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얼마나 무서운 분이길래? 그게 내가 3년 전에 마주한 선생님에 대한 첫 느낌이었다. 춤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그 분야로 진출하려는 이들이 모인 전문인 반에선 말할 것도 없고, 취미 삼아 발레를 배우는 학생이나 직장인, 주부들이 다니는 일반인 수업에서도 선생님의 호된 야단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의 수업은 항상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발레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르던 내가 어느새 선생님의 수업에 빠져 2년 넘게 배우고 있음을 발견하게 됐다. 중학교 때 단체관람으로 보았던 발레 조선대학교 무용학과 4학년 때 입단한 광주시립발레단에서 9년을 활동하다 연습 중에 부상을 입고 은퇴를 결심한 김수미 선생님은, 서울 올라오기 전 해외공연과 미국연수를 제외하고는 태어난 곳 광주를 떠나본 적이 없다고 한다. ‘광주’라 하면 민주화 운동만 떠올렸는데, 무용하는 인구가 많고 발레가 매우 발달한 곳이라니 의외다.
그러나 서른이 되던 해, 호두까기 인형공연 연습을 하다가 발가락 안쪽에 있는 뼈에 금이 갔다. 공연 3일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공연도 못하게 됐을 뿐 아니라, 부상이 예상보다 오래 진행되었다. 결국 고민 끝에 발레단을 그만 두고 서울로 올라올 결심을 하게 됐다. “그땐 내 발이 그렇게 오랫동안 아플 줄 몰랐지. 십 년 가까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종일 연습해야 한다는 게 많이 고된 일이라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말이야.” 마침 서울의 한 발레단에서 오디션을 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왔다. 그러나 6개월을 꼬박 재활치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발바닥 인대가 다 굳어서 걷기 힘든 정도였다. 발목이 손목보다 가늘었던 시기였다. “마지막으로 딱 1년만 춤추면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겠다 하는 마음이었어. 그 발레단에서 몇 달 연습하며 몸을 풀려고 애썼지. 새벽 6시에 일어나 스포츠센터 가서 한 시간 반 운동하고, 가볍게 사우나하고, 발레단 가서 몸 풀고, 끝나고 또 스포츠센터에 들러 혼자 유무산소운동을 하고…. 빨리 회복하고 싶었으니까. 근력을 길러놔야 되니까. 그때가 제일 다이어트도 많이 했던 때였고.” 그런데 발이 낫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여줄 수가 없는 거야. 안 그래도 부상 때문에 작아진 마음으로 찾아간 거였는데, 몇 달 그런 생활을 하다 보니 자괴감이 많이 들었지.” 안 좋은 일들이 겹치면서, 한 순간에 모든 게 다 귀찮아졌다. 연습을 그만두고서, 바로 집 옆에 리틀엔젤스회관이 있었는데도 2년간 단 한 번도 공연을 보러 가지 않았을 정도로 춤과 멀어졌다. 무용수가 아닌, 무용선생님으로 다시 서다 그런 선생님을 다시 무용의 길에 들어서게 해 준 것은, 뜻밖에도 ‘쥬얼리 세공’이었다.
마음에 드는 일이 생기면 완전히 몰두하는 스타일의 수미선생님. 손도 빠르고, 성격도 급한 탓에 집에 와서도 손을 놓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배우며 남들보다 빠르게 진도를 나갔다고 한다. “몇 달 하다 보니까, 이러다 세월 다 가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애초에 쥬얼리에 관심 갖게 된 것도, 따져보면 무용하고 관련이 있었어. 만들더라도 (무용)작품 쪽으로 만들고 싶지, 남을 예쁘게 해주는 그런 건 별로 하고 싶지 않았어.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더 이상 할 수가 없더라. 결국 내가 더 쉽게 잘 할 수 있는 건 발레였던 거야. 그 쉬운 걸 다시 깨닫는 데까지 그렇게 오래 돌아갔어.” 선생님은 곧 <Art Ballet Center>라는 발레학원을 차렸다. 무대에 서는 것과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경영하는 건 전혀 다른 일이었다. 그러나 그 곳에서 선생님은 나름의 성공을 이루었다. 그렇게 2년 동안 수업을 하면서 발은 서서히 나아갔고, 우연한 기회로 선생님은 재즈댄스 스튜디오에서 강사로 일을 새로이 시작하게 됐다. 그게 선생님의 인생에서는 세 번째로 맞이한 큰 변화였다. 지금처럼 가르칠 수만 있다면…
재정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무용하는 사람들의 경제적인 문제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선생님은 가능하다면 가르치는 직업을 버리지 않으면서, 좀더 안정감 있게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꿈꾼다고 했다. 인터뷰를 하며 줄곧 생각해보았는데, 선생님이 무서운 사람이라는 ‘오해’를 받는 이유는 내 생각에 하나다. 누구의 시간도 허비하고 싶지 않은, 선생님의 몸매만큼이나 꼿꼿한 성격 때문이다. 춤추겠다고 찾아와서는 너무 힘들다는 얘길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나, 본인이 선택한 일임에도 일 끝나고 돌아서면 힘들다고 하는 사람들을, 수미선생님은 사실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했다. “나는 웬만해서는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아. 몸이야 힘들지, 물론.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제 기능하는 관절이 없어. 지금도 말을 많이 하니까 머리가 울린다고. 그렇지만 ‘힘들어, 힘들어’ 할 거면 애초에 하지 말아야지. 쉽게 해서 얻어지는 게 어디 있어? 내 성격이 이래 놔서, 배우는 사람들이 대충 추는 꼴은 못 보지. 내 생각엔 그래. 열심히 하지 않을 거면 왜 수업을 들으려 하냐는 거지. 배우는 사람들이 내가 가르쳐 주고자 하는 것만큼 열심히 따라오길 바라는 것뿐이야.” 인터뷰 말미에, 스스로의 ‘티칭’에 점수를 준다면 몇 점일까요 하는 질문을 던졌다. 그랬더니 선생님다운 명답을 내놓으셨다. “내가 가르친 사람들이 느는 게 보이면 그게 내 점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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