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글쓴이 리정애씨는 ‘조선적(朝鮮籍)’을 가진 재일조선인 3세로, 얼마 전 한국 남성 김익씨와 결혼했습니다. 민족21이라는 잡지에 연재한 ‘재일동포 리정애의 서울체류기’가 10월 초 책으로 묶여져 나왔으며 일다에서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조선’ 국적은 ‘일본에 거주하면서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적을 갖지 않고, 일본에 귀화하지도 않은 이들이 갖는 행정상의 적’입니다. 여권이 없는 ‘조선적’자들은 일본출국 시 매번 출입국관리사무소가 발행하는 ‘재입국허가서’를 가지고 여행을 떠납니다. (일다기사 ‘조선적(籍)’자의 변치 않은 현실 참조) 또한 한국에 입국 시에는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야 입국이 가능합니다. 북한은 재일동포들을 다 ‘해외공민’으로 삼아 국적을 따지지 않고 받아주기 때문에 이러한 증명서를 발급받지 않고도 입국이 가능합니다. 한국정부에서는 조선적 재일조선인을 ‘북한국적자’로 보는 시선이 존재합니다. 정권이 바뀐 후 최근 들어 특히 조선적 재일조선인에 대해 여행증명서 발급을 거부하는 사례가 증가했습니다. 리정애씨 또한 결혼식을 앞두고 주오사카 한국영사관으로부터 여행증명서 발급을 세 차례에 걸쳐 거부당했습니다. 이후 언론과의 적극적 인터뷰 등을 통해 저항한 리정애씨의 노력으로 간신히 3개월 기한의 여행증명서를 발급 받아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일다는 리정애씨의 목소리를 통해 조선적 재일조선인의 현실을 외면하고 억압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살펴보는 기사를 2회에 걸쳐 마련합니다. ‘이정애’로 발급받아야 하는 여행증명서
노무현정권 때만 해도 여행증명서를 받는데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다. 오사카 영사관의 태도는 항상 고압적이었고 국적을 바꿀 의사가 있다는 말을 신청서에 꼭 써야 했지만 형식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아무리 형식적인 것이라 해도 쓰기 거북했지만 점점 익숙해졌다. 몇 번해도 익숙지 않은 것은 이름에 관해서다. 영사관에서는 내 이름이 언제나 ‘이정애’로 바뀐다. 그래서 내 여행증명서 이름은 언제나 ‘이정애’다. 처음에는 모든 이름 란에 리정애라고 쓰는데 직원이 ‘이’로 고치지 않으면 여권이 안 나온다고 해서 할 수 없이 고친다. 그래도 매번 계속 리정애라고 쓴다. 그것이 내 이름이니까. 조선대학교(도쿄에 있는 조선학교의 최고학당)에 가서야 겨우 찾은 내 진짜 이름. 어찌 ‘이’라고 쓸 수 있을까. 세계 어디를 가도 내 이름은 리정애다. ‘일본놈’들이 일본 한자 발음으로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도 하지만 나는 그냥 못 넘어가서 ‘리정애’라고 강조한다. 대부분은 못 알아들어서 몇 번이나 말해야 하지만. 2007년 여름, 통일행사 참여하려 한다니 영사가 직접 전화해 내 어머니나 주변 조선적 동포들은 몇 번이나 영사와 면담을 가져본 적이 있는데 영사는 그때마다 ‘국적을 바꾸라’고 하면서도 ‘이번만은 허가를 주겠다’고 하며 허가를 내주었다. 나도 한 번 전화 면담을 받아본 적이 있다. 2007년 여름에 신청했을 때다. 그 해는 부산에서 8.15민족대축전이 열릴 예정이었다. 나는 아는 사람들을 통해 그 행사장에 꼭 참석할 수 있도록 미리 손을 써 놨다. ‘그때 감동을 다시 맛볼 수 있다!’ 생각만 해도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입국목적을 쓰는 이유서에 ‘부산에서 열리는 8.15민족대축전에 참가하기 위해서’라고 써 버렸다. 영사한테 직접 전화가 왔다. 영사는 어디 단체소속으로 가는지 아니면 개인적으로 가는지 물었다. 나는 그냥 개인적으로 혼자서 간다고 대답했다. 그 후 영사는 왜 조선대학교에 가게 됐는지, 북에 언제 어떻게 갔다 왔으며 친척이 있는지 없는지, 그런 질문들을 했다. 총련조직에 관여하고 있는지도 물었다. 나는 총련에 소속되어 있지 않지만 행사가 있으면 참가한다고 대답했다. “우리 재일동포들이 일본에서 지금처럼 여러 권리를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은 조직이 있기 때문이고 조직이 없으면 조선학교도 없고 우리말도 못한다. 내가 영사님이랑 이렇게 우리말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조직과 우리 동포들이 세운 조선대학교에 다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너무 흥분해서 떨렸다. 영사는 “그건 인정하겠다”며 “한국말 잘하시네요. 바로 허가 내드릴께요” 라고 해서 통화는 끝났다. 결국 2007년 8.15행사는 남북, 해외가 함께 하지 못했다. 노무현 정권 말기인 남측당국이 이 해부터 총련동포들의 입국수속 절차를 까다롭게 했기 때문이었다. 신청서와 함께 이력서, 가족관계 등, 그리고 북과 남에 있는 연고자들의 명단까지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총련대표들을 비롯한 해외측 대표들과 북측이 이것에 항의하여 무산되었던 것이다. 2009년부터 ‘조선적’ 재일동포 여행증명서 발급거부 증가 2009년에 들어서 주변 조선적 동포들의 여행증명서가 발급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자꾸 듣게 됐다. 써야 할 서류도 많아졌다. 넉 장에서 많으면 다섯 장이 된다. 매번 ‘총련조직에서의 직위’, ‘방북 이력’ 등, 그리고 ‘주로 사귀는 사람들의 이름’까지 써야 한다. 그해 여름에 신청하러 갔을 때, 영사관 직원과 싸웠다. 접수에서 ‘임시여권을 신청하러 왔다.’고 했더니 ‘한국국민도 아니면서 왜 국민의 여권을 달라고 하냐.’고 너무나 고압적인 태도로 나왔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국적인데 왜 한국으로 가려고 하냐. 국적을 바꾸라.’고 하기도 했다. 냉정하게 넘어가려고 했지만 머리에 피가 올라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언제 ‘여권’을 받고 싶다고 했는가.’ ‘일본놈들도 마음대로 왕래하는데 동포인 내가 왜 고향땅에 못 가냐!’고 반론했다. 직원은 ‘일본놈들은 외국인이라서 그렇다. 당신은 동포니까 안된다.’고 했다. 왜 외국인은 되는 일이 동포면 안 될까. 말도 안 된다. 큰 모순을 느낀 날이었다. 그 때 이유서에 ‘국적을 바꾸겠다.’는 말을 ‘형식적’이라도 절대로 쓰기 싫었다. 대신 ‘예전 정권 때면 모를까 지금 한국정부가 하는 짓을 보면 창피해서 도저히 한국국민이 되고 싶지않다.’고 쓰고 말았다. 나중에 ‘너무 세게 나와 버렸다. 이것으로 이제 허가가 안 나올 것이다.’라고 후회한 것은 잠깐이지만 영사관의 태도를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허가가 안 나와도 말해야 할 것은 말해야 하고 부당한 일에는 적극 항의해야 한다고. 올해는 8.15를 우리 땅에서 보낼 수 없을 것이라 포기했었다. 그런데 어찌된 사연인지 허가가 나온 것이다. ‘상견례를 하겠다.’고 했기 때문일까. 아무리 그래도 인도적인 사연까지는 막을 수 없구나 싶었다. 여행증명서 발급 거부, 오사카 영사관 “왜 국적을 안 바꾸나?” 결국 그 때는 사정이 생겨서 체류기간 내에 상견례를 하지 못했고 가을에 다시 신청하게 되었다. 2009년 11월, 2010년 3월, 2010년 7월 세 번에 걸쳐 다 불허가 됐다. 11월에 영사랑 면담을 했을 때는 내가 다닌 초등학교부터 역대 직장의 이름과 주소까지 자세히 얘기해야 했다. 어디 글을 써서 기고해 본적이 있는가는 질문도 있었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거짓말하지 않을까 확인하기 위해서 묻는 것이라고 추측됐다. 영사는 그저 ‘궁금해서’라고 하면서 내가 얘기한 것들을 남김없이 다 종이에 메모했었다. 나는 이야기 안하거나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여행증명서를 못 받을 것이라 생각해서 있는 그대로 다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보통 30분 정도로 끝난다는 면담이 세 시간이나 걸렸다. 지금 생각해도 바보 같은 짓을 했다. ‘너무 사적인 일까지 자세하게 캐묻는 것은 개인정보 침해다.’ 그렇게 말할 것을……. 그 후로부터 영사관에 몇 번 전화를 해도 ‘아직 안 나왔다.’, ‘잘 모르겠다.’, ‘아마 안 나올 것이다.’는 대답밖에 돌아오지 않게 됐다. 상견례는커녕 이대로 가면 10월에 있는 결혼식까지 못하게 된다. 결혼식 준비는 물론, 단행본 출간 준비 때문이라도 하루라도 빨리 서울로 가야 할 텐데……. 마음만 급해서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럴 때, 월간지 ‘민족21’에 ‘국적이 조선이면 마음대로 이산가족 만들어도 되나요?’라는 제목으로 우리의 사연이 기사로 나왔다. 그 며칠 후 영사관에서 전화가 왔다. 영사랑 면담을 해야 한다는 전화였다. 그때도 영사는 ‘왜 국적을 안 바꾸냐?’고 하면서도 ‘국적을 바꾸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는 말을 몇 번이나 2시간 동안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바꾸면 아무 문제없이 편하게 한국에서 살 수 있다.’ 그런 말도 몇 번이나 했다. ‘조선국적’은 ‘북한국적’이라 말하는 한국정부
그런데 올해 8월 면담에서 영사는 조선국적은 북의 국적이라고 단언했다. 나는 지금 머리가 헷갈린다. 국가보안법을 따라서 외국인이 되어야 하나, 영사 말대로 공화국 국적을 가진 동포가 되어야 하나. 체류기간 만료가 며칠 후로 다가오고 있다. 이번 여행증명서 기한은 11월 12일까지다. 오사카 한국영사관은 결혼하겠다는 사람한테 ‘결혼식만 올리고 바로 와야 한다.’며 3개월짜리 임시여권을 발급했다. 내가 최근까지 몰랐던 사실인데 임시여권의 최대기한은 1년이라고 한다. 영사관은 1년짜리는커녕 이번에는 ‘각서’까지 쓰라고 강요했다. 접수 여직원이 ‘각서를 안 쓰면 여권을 안 준다’고 했다. 이전에 서울 체류 시에 외교통상부 여권과에서 몇 번 기한을 연장한 것을 다 알고 있다며 이번에는 3개월 이내에 꼭 돌아오겠다고 서약하라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결혼식까지 한 달밖에 안 남았는데 겨우 나온 여권이 바로 눈앞에 있어 각서를 쓸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외국인 정도의 권리는 주어야 하지 않나?” 11월 3일에 외교통상부 여권과에 임시여권 기한연장(정확하게는 재발급) 신청을 하러 갔다. 거기 직원은 친절했고 기사로 봤다며 나를 알고 있었다. 친절하게 이야기도 들어주고 일단 신청해 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신청서를 쓰고 사진과 인지값도 냈다. 직원은 윗사람에게 물어보고 오사카영사관에도 문의를 해 봐야 한다고 했다. 그 분위기로 봐서는 어떻게 될 것 같았지만 오사카영사관에 문의를 하면 어려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대단한 권리를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 땅 출신의 자손으로 당연히 내 땅을 오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국적 그대로 영원히 남쪽땅에서 살게 해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외국인 정도의 권리는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외국인들이 결혼하면 결혼비자를 받아서 살 수 있는데 왜 동포인 내가 안 되는 건가. 조선국적은 내 존재 그 자체다. 리정애라는 이름을 버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조선’을 절대로 버릴 수 없다. 나는 국적이 조선이라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그것은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아버지와 어머니가 대를 이어 지켜온 조선사람의 증표이다. 아버지는 장사를 위해, 어머니는 입국거부 때문에 국적을 포기하셨지만 나는 끝까지 지켜나갈 것이다. 나는 정체성을 말살당할 수도 있는, 그런 나라에서 자랐다. 민족성이 없다면 일본인이 될 수밖에 없다. 민족성이 없는 것은 넋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가 민족성을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은 내 진짜 이름이 있고 국적이 조선이고 제주도가 고향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몇 달 전에 연합뉴스에 실린 우리들 기사가 중앙일보에도 실렸는데 그 댓글들을 보니 너무나 무서웠다. 이 나라에는 나를 배척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본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내가 누구한테도 차별당하지 않고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은 없는 것일까. 그 누구도 나에게 국적 전환을 강요할 수 없다. 그리고 국적 선택의 자유를 침범하는 것은 인권침해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권력으로 나에게 국적전환을 강요한다면 나는 그 권력에 맞서 끝까지 싸울 것이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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