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이거 진짜 금이에요?”
“금은 무슨? 노란 색칠한 플라스틱이야!” 아이들과 공부하면서 책상 옆에 놓고 수시로 쓰는 황금빛 자동차모양의 연필깎이를 보고 한 학생이 물었다. 나는 손톱으로 톡톡 두드려 보이며, 그저 평범한 연필깎이임을 보여주었다. “와! 근데 꼭 금 같다.” 전혀 금같이 보이지 않은데, 아이들의 눈에는 황금빛만 칠하면 금처럼 보이나 보다. 금으로 만든 거냐는 질문이 처음은 아니다. 연필깎이를 이렇게 잘 쓸 줄은 몰랐다. 이건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이다. 삼십이 막 넘었을 때의 일이니, 십 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아버지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말까지 하게 되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한 햇살 맑은 오전, 따스하게 햇볕이 내려앉던 거실 창 앞에서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 나는 화제를 바꿨다. “아빠, 인생에는 이런 물건들이 있는 것 같아요. 꼭 갖고 싶었지만, 못 가져 보고 지나가는…. 그리고 나이가 더 많이 들어, 그것은 더 이상 필요하지도 않게 되죠. 그래서 인생 속에 한 번도 지녀보지 못한 것이 되고 마는 그런 물건….” 아버지는 눈을 반짝이며, 내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셨다. 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제 인생 속에서 그런 물건은 ‘연필깎이’였던 것 같아요. 아주 어렸을 때, 자동연필깎이가 정말 가지고 싶었어요. 그런데 너무 비쌀 거라고 생각해, 한번도 부모님께 갖고 싶다는 말을 하지 못했지요. 이제 더 이상 연필깎이가 필요하지도 않은 나이가 되었고…. 대부분의 물건들은 세월이 지나서 여유가 있으면 살 수도 있고, 또 그렇게 사면 여전히 의미 있게 쓰이기도 하는데, 어떤 물건은 세월이 지나면 더 이상 필요하지도 않아 저를 비껴가죠. 연필깎이가 꼭 그래요.” 아버지는 그날은 그저, “그래? 허허. 그렇구나!” 정도로, 내 얘기에 짧은 반응을 보이셨다. 그리고 나서는 또 다른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버지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없이 내게 작은 상자 하나를 내미셨다. 나는 “이게 뭐예요?” 하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연필깎이였다. 나도 아버지도, 아무 말 없이 그저 미소만 지으며 서로 눈만 바라볼 뿐이었다. 딸이 어렸을 때 자동연필깎이를 갖고 싶어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된 아버지는, 그것이 더 필요치 않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때 그 어린아이가 가지고 싶었다던 걸 사주고 싶으셨나 보다. 이 연필깎이로 연필을 깎을 때면 아주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다. 아버지가 그날 선물로 주신 건 단순히 연필깎이뿐이 아니었다. 그날 난 유년의 한 조각도 선물로 받았다. 그러나 연필깎이를 쓸 일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에게 말씀 드린 것처럼, 이제 별 소용이 없어진 물건이었다. 그저 아버지 마음을 느낄 수 있어 근처에 놓고, 간혹 잘 쓰지도 않는 연필을 한 번씩 깎아보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아이들과 철학공부를 하면서 연필깎이는 비로소 생기를 찾았고, 지금껏 매우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자동연필깎이로 연필을 깎으면서 사는 어렸을 때의 꿈이 정말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소용도 없고 그저 마음만 담긴 아버지의 선물에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어 준 존재는 바로 아이들이다. 나는 오늘도 썩썩 연필을 깎는다. 아이들도 썩썩 연필을 깎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연필로 새로운 세상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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