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익빈 부익부. 사회 양극화가 나날이 심각해지는 한국 사회의 현실 앞에, 생소한 ‘사회복지’ 개념이 선을 보였다. ‘기본 소득(Basic Income)’이다. 지난 달 27일~29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에서 상세히 소개됐다.
여기 참석한 국내외 사회운동가와 정치인, 연구자들은 전 세계가 당면한 문제인 구조적 빈곤과 장기실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기본 소득’을 제시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등 현행 복지정책의 문제점
후발 선진국에 해당하는 한국은 최근에야 서구식 복지모델을 부분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그러나 효율과 성장만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국민들 일반을 위한 복지제도를 기대하기 어렵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최소한의 복지정책마저도 지속성을 장담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의 복지, 고용 현황과 기본소득 도입의 필요성’을 발표한 최광은(사회당) 대표는 현행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와 공적연금제도 역시 까다로운 심사(부양의무자 유무, 부양능력 여부, 수급권자와 부양의무자의 소득과 재산, 노동능력, 취업상태, 자활욕구 등)로 인해, 실질적으로 빈곤계층임에도 혜택을 받지 못하는 대규모 ‘복지의 사각지대’를 양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2009년 정부발표에 따르면, 사회적인 손길이 필요한 빈곤계층임에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수급대상에서 제외된 ‘비수급 빈곤계층’이 200만 가구 410만 명으로 추정된다. 남한 전체인구의 10%에 달한다. 한편, 빈곤층을 대상으로 하는 현재의 사회보장제도는 수급자를 ‘빈곤계층’으로 ‘낙인’찍는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들 중에는 스스로 ‘수급대상자’라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껴 주위사람들에게 감추는 경우도 많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수급을 받는 빈곤층은 시민사회에서 점점 고립되어 간다. 사회적으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대상이 되는 ‘절대적 빈곤층’과 그렇지 않은 ‘상대적 부유층’이라는 위계와 불평등이 더욱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꿈같은 얘기? 이미 해외 곳곳에서 시행되고 있어 반면, 임금 노동을 전제로 하고 있는 기존 복지제도와는 다르게, ‘기본소득’은 충분한 소득을 얻을 수 없는 아동과 노인, 장애인, 여성노동자, 비정규직, 영세자영업자 등 모든 사회구성원을 동등한 조건으로 사회적안전망 속에 끌어들인다. 아무 조건 없이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일정 소득을 지급하는 ‘기본소득’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과연 실현이 가능한 제도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구에서는 1960년대 말부터 ‘기본소득’에 관한 논의가 일어 정책으로 반영되기도 했다. 브라질 노동자당의 수플리시 상원 의원은 기본 소득 제도를 가장 성공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곳이 있다며, 미국의 알래스카 주의 사례를 소개했다. 1976년 당시 주지사였던 제이 해먼드(Jay Hammond)는 주 헌법을 수정해, 천연자원 로열티 중 25%를 ‘알래스카 영구기금(Alaska Permanent Fund)'으로 조성했다. 1980년에는 기금을 로열티의 50%로 증가시켰다. 이 기금에서 나오는 수입은 모든 알래스카 주민 전체(약 70만 명)에게 기본소득으로 지급되고 있다. 처음 미화 300달러(1년 소득)에서 시작한 알래스카의 ’기본소득‘은 2008년에는 1인당 2천69달러가 됐다. 강남훈(한신대) 교수는 “미국 전체 소득 수준에 비교하면 알래스카의 ‘기본소득(2008년 기준 연간 약 230만 원)’은 매우 적은 액수이나 이 제도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하다” 고 강조했다. 2008년 미국 각 주의 지니계수(소득의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수)를 비교했을 때, 알래스카 주의 소득 불균형이 가장 낮게 나타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한편, 아프리카 나미비아의 오미타라 지역에서는 2008년 1월부터 2009년 12월까지 ‘기본 소득’ 실험이 시도됐다. 나미비아 ‘기본소득 연합’(Big Coalition)은 주민 930명에게 2년 동안 매달 100나미비아 달러(약 1만 5천원)을 지급했다. 그 결과 빈곤 수준과 어린이 영양상태가 극적으로 개선됐고, 경제활동이 증가하면서 범죄율도 감소됐다. 브라질 룰라 정부는 2010년부터 전체 국민과 5년 이상 거주한 외국인에게 매월 40브라질 달러(약 1만 9천원)을 ‘기본소득’으로 지급할 예정이다. 또, 독일 좌파당 기본소득 연방연구회 블라슈케 연구위원은 독일에서도 ‘기본소득’ 도입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고 발표했다. 2009년 독일 총선 당시 330명의 연방의원 중 30명이 ‘기본소득’을 주 공약을 내세워 당선되었으며, 현재 입법을 위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한국사회에서 ‘기본소득’ 도입할 수 있을까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의 참가자들은 ‘기본소득’ 제도가 “가장 간편하고 효율적인 사회복지제도”라고 의견을 모았다. 수혜 대상을 구분하거나 자격을 심사하는 행정적 절차를 둘 필요 없이, 시민 모두에게 일괄적으로 지급하기 때문이다. 제도 자체의 원리와 운영은 매우 간단하지만, 도입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기까지 험난한 여정이 예상된다. 무엇보다도 ‘기본소득’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예산 확보가 가장 큰 과제로 떠오른다. 그러나 학술대회 참석자들은 “불가능한 이론은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최광은(사회당) 대표, 곽노안(서울시립대) 교수, 강남훈(한신대) 교수는 “한국에서 기본소득을 시행하기 위해서 부동산 투기소득, 금융소득, 상속소득과 같은 불로소득에 대해 집중과세를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강남훈 교수는 또 “사회의 각 부분의 과세를 투명하게 하고, 과세율을 스웨덴 정도의 수준으로 맞춘다면, 기본소득을 위한 예산 확보(2009년 기준으로 연간 약 250조원)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예측했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실시했던 ‘종합부동산세’에 대해, 강력한 조세저항이 있었던 전례를 볼 때, 조세 개편이 ‘기본소득’ 제도를 실행하는 데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진보진영에서 주장해온 무상교육, 무상의료 정책과 ‘기본소득’ 정책을 어떻게 연동시킬 것인지, ‘기본소득’이 임금노동시장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 외국인에 대한 기준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과 같은 중요한 논의가 존재한다. 한국사회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주장이 첫 발을 내딛은 만큼, 향후 우리 사회가 어떠한 방향으로 이 논의를 진행시켜 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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