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치료사인 김선영(39)씨는 한국에선 아직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음악치료’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예를 들어 ‘연주’라고 하면 사람들은 ‘나는 연주할 줄 몰라’ 라고 하잖아요. 음악교육이 연주를 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이라면, 음악치료는 치료사가 적절하게 중재 들어가서 그 사람이 마치 연주했다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해요. 음악이 가지고 있는 모든 요소를 활용해 활동을 촉진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거죠.” 예를 들어, 악기가 세팅돼 있는 연주실에 아이가 들어온다. 연주할 줄 모르지만, 아이는 마음에 드는 악기를 하나 선택한다. 그 악기는 드럼. 잠시 후 아이는 드럼을 두드리며 소리를 내본다. 박자가 엉터리지만 드럼에서 소리가 나자 마냥 신기하다. 이때 음악치료사는 그 소리에 맞추어 피아노 등으로 연주를 받쳐주며, 아이가 내는 드럼소리에 멜로디를 입힌다. 치료사의 호응에 아이는 신이 나 자유롭게 드럼을 두드리면서, 자연스럽게 박자를 맞춘다. 드럼을 마음껏 두드린 아이는 땀을 뻘뻘 흘리며 마치 자신이 치료사와 함께 연주했다는 느낌을 가진다. “저희는 모든 사람들 안에는 뮤직차일드, 음악적인 아이가 숨어있다고 말해요. 악기는 타악기를 많이 쓰는데, 쉽게 소리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죠. 치료사는 소리에 맞춰 멜로디를 입혀서 곡을 만들어 주죠.” 사람들 안에 숨어있는 뮤직차일드를 깨우다 선영씨가 전하는 음악치료 이야기에 흠뻑 빠져 들어, 나도 모르게 신이 났다. 어떤 악기든 선택해, 연주를 할 줄 모르더라도 소리를 내며 신나게 놀면 된다니…. 음악치료에서 음악은 서로를 이어주는 하나의 매체이며, 치료사의 적절한 중재를 통해 자신도 몰랐던 부분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치료의 효과가 나온다고 한다. “음악이 매개가 되어 다양한 활동을 촉진하는” 음악치료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는 몇 년 전 캐나다에서 치료사로 일했을 때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언어적 의사소통이 전혀 불가능한 30대 자폐인의 사례다.
“그렇게 촉진이 되어서 그 사람은 다음부터 시를 쓰게 됐어요. 저랑 하는 동안 총 4곡을 노래를 완성했고, 음악치료가 종결된 뒤에 30편의 시를 더 써서 시집을 냈어요.” “어느 순간 확 스파크가 일어나면서…” 김선영씨와 함께 있으면 사람들이 이렇게 변한다. “치료실에 아이들과 있을 때가 제일 즐겁다”는 그는 “특히 자폐아동, 예전부터 왠지 끌렸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포커스를 두고 있는 아이들도 그 아이들이다.” 선영씨는 현재 여러 아동.청소년 관련기관에서 치료사로 일하는데, 그 중 한 기관이 자폐전문 치료교육연구원이다. 자폐아동들은 쉽게 변화가 오지 않는데도 그와 함께 있는 아이들은 조금씩 달라진다. “그래서 원장님도 너는 얘네들하고 코드가 맞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와 어떤 면에서 ‘코드’가 맞는 걸까? “어느 순간 확 스파크가 일어나면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 그 자신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는 듯했다. 선영씨는 가장 최근에 있었던 경험을 하나 들었다. 예닐곱 살 때까지 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했던 아이가, 선영씨와 있는 1년 사이에 말을 트기 시작해 이제는 부모님과 어느 정도 대화가 통할 정도라고 한다. “(아이) 부모님이 말을 트기 전에 아이가 ‘어어어’하고 돌아다니면 정말 미칠 것 같았대요.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아이가 그런 소리를 내고 다니는 게 싫어서 손 붙잡고 다닐 수가 없었다고 해요. 저는 가끔 치료하는 세션을 공개하거든요. 세션에 참관하셨던 어머니가 그동안 자기한테 너무도 듣기 싫었던, 가족들에게는 소음에 불과했던 ‘어어어’하는 소리를 가지고, 제가 아이의 소리에 맞춰서 노래를 만들었고, 아이는 마치 자연스럽게 노래를 하는 것처럼 보였던 거죠. 어머니가 처음으로 ‘이 소리가 나쁘지 않게 들릴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대요. 장애아를 키우면서 포기를 하고 있었는데, 저를 통해 아이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고 말해주시는 걸 보면 제가 더 감사하죠. 아이와 저 사이에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구나, 정말 감사하죠.” 너무 좋아하니까…음악은 나의 소명
선영씨는 어렸을 적부터 피아노를 쳤고, 워낙 재능이 있었기에 주변에서나 부모님은 “음대를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들어갈 때도 피아노 선생님은 그에게 “예술고등학교를 갈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선택을 했다. 그때 부모님도 예고로 진학하길 바라며 “왜 여자로서 살아가는데 좋지 않겠냐?”고 권유했지만, 그는 “예고는 안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진학한 일반고등학교에서 한 “사회선생님”을 만났다. “여자선생님이셨는데, 사회선생님이 너무 좋았다.” 선생님에게 영향을 받아 대학 진학에서는 음대가 아니라 “사회학과”를 선택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도 그에게서 음악과 멀어진 시간은 없었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에도, 지금까지도 음악에 손을 놓지 않았다. “부모님이 ‘음대 나오면 못해도 피아노학원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라고 하셨지만, 저는 음악을 업으로 삼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음악을 너무 좋아하니까.” 너무도 좋아하는 음악으로, 주변에서 말하는 “못해도 피아노학원이라도”하는 업으로 삼기 싫어서, 음악과 악기를 평생 놓고 싶지 않아서, 음대로 진학하지 않았다는 김선영씨. 그에게 음악은 소명이었다. 그러나 20대, 아직 갈 길이 정해져 있지 않았던 그때.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했다. 그리고 “직장생활이 3년째 되었던 때”, 그때는 군에 갔던 남동생이 제대하던 때이기도 하다. 이때가 아니면, 부모님 그늘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고 판단한 그는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그리고 부모님 집을 떠나 독립했다. 곧바로 음악교육기관의 작편곡과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우연히 ‘음악치료’라는 게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갔다가 “충격을 받았다”. 음악치료 안에는 그가 평생 마음에 두고 있던 두 단어, ‘음악’과 ‘아이들’을 접목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던 게 여기에 다 있구나.”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그 길을 선택했다. 그때가 20대 후반. 그렇게 원하던 길로 접어들었는데, 사람의 일이란 게 그리 순탄하게만 풀리진 않는 모양이다. 그 무렵 “집이 부도가 나고” 힘든 일들을 겪고서, “딱 서른이 됐을 때” 음악치료를 전공으로 대학원에 진학했다. 체력이 닿는 그 날까지 걷고 싶은 이 길
본격적으로 시작한 음악치료 공부는 이번엔 결혼을 하게 되면서 또 잠시 중단됐다. 캐나다에서 공부하던 남편 때문에 이주를 했다. 캐나다에서는 몇몇 음악치료센터에서 일하며 경험을 쌓아가면서, 다시 대학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심리학과’에 입학했다. “음악치료적 실제기술뿐 아니라 더 심층적이고, 심리이론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서다. 그러나 곧 임신과 육아 때문에 또 한번 학업이 중단되고 말았다. 김선영씨의 나이 올해 서른아홉. 길을 걷다 멈추고, 걷다 멈추고를 반복했지만 꾸준히 걸어왔다. 캐나다에서 돌아온 이후 ‘아동심리치료학’ 학위도 마치고, 그 후부터 병원의 소아병동에서 음악치료를 하며 “음악과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 일하고 있다. 아이를 키우며 학업을 마치기도 바빴으련만, 그는 음악치료와 관련한 다양한 교육들을 수료했다. 그만큼 바쁘게 살며 배웠다는 증거다. “성격이 ‘일단은 시작해보자’주의에요. 시작해서 아니면 접으면 되고, 되면 나한테 도움이 될 것이다. 모자람이 있으니까 계속하게 되는 거죠.” 그가 향후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예방적인 차원에서” 통합적으로 음악치료에 접근하는 것이다. “미국이나 캐나다의 경우는, 음악치료사가 치료적 영역에서도 일하기도 하지만, 학교로 파견되어 예방차원에서도 접근”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학교에서 아이들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면, 부적응 아동들이 치료사의 눈에 띄게 되고, 이후 그 아이들을 데리고 개별 세션을 진행한다고 한다. 학교생활에서는 문제가 없지만, 심리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들이 발견되면 빨리 중재가 들어가는, ‘초기 중재’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렸을 적부터 아이들을 좋아했던 김선영씨는 지금도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일이 “체력적으로는 너무 힘들지만, 즐겁다”고 말한다. ‘음악과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 평생 체력이 닿는 그 날까지 일하고 싶다는 그의 말이 듣기에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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