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보다는 사람을, 사진 찍기보다는 이야기하기를, 많이 돌아다니기보다는 한 곳에 오래 머물기를 선택한 어느 엄마와 세 딸의 아시아 여행기입니다. 11개월 간 이어진 여행, 그 길목 길목에서 만났던 평범하고도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네팔 ② 포카라
호수에는 빈 나룻배들이 나란히 묶여있다. 네팔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 페와 호수(Phewa Lake)이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작은 배를 타고 호수 한가운데 있는 힌두 사원에 들고 난다. 호수 옆으로는 넓지도 좁지도 않은 길이 나있고,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며 식당들이 그 길에 꼬리를 물고 들어앉았다. 트레킹 장비를 팔거나 빌려주는 가게들도 여럿이다. 번다하지만 미루적대며 걸어도 괜찮을 정도이다. 히말라야가 마주 뵈는 이층집에 방 하나를 빌렸다. 방문 앞에 의자를 내어 두고 한가할 때마다 나와 앉아 손톱도 깎고, 책도 보고, 아이들 머리도 빗겨준다. 그러다 한 번씩 고개 들어 히말라야를 쳐다보고, 조금 있다 또 보고 하였다. 나이 들며 기고만장함이 꺾이고 나니 산이 자꾸 좋아진다. 숙소 가까이에 작은 네팔 식당이 있다. 테이블 네 개가 겨우 들어가는 비좁은 곳이다.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우유홍차 짜이(chai)를 마시러 식당을 들락거렸다. 주인 부부는 우리 아이들을 제티(jethi, 맏이) 마일리(maili, 둘째), 간찌(kanchi, 막내)라 부르며 살가워했다. 부부에게는 다 큰 아들 셋에 늦둥이 딸아이가 하나 있는데, 말괄량이 딸내미 사비따(Sabita)는 눈만 뜨면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종횡무진 하였다. 소외된 네팔 여성들의 자립을 이끄는 <세 자매 트레킹 여행사>
일곱 명의 여자들로 ‘히말라야 언니 원정대’가 꾸려졌다. 가이드 우샤(Usha)와 포터 다누(Danu), 락슈미(Lakshmi) 그리고 세 딸아이들과 내가 닷새 동안 같이 산을 오르기로 한 것이다. (‘세 자매 트레킹 여행사’ 사람들은 포터porter 대신 어시스턴트assistant 라는 말을 쓴다. 여기서는 일정 기간 포터로 일하며 가이드 훈련을 하고, 그 과정을 마치면 누구나 전문 가이드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가이드와 포터의 세계가 유별한 일반 여행사들과는 좀 다른 점이다.) 어느 길로 얼마나 높이 산에 오를지 이런저런 의논을 하고 돌아오다가 트레킹용품 가게에 들러 아이들과 내 등산화를 빌렸다. 하루 천 원이면 발에 맞는 신발을 빌려 신을 수 있다. 별것 다 빌려주는 포카라에서는 맨 몸으로 와도 당장 트레킹을 떠날 수 있다. 곧 트레킹 떠난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이 두 가지를 꼭 묻는다. ‘어느 길로 가니?’ 그리고 ‘가이드와 포터를 얼마에 구했니?’ 하는 것이다. 오며가며 만나는 한국 사람들은 특히나 트레킹 비용에 민감하다. 내가 예상하는 경비에 대해 들려주자 다들 너무 비싸다고 난리다. 어떻게 여자 가이드와 여자 포터가 남자보다 더 비싸냐며, 그건 말도 안 된다고 했다. 비싼 건 사실이었다. 짐을 20킬로그램 이상 질 수 있는 노련한 남자 포터의 하루 임금이 8불인데, 이번 트레킹이 첫 산행인 우리 팀 락슈미는 12킬로그램 이상 짐을 짊어지지 않으며 그 노동의 대가로 하루 10불을 받기로 했다. 여자 가이드의 경우에도 남자들에 비해 보통 하루 3불 정도를 더 받는다. 그러니 지갑을 여는 사람 입장에서는 누가 뭐래도 손해가 분명한 일이다. 한 푼이 아쉬운 장기 여행자에게는 더 그렇다. 하지만 히말라야 언니 원정대는 오랜 생각 끝에 우리가 기꺼이 택한 것이다. 나 역시 돈을 아끼려고 갖가지 고생길을 자처하지만 그 안에도 나름 기준이란 것이 있기는 하다.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건 가치에 관한 것이다. 살면서 나와 내 가족이 줄곧 동의해온 것들, 꼭 지켜지기 원하는 가치들을 위해서라면 형편에 겹더라도 가능한 한 그 비용을 치르려 애써 왔다. 아끼지 말아야 할 것까지 아끼고 나면 금세 마음이 옹색해지기 때문이다. 여행사를 이끄는 네팔인 세 자매 러키, 디키, 니키의 행보는 좀 특별하였다. 사회적 편견과 불신 속에서도 여자 트레킹 가이드로 히말라야를 올랐고, 몇 년 간의 여행사 수익을 모아 소외된 네팔 여성들을 위한 교육센터를 세웠다. 덕분에 가난을 숙명처럼 업고 살던 네팔의 산간마을 언니들이 그곳에서 전문교육을 받은 뒤 하나둘 트레킹 가이드로 자립하였으며, 수많은 여성 트레커들은 보다 안전하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히말라야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벌써 십 년 째 계속되고 있는 일들이다. 내가 지불하는 트레킹 비용 안에는 네팔의 세 자매가 지금껏 해온 일들이 지속가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포함되어 있다. 약자의 삶을 부당하게 가두는 울타리가 허물어지기를 바란다면 가끔은 내 주머니부터 허물어야 하는 법이다. 계산기 두드려대며 걱정스런 눈길로 우리를 건너다보는 사람들에게 나는 내 생각의 갈피들을 조금 펴 보였다. 그런데 아까부터 심장 아래쪽에서 칭얼칭얼 대는 소리가 들린다. 당분간 숙소 앞 식당에 앉아 맥주 마시며 책 보는 여유 따위 부릴 수 없다는 걸 알아채고 속마음이 투정을 부리는 모양이다. 해발 3,200미터 푼힐을 향해
다누와 락슈미가 앞장을 서고 우샤는 뒤를 챙기며 걷는다. 몸이 가벼운 아이들은 잽싸게 앞쪽 다누 언니에게 따라붙고 순식간에 내가 꼬리로 처졌다. 나는 우샤에게 꼭 목표한 곳까지 가지 않아도 좋다고, 어디까지 오르던 상관없으니 다들 너무 힘들지 않게 올라가자고, 큰 언니처럼 굴며 말했다. 우샤가 웃으며 “좋아요, 디디.” 했다. 네팔에서는 언니를 디디(didi)라고 부른다. “그런데 디디, 푼힐까지는 올라가야 산이 진짜 멋있거든요. 우리 거기까지만 갈까요?” 푼힐(Poon Hill)은 해발 3,200미터에 있다는 봉우리다. 한라산이 1,950미터 백두산도 2,750미터인데, 3천 미터 넘는 푼힐이 뒷동산 쯤 된다는 말투다. 헉헉 밭은 숨 토하며 올려다보니, 빌어먹을 푼힐은 까마득하기만 하다. 히말라야, 멀리서 쳐다볼 때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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