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 입소자 비밀보장 원칙이 깨진다면?

여성폭력피해자 개인정보 국가전산망 관리는 인권침해다

나랑 | 기사입력 2012/04/12 [03:36]

쉼터 입소자 비밀보장 원칙이 깨진다면?

여성폭력피해자 개인정보 국가전산망 관리는 인권침해다

나랑 | 입력 : 2012/04/12 [03:36]
[필자 나랑님은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열림터 활동가입니다.- 편집자 주]
 
여성가족부는 수 년 전부터 가정폭력, 성폭력, 성매매 피해자 쉼터에 입소하는 피해자를 지원하는 요건으로, 개별 단체에서 직접 인터넷망인 사회복지시설정보시스템에 피해자의 개인정보를 입력하도록 하고 있다.
 
사회복지시설정보시스템은 보건복지부에서 운영하는 시스템으로, 보건복지부는 시설수급자의 부정․중복수급을 방지하고 누수 되는 급여예산을 절감하겠다는 이유로 사회복지통합관리망(이하 ‘통합관리망’)을 운영하면서, 사회복지시설에는 통합관리망에 연계되는 사회복지시설정보시스템을 통해 운영비와 생계비 등을 지급받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사회복지시설정보시스템(이하 ‘사복시’)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시설 입소자의 주민등록번호와 실명 등의 개인정보를 통합관리망에 입력하여 전산관리번호를 부여받아야 한다. 정부의 통합관리망에는 입소자의 개인정보가 모두 집적된다. 그리고 이렇게 부여받은 전산관리번호를 ‘사복시’에 입력하게 되는데, 이 전산관리번호에는 시설종류의 번호와 시설정보가 포함되고 개인 실명도 입력된다.
 
문제는 이렇듯 보건복지부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통합관리망, 사회복지시설정보시스템을 여성폭력 피해자 쉼터에 그대로 적용하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 지난 4월 6일 여성폭력피해지원단체들은 여성폭력 피해자의 개인정보를 사회복지시설정보시스템에 집적하라는 정부의 요구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인권침해"라며 진정서를 제출했다.     © 일다

피해자 안전보다 행정편의가 우선인가
 
쉼터를 이용하는 여성폭력 피해자 지원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비밀유지이다.
 
쉼터의 위치를 철저하게 비밀에 부치고, 비밀전학을 하고, 쉼터 활동가의 핸드폰 번호조차 명함에 찍지 않는 등의 조치는 바로 가해자로부터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여성폭력 피해자라는 사실, 쉼터에 살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그것이 낙인이 되어 사회적 편견에 시달려야 하는 가슴 아픈 현실에서 피해자의 일상이 침해받지 않게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비밀 보장인 것이다.
 
그런데 사회복지통합관리망을 쓰게 되면 거기에 집적된 시설 이용자들의 주민등록번호와 주소 등의 개인정보가 퇴소 이후에도 5년간 보관된다. 쉼터에 단 하루를 있었든 6개월을 있었든, 입소기간에 관계없이 자신의 정보와 시설이용 내력이 정부의 전산망에 보관된다면, 어느 누가 마음 놓고 쉼터를 이용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개인정보 보호법」제23조에서 개인의 건강, 성생활등에 관한 정보와 정보주체의 사생활을 현저히 침해할 우려가 있는 개인정보를 민감 정보로 분류하고 그 처리를 제한하고 있다.
 
이럼에도 “전산시스템이 대세다”라면서 다른 사회복지시설과 동일하게 여성폭력피해자 보호시설에 사복시 이용을 강요하고 '통합관리망'에 피해자의 신상정보를 집적하는 것은 이 정부가 여성폭력 피해자들을 한낱 ‘관리’의 대상으로 여기며 당사자들의 안전과 인권에 대한 고민은 뒷전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자산 유무와 상관없이 피해자를 지원하는 것은 국가의 책무이다. 가해자의 폭력을 피해 맨 몸으로 도망 나온 피해자는 자산이 있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사용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부에서는 ‘중복 수급’의 우려가 있다면 이 시스템을 이용하도록 하는 이유를 내세우지만, 사실 그에 대한 대책은 별도로 마련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빌미로 모든 여성폭력 피해자의 정보를 전자적 방식으로 집적하겠다는 것은 행정 편의만을 추구하는 발상이다.
 
쉼터 ‘지원중단’ 통보에 ‘울며 겨자 먹기’로 사복시 이용
 
현재 대부분의 쉼터에서는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으면 피해자 지원 업무에 차질이 생기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사회복지시설정보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쉼터들이 개인정보 노출을 우려하여 ‘사복시’에 피해자 신상정보를 입력하는 것에 반대하자, 여성가족부는 처음에는 수기(문서)로 보고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차츰 ‘사복시’에 입력하는 것을 장려하더니, 급기야 올 3월부터 이를 의무화하기에 이르렀다. 올 3월부터 사복시를 이용하지 않는 쉼터에 대해서는 생계비와 의료비, 교육비 등 각종 급여 지원을 중단하고, 감사 부서를 통해 징계(주의)조치 할 예정이라고 밝힌 것이다.
 
정부에서 구청을 통해 보낸 공문서에 보면 “2012년 1월부터 완전한 온라인방식으로 전환하고자” 한다면서 “BH(청와대) 지시사항”으로 “수기 처리하는 시설 점검 및 징계조치” 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열림터(성폭력피해자쉼터)는 이러한 상황을 현재 쉼터에서 살고 있는 당사자들과 공유하고 의견을 물었다. 당사자들은 국가의 이러한 처사에 분노하면서 “단 하루만 살아도 내 정보가 남는다면 누가 쉼터에 들어오겠느냐”, “쉼터 오기가 무섭다.”며 불안감을 드러냈다.
 
거듭된 고민 끝에 열림터에 입소해 있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개인 정보를 ‘사복시’에 입력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생계비 등을 지원받지 못하면 자체적인 재정 부담이 늘어나 난관이 예상되지만, 피해자들의 개인정보 유출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무작정 국가 지침에 따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여성부와 복지부, 서로 책임 떠넘기기?
 
열림터의 3월 생계비를 지급받지 못하고 4월이 되었다. 정부의 이러한 처사를 폭로하고 연대를 호소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반발의 움직임이 확대될까 두려웠는지 여성가족부는 4월 초, 생계비를 신청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안 주겠다고 한 적이 없다.”고 한다. 3월에 지급해야 할 것을 3월 내내 주지 않다가, 4월 초에 신청하라고 했으면서 이제 와서 그런 적 없다는 것은 무슨 발뺌인가?
 
더욱 황당한 것은 성폭력 피해자에게 지원해야 할 최소한의 의식주를 가지고 정부 각 부처에서 핑퐁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4월 6일자 한겨레신문을 보면 “복지부 고위관계자는 “여성가족부가 (사복시) 연계 방안에 동의했기 때문에 복지부가 추진한 것이며 반대한다면 할 생각이 없다”고 하는 반면, 여성가족부 쪽은 “복지부가 수기(문서) 보고를 못하도록 해서 우리는 (사복시를) 안내한 것일 뿐”이라고 서로 책임을 떠넘”(한겨레 신문 4월 6일자 기사)기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행정기관의 무책임한 행보는 정말 이 정부가 피해자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진정성을 갖고 있는 것인지 의심하게 만든다. 국가의 지원을 받으면 국가가 쉼터를, 피해자를 쥐락펴락 하는 것이 당연한가? 돈을 받으려면 무조건 지침에 따라야 하는가? 피해자 지원을 국가의 책무로 보기 보다는 돈을 주니 철저하게 자신들이 통제하겠다는 발상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지난 4월 6일, 피해자를 볼모로 한 이러한 행정폭력에 맞서 여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221개의 상담소, 쉼터들이 뜻을 모아 ‘사회복지시설정보시스템 강요는 피해여성의 인권침해’ 라는 내용을 담은 진정서를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출하였다.
 
진정 접수에 앞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수년간 지속되어 온 정부와의 줄다리기에 다시 고비를 바짝 쥐고 새롭게 싸움을 시작할 것을 결의하였다. 하루라도 빨리 여성폭력 피해자 지원시설에 대한 ‘사복시’ 이용 지침을 전면 철회하고, 피해자의 인권을 최우선적으로 배려하는 정부로 거듭나기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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