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대선 정국에서 ‘복지’가 주요한 정책의 화두가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복지국가로의 전환은 한국 사회에서 시대적 요청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대선후보들이 제시하고 있는 복지정책은 시민사회에서 ‘포퓰리즘’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큼 구체적인 내용이 잡히지 않고 있고, 또한 근본적인 철학이 부재한 채 파편적으로 공약을 나열하는 것에 그친다는 비판에 직면해있다. 성평등 정책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 또한 대부분 보육이나, 모성보호 등 전통적인 성역할에 갇혀 있는 ‘여성전용’ 정책이 대부분이라 우려가 된다.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에서 ‘성인소득자’ 모델로 우리 사회는 복지국가로 가야 한다는 대전제는 있으나 ‘어떠한 복지인지,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지’ 고민이 부족하다. 여성운동 진영에서는 기존의 복지국가 이미지를 넘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짜는 근본적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욕구와 현실이 반영된 성평등한 대안사회모델을 찾아야 한다는 요구이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지난 달 30일 <성평등 복지로 한국 사회의 다음을 기획하다> 토론회를 통해 복지 의제와 정책 과제를 제시했다. 성평등 복지국가란 무엇인지, 그 이론적 틀과 면접조사를 통해 여성들의 실제 경험을 접목시켜 구체적인 성평등 국가의 밑그림을 제시해 주목된다.
젠더사회연구소 이숙진 소장은 기조발제를 통해 “복지국가로 가는 핵심 단계는 ‘민주화’이며 ‘성평등’은 민주주의의 발전과 동행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일각에서는 복지국가가 단순히 복지정책의 문제로 협소하게 이해되고 있지만 “복지국가는 ‘성평등’이라는 가치와 철학에 근거한 국가의 운영원리를 세우는 문제”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복지국가란, “성차별적인 전통적 성별 분업을 약화시키는 정책과 제도를 실행하는 복지국가”여야 한다. 민우회는 기존의 남성 생계부양자를 중심으로 구성된 ‘가족관계’에 기초한 복지국가모델에서 시민권을 가진 ‘개인’을 단위로 한 복지국가모델로 변화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바로 ‘성인소득자 모델’이다. 이숙진 소장의 설명에 따르면 성인소득자 모델은 “남녀 구분 없이 성인이 되면 일정한 소득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사회정책 전반이 설계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소장은 성인소득자 모델을 지향하면 “여성고용의 증가로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증대시키며, 동시에 남성에 대한 경제적 의존을 약화시킴으로써 성평등의 주요 요소를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 성평등 복지의 주요 의제로 설정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양한 가족을 구성할 권리’ 보장하는 복지 개인 단위의 복지국가 모델을 지향하는 것은, 한국사회가 더이상 ‘가족’을 중심으로 개인의 삶이 정형화되지 않는 시대라는 현실 진단을 바탕으로 한다. 2011년 현재 전체 가족 중에 핵가족과 직계가족은 66% 수준이며, 1인가구는 23.9%에 육박한다. 결혼이나 혈연을 통해 묶이지 않은 가구도 1.25%로 20만 가구나 된다. 이숙진 소장은 이러한 현실과 무관하게 “우리의 사회보장, 조세, 주택 등의 정책은 법률혼 부부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다양한 가족을 구성할 권리”가 무시되고 “이러한 가족들이 국가정책에서 배제되거나 차별”받고 있는 것이다.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유정미 연구교수는 1인 가구의 높은 빈곤률에 주목했다. 2010년 기준으로 1인가구의 빈곤률은 45.5%에 달한다. 전체 가구의 평균 빈곤률 13.8%보다 30%가량 높은 수치다. 유정미 교수는 “1인가구의 증가는 부양가족 형성 단계에 이르기도 전에 좌초하는 다수의 빈곤계층의 출현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특히 여성의 경우 일자리가 제한되어 있고 성별 임금격차가 크며 고용이 불안정하다는 점에서, 여성 1인 가구는 보다 쉽게 빈곤계층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필연적으로 “남성 생계부양자 중심의 사회체제와 복지정책을 전환함으로써 모든 개인들이 일정 수준의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전략을 요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유 교수는 “현재 부양가족인 ‘다인 가구’ 중심으로 지원되는 정책들을 제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현행 1가구 1연금제의 경우, 1인 1연금제로 개편해서 여성의 연금 수급권을 확보하는 것 등이 그 사례이다. 유정미 교수는 1인 1연금제로 개편할 경우 “연금 납부의 지속성을 강화시키는 방안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으로 실업상태를 반복하면 납부예외기간이 길어져 연금수령액이 작아질 수 있으므로, 이 경우 실업급여를 받는 자에게 연금납부액을 보조하여 예외기간을 줄이는 것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공공부문에서 ‘좋은 여성 일자리’ 확대해야 가족이 아닌 개인을 단위로 한 복지국가모델이 성공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고용 문제가 함께 해결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여성의 고용률과 일자리의 질을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 이숙진 젠더사회연구소장은 “여성 고용율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국가운영 원리상 여성을 소득자로 전제하지 않은 것 때문”이며, “성별 분업을 변화시키려는 국가 차원의 의지”가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단언했다. 지난 20여 년간 한국의 여성경제활동 참가율은 50%를 전후하여 거의 변화가 없었지만, “OECD국가들은 지난 10년간 이미 여성 고용율이 높은 수준에 있었던 스웨덴과 미국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국가에서 지속적으로 상승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들었다. 이숙진 소장은 여성고용율을 높이는 방편으로 “공공의 좋은 일자리를 통한 여성소득자의 확대”를 제시했다. “괜찮은 일자리가 시장을 통해 자연스럽게 창출될 것”이라는 생각은 “환상”일 뿐이므로 “국가의 노력이 공공부문의 여성 일자리 창출을 통해 가시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009년 스웨덴은 전체 여성노동자의 49%가 공공부문(중앙 및 지방, 의회)에 고용되어 있으며 이 영역의 성별비중은 평균 70%에 달한다”는 것을 예로 들었다. 근로시간 단축…‘쉼’을 제도화하라 성인소득자 모델을 지향하는 성평등 복지국가는 필연적으로 남성의 돌봄 노동 참여와 ‘이상적 노동자상’의 변화를 요구한다. “일하는 남성, 돌보는 여성”이 아닌, “남성과 여성이 일-쉼-돌봄을 균형 있게 누리는 존재”로 전환이 필요하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 김창연 선임연구원은 “자신과 타인에 대한 돌봄의 가치와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이를 위해 노동을 균형 있게 영위하는 사람이 이상적 노동자로서 인식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시간’이 재구성되어야 한다. “누구나 적정하게 일하고 적정하게 돌보며 적정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이 부여되어야 하는 것이다. 김창연 연구원은 “하루의 근로시간”뿐만 아니라 “생애주기”에도 이 원칙이 해당된다고 말했다. 근로시간 단축은 일자리 창출과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김창연 연구원은 ‘실근로시간 단축’을 위한 방안으로 시간외 근로, 즉 야근을 제한하는 방식이 제안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근로 시간을 하루 10시간, 한 주 48시간으로 규제하는 ‘최대 근로시간제’를 도입하는 방법과, 또 하나는 시간외 근로에 대한 할증률을 변경함으로써 기업이 장시간 노동에 대한 부담을 느끼고 스스로 줄여나가도록 유도하는 두 가지의 방식이 대표적이다. 이와 관련하여 민우회는 초과근로시간 제한 규정을 강력히 준수하도록 할 것, 점심시간 유급화를 통해 소득감소 없이 실근로시간을 단축하고 생애주기에서 ‘쉼’을 제도화하기 위해 안식년 휴직을 도입하는 것을 정책으로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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