나의 글에 대응한답시고 하는 이야기치고는 너무 유치하군요. 무슨 살인의식과 전쟁을 좋아하는 것으로 그것이 연결됩니까?

    아무리 미개한 인간이라도 이것은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수준을 좀 올려주세요. 그리고 인간이 되어주세요. 덧붙여서..자국의 역사서는 언제나 진실이라는 믿음을 버려주세요. 역사는 관점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니까..

    그리고 정말 부끄러운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쪽은 그 쪽이 아닌지? ^ ^
  • 실리 2009/03/24 [10:48] 수정 | 삭제
  • 저를 비롯한 마초꼴통들은 살인의식이 너무 심하죠.
    그래서, 전쟁을 좋아하시죠들.
    마꼴들, 정말 쪽팔린 줄 알아야 합니다. 아이디가 그런 의식을 반영하는 듯.
  • 호적돌 2009/03/24 [01:05] 수정 | 삭제
  • 최현정님 글을 좋아하는 한 독자로서, 그리고 '운동'을 고민하는 한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좋은 글 감사하다고 이야기하고 싶네요.
  • 대동아공영권 2009/03/23 [20:12] 수정 | 삭제
  • 고통을 '고통'이라고 명명하게 되고 하시는데, 사실 그래요. 뭐랄까 고통에 민감한 것도 필요하지만, 너무 지나치지요. 더 깨는 사실은 또 꼭 그런 부류끼리 뭉쳐서, 서로 핧아준다고나 할까요? 스스로가 지나치다는 것을 깨우치기는 커녕 오히려 옳다고 확 믿어버립니다. 글 쓰신 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러다가 '고립'됩니다. 이것은 때때로 확실히 병입니다. 아니 가령 말이죠. 1km떨어진 곳에서 수다떠는 소리가 나의 귀에 들리고, 그래서 이 소음을 줄여야 한다고 소리치면 어떻게 되나요? 이것은 1km떨어진 곳에서 나는 소리가 문제가 아니라, 실은 자신의 귀가 너무 민감한 것이 문제니..오히려 귀를 다소 멀게 해야 하는데..오히려 세상을 향해서..시끄럽다고 소리치고..자신의 귀는 다만 민감한 뿐이라고 말합니다. 타인들이 둔감한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말을 합니다.

    이런 병적인 페미들까지 우리 사회가 언제까지 인내해야 하나요? 제가 볼 때 환자라면 병원을 추천하구요. 그렇게 심하지 않다면..이제 밝은 사회로 이끌어야 할 때라고 봅니다. 페미니즘이 오히려 병을 키우는 것이 된다면 이 얼마나 웃지못할 일일까요?

    앞으로 글을 쓰신 분도..이런 병적인 페미를 교화하는데 힘을 써주세요.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