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올 것 같지 않은 길고 긴 겨울이었다. 3월, 4월이 되어도 쉬이 물러나주지 않던 추위가 언젠가 싶게 날이 풀렸다. 이런 봄날을 즐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들뜨고 설렌다. 햇살 맑은 오후, 하천변으로 오랜만에 산책을 나섰다. 지난 가을 이후 처음이다. 개나리들은 어느새 노랗게 사태를 이뤘고, 벚꽃도 곧 꽃망울을 터뜨릴 기세다.
그러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아니 한 번도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았던 그날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 건 하천 둑에서 봄나물을 캐는 아주머니들을 발견하고 나서였다. 환하게 부서지는 봄볕 아래는 나물을 캐고 계신 분들이 제법 많았다. 그들을 보자 나도 발밑으로 눈이 갔다. 이름 모를 싹들이 분주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왜 그 아주머니와 나물을 캐러 갔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분도 아니고, 집안에서는 아예 왕래조차 없었던, 마을 어귀에 살고 계신 한 아주머니와 그녀의 어린 딸과 아주 멀리까지 나물을 캐러 갔었다. 서로 약속한 것도 아니고, 내게 어떤 말을 하거나 눈치를 준 것도 아니었는데, 애초부터 내가 캔 걸 가져올 생각은 하지도 않고 길을 나섰다. 나물 욕심 많은 내가 왜 그런 조건으로, 게다가 한 동네 산다는 것 외에 대면조차 하지 않던 여인을 따라 나선 건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무튼 그것이 그녀와의 첫 만남이었고, 그리고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 아주머니는 내가 모르는 나물을 꽤 많이 알고 계신 듯 했다. 산기슭의 부드러운 흙들을 헤집으면 달래같이, 먹어보기는 했지만 한번도 캐보지 못한 나물들이 후루루 후루루 그녀의 손에 딸려 나왔다. 나는 아주 감동스럽게 그녀의 나물 캐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도 저렇게 나물을 잘 캘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부러움의 시선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튼 말수 없는 그녀를 따라 산자락이며, 밭둑을 하염없이 돌아 집에서 참 멀리 떨어진 곳까지 왔다는 걸 안 것은 알 수 없는 향기 때문이었다. 낯선 곳에선 늘 묘한 향기가 난다. 우리는 말없이 아주 오랫동안 나물을 캤다. 그녀는 많이 피곤해 보였는데, 그땐 그저 슬픈 표정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디 갔다 이렇게 늦게 왔느냐는 어머니의 물음에도 그 아주머니와 나물을 캐러 갔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꼭 며칠 뒤, 동네 아주머니들의 쑥덕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날 함께 나물을 캤던 그 아주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암을 앓고 계셨다고 했다. 어쩜 자식들을 먹이기 위해, 당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봄나물을 캐는 것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주 잠깐, 슬퍼보였던 그녀의 표정이 떠올랐지만, 곧 잊어버렸다. 그녀의 표정도, 그 봄의 기억도, 그녀의 존재도. 부드러운 속살을 열어 가난한 여인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던 오래 전, 그 봄날처럼 햇볕이 따뜻하다. 이 햇볕 아래 좀 앉아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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