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다는 라오스의 문화, 생태, 정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여행기를 연재합니다. 필자 이영란님은 라오스를 고향처럼 생각할 정도로 특별한 인연이 있는 분으로, <싸바이디 라오스>의 저자입니다. –편집자 주
순진한 아줌마학생의 엉뚱한 상상
아짠 껠라컨은 아침부터 루앙파방 어린이문화센터로 나와 학생들에게 한글수업을 해달라는 나의 임기응변식 부탁을 들어주고, 나와 함께 공항까지 가서 착한 여행 일행을 배웅해주었다. 이글거리는 라오스의 하늘로 비행기가 이륙했고 우리는 서로 쳐다보며 찡긋하고 웃었다. 자, 이제 맘껏 노는 거다! 우리는 외국인 여행자들이 잘 가지 않는 남칸(칸 강)을 건너 루앙파방 사람들이 주로 가는 음식점으로 향했다. 그동안 먹고 싶었던 라오스 음식들을 욕심껏 시켰다. (이런 음식점이 여행자들이 가는 데보다 값도 싸고 양도 많고 오히려 더 맛있다.) 그리고 당연히 비야라오(라오스 맥주)를 시켰다. 우리는 무려 여섯 달 만에 만난 거였다. 그래 꿈에 그리던 비야라오가 나오기 전에 우리 회포가 먼저 풀려 나왔다. 이제 모두 귀국한 우리들(싸이냐부리에서 활동한 한국해외봉사단원들)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이 되었는데, 아짠 껠라컨이 갑자기 선언하듯 말했다. “씽캄, 짜이 담!(마음이 시커매)” 엉? 씽캄(황금 사자라는 뜻)은 바로 며칠 전에 한국으로 돌아간 남자단원이었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자세히 말해보라고 했다. 껠라컨의 이야기는 이랬다. 며칠 전 씽캄이 한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루앙파방에서 만나자고 했단다. 처음엔 점심을 먹자고 해서 그러마 했는데 씽캄이 루앙파방에 도착했다고 연락하면서 점심 말고 저녁에 보자고 했다는 거다. 아짠은 깜짝 놀라서 저녁은 안 된다고 말도 제대로 않고 또 아예 나가지도 않았단다. 이게 전부다.
전모는 이랬을 것이다. 남자단원은 나의 뒤를 이어 우리학교 선생님들에게 한국어수업을 계속해주었다. 처음 열일곱 명까지 되던 선생님들은 시간이 갈수록 줄어 그 남자단원이 맡았을 때는 네댓 명밖에 안됐다. 내가 그랬듯 단원도 이 소수의 착한 아줌마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인연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을 테고, 정이 들었을 것이다. 7월 중순 귀국할 때 당연히 루앙파방을 거쳐 나올 수밖에 없는데, 한국어 수업의 반장 격인 아짠 껠라컨은 벌써 6월부터 연수 때문에 루앙파방에 나와 있고, 당연히 귀국 전에 얼굴이라도 보고 밥이라도 먹어야지 했지 않았겠는가. 같이 귀국하는 동기들하고도 만나 이래저래 바쁘다 보니, 점심밥이 아니고 저녁밥을 먹자고 약속을 옮기려 했을 것이고. 그런데 아짠 껠라컨은 씽캄의 ‘음흉함’에 놀라 만나지 않았고, 씽캄은 무슨 일이 있나 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귀국했을 것이다. (나중에 한국에서 만나 물어보니 정말 그랬다.) 남녀상열지사의 열외, 너무도 조신한 아줌마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라오스에 파견된 첫 해 여름, 아짠하고 알고 지낸 지도 벌써 여섯 달이 지날 무렵이었다. 우기 비가 제법 내리는 저녁이었다. 같이 우리 학교 선생님인 것은 물론 아짠 껠라컨(부대표)과 같이 청년단 일을 보는 아짠 미노(총무)가 전화를 했다. 내게 아짠 껠라컨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집안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아는 조그만 동네에서 비가 안 왔으면 아마 직접 찾아갔을 것이다. 라오스 사람들은 아무리 열대의 것이라도 비가 오면 절대 나돌아 다니지 않는다. 번개라도 칠라치면 벼락을 맞을까 휴대전화기까지 끄고 철저히 근신한다. 암튼, 이건 뭔가? 아무리 아짠 껠라컨이 내외를 한다 해도 긴하게 같이 일하는 사람까지 전화번호를 모른다는 것은 정말 너무했다. 그런데 다른 라오스 아줌마들도 사실 입담이 그리 걸쭉하지 못했다. 특히 성과 연애문제에 대해서는 더욱 그랬다. 가족들의 생계, 자식들 양육과 교육, 자신의 일 말고도 직장의 살림살이까지 책임져야 하는 중압감을 도대체 어디에 풀고 있을까 염려스러울 정도로. 그나마 눈에 보이고 지나가는 말로라도 들을 수 있는 이런 문제들과 달리 이성에 대한 문제는 남편과의 이야기더라도 들어본 적이 없다. 아, 딱 두 번 있다. 이건 나 때문이었다. 예전 나는 내 코워커 아짠 미노를 좋아했다. 처음부터 좋아한다고 거리낌 없이 이야기했다. 1년 정도 지나 모두하고 많이 친해지고 나서야 아짠들이 이 ‘발랑 까진’ 외국인의 말을, 나를 이해했던 방식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좀 지나서 내가 아짠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게 되면서는 우리말 ‘좋아하다’, ‘사랑하다’처럼 그 의미가 좀 다른 라오스어 표현을 내가 잘 몰라 과도한 것을 선택한 실수일 것이라고 이해했단다. 그러나 시간이 더 흘러 아줌마 아짠들하고 정말 많이 친해지고 나서는 아줌마 아짠들은 이게 모두 사실이고, 가능하고, 심지어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가지게 된 것 같다. 내게 한국어를 배운 학생 중에 한 명, 아짠 분미는 지난 봄 이혼했다. 십여 년 넘게 동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외도를 일삼았던 남편과의 이혼을 결행했다. 혼인 신고가 불가능했을 뿐이지 (어찌되었든 라오스도 법률상 일부일처제이니) 아짠 분미의 남편은 몇 명의 여자와 동거는 물론 그 사이에 자식까지 두었단다. 나 아니어도 일찌감치 이혼했을 수도 있는 거였지만, 내가 굳이 내가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짠이 이혼을 결행하기 전 아직 유부녀였을 때 나처럼 누구를 좋아한다고 장난처럼이지만 자기욕구를 드러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짠은 직접 말하기도 했다. 씰리펀 덕분(?)이라고. “씰리펀의 남편은 너무 크잖아!”
주인아저씨 아줌마는 마치 잔치라도 하는 것처럼 저녁을 준비했고, 싸이냐부리에 있는 한국해외봉사단원들이 모였다. 아저씨가 아껴두었던 퐁쌀리(라오스 북쪽 중국과의 국경마을)산 독주까지 마시고 모두들 취해 손님들은 돌아가고 아줌마가 뒷설거지 하는 것을 거들고 있을 때였다. “씰리펀, 남편 어때?” 좋아? 너무 은근한 목소리여서 무엇이 좋은가를 묻는 건지 알 것 같았다. 나도 이런 질문엔 익숙하지 않아 아무렇지 않은 듯 좋죠, 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런데도 아줌마의 낮은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씰리펀은 작고, 남편은 너무 크잖아!” 그렇긴 했다. 라오스에선 내가 절대 작은 편이 아니지만 남편과 비교하면 작긴 작았다. 내가 힐을 신어도 남편 어깨에 닿을까 말까. 근데 그게 무슨 상관일까?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아줌마를 보니, 오히려 내 대답에 모르겠다는 표정을 넘어 걱정스런 낯빛이다. 순간 며칠 전에 첫째 딸, ‘님’(미소라는 뜻)에게 한국 남자단원들은 김칫국도 마시지 않고 있는 선남선녀 짝짓기 놀이를 하다가 아줌마가 한 말이 생각났다. 아줌마는 나이도 ‘님’과 걸맞고 친절한 씽캄이 좋다고 했다. 나는 보통 여자들이 키 큰 남자를 좋아하니 ‘님’도 싸이싸나를 더 좋아하지 않겠냐고 했다. 아줌마는 정색을 하며 아니란다. 라오스 여자들은 덩치가 큰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다. 뭐가 힘들단다. 의외였지만 그저 딸 둔 엄마와 철없는 아줌마의 수다였으니 그냥 스쳐간 이야기였다. 그런데 주인아줌마의 그 걱정스런 낯빛이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있다. 못하는 거 없이 주인아저씨를 휘어잡고 사는 아줌마가, 군대문화는 물론 어떤 교육적(?) 체벌도 있을 수 없는 라오스에서 지레 그런 염려를 한다는 것은 혹시 폭력, 무의식 중에라도 배우자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의 반영은 아닐까? 그저 놀자는, 어쩌다 한번 진하게 풀어놓은 음담패설에 나야말로 너무 진지한 것은 아닐까도 싶다. 하지만 실제로 아직까지 라오스 아줌마들은 로맨스는 물론 놀이, 삶의 판타지를 꿈꾸는 것에서도 열외가 되어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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