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개정된 입양특례법이 오히려 ‘아동 유기를 조장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일다>는 ‘입양’을 둘러싼 문제들을 ‘여성의 양육권’와 ‘아동의 인권’ 차원에서 바라볼 것을 제안하며,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기사를 연재한다. 필자 권희정씨는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했으며, 현재 미혼모와 입양에 관한 논문을 준비 중이다. [편집자 주]
입양특례법 논란, 미혼모의 ‘어머니 될 권리’는 어디에? 최근 일각에서 아동의 ‘출생에 대해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개정된 입양특례법에 대해 ‘베이비 박스에 유기되는 아기의 증가를 부추긴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일부 미디어는 아무 비판 없이 이러한 입장을 그대로 보도하여, 다분히 문제적일 수 있는 의견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입양특례법을 다시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청소년 미혼모의 경우 입양숙려 기간을 거치지 않아도 되고, 이들이 출산한 아동은 ‘부모를 알 수 없는 아이’로 보고 친부모 대신 입양기관의 장이 가족관계를 창설할 수 있게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고아로 만드는 것이 ‘아동유기’ 해법인가?” 기사 참조) 이러한 주장은 한국 사회에서 ‘아동 유기’가 발생하는 복잡한 상황을 ‘청소년 문제’로 치환해버리는 것이기에 동의하기 어렵다. 그보다도 우리가 도대체 언제부터 혼인제도 밖에서 출산한 여성의 ‘어머니 될 권리’와 그 아동의 ‘출생에 대해 알 권리’를 이토록 망각하게 되었는지, 아니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지 의아하다. 한편으로 한국 사회의 미혼모 ‘문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진보적’ 가치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해외에는 미혼모라는 용어도 없다” 면서 서구 여성들은 애초에 혼인 여부와 상관없이 모성권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서구 사회에서 미혼모는 국가의 혜택을 받아 양육하고 남녀가 평등하게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또, 미혼모에 대한 ‘낙인’의 원인을 유교적 전통에서 찾으려는 경우도 있다. 결혼하지 않고 임신한 여성에 대한 ‘차별’은 유교의 잔재로 인한 문화 지체, 또는 지연된 근대의 현상인가? 출산한 여성과 태어난 아동의 가족구성권을 보호하기는커녕 국가가 개입해 다른 가정에 입양 보내는 것이 문제의 해결인 것처럼 여기는 건, 또 어디에서 온 전통인가? 빅토리아 시대 ‘혼전 성관계는 치명적인 죄’
지난 기사에서 ‘베이비 스쿱 시대’(Baby Scoop Era: 아이스크림을 듬뿍 떠내듯 친생가족으로부터 아기들을 집단적으로 분리시켜 다른 곳에 배치시킨 시대)에 대해 이야기했다. 서구에서 산업자본주의에 기초한 근대의 정점에 이르러 남성부양자를 모델로 하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치던 1950년에서 1970년 시기이다. 혼인제도 밖에서 출산한 여성들이 낳은 아이를 대거 입양 보냈던 시절이다. 말하자면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근대의 이산(離散)’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구에서 ‘혼외 출산’에 대한 통제는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고 당시의 통제 방법은 ‘입양’이 아니라, ‘낙인 찍기’와 ‘처벌’이었다. “번영과 긍정의 빅토리아 여왕 시대.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는 끝날 것 같지 않는 비극의 시대였다. 근면, 성실, 종교적이고 도덕적 가치가 강화되는 가운데 여성들은 성적 충동을 가져서는 안 되고, 혼전 순결을 지켜야 하고, 혼전 성관계는 치명적인 죄로 여겨졌고, 이를 어기면 타락한 여자로 손가락질 받았다. 그리고 혼외 출산아는 사생아로 불리며 죄의식과 낙인 속에 살아야 했다. 부모들은 혼전의 딸들에게 관계를 가지면 죽음보다 비참한 운명에 처할 것이라 지속적으로 경고했다.” 레이몬드 레이턴(Raymond Reighton)의 역사적 소설 <위기의 어머니들>(Desperate Mothers)에 나오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 미혼모들이 처한 상황이다. 혼외 임신을 하게 된 여성은 목숨을 내놓고 ‘뒷골목에서 위험한 낙태를 하거나’ 영아살해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영아살해…“제가 어떤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나요?”
그녀의 저서 <제가 어떤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나요?>(What Else Could I Do?)는 20세의 에나의 사례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에나는 호텔에서 주방보조로 일하고 있었는데 1932년 3월 호텔 숙소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바로 살해한 뒤 옷장 윗간에 방치해두었다. 그러다 호텔 주인에게 발각이 되어 살해혐의로 구속되었다. 취조를 당하던 그녀는 경관에게 “아이를 낳았고 그리고 죽였어요. 제가 어떤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나요?”라고 물었던 것이다. 클리오나에 따르면, 1900년에서 1950년 사이 매해 아일랜드의 수백 명의 미혼여성들은 혼외 임신으로 인해 큰 곤경에 처했다. 대부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가능한 임신 사실을 숨겼으며, 아무런 도움 없이 혼자 아이를 낳아 대부분 수시간 안에 바로 아이를 죽였다. 당시 사회는 “미혼모들이 도덕심이나 정신적인 결함으로 인해 영아살해를 저지른다”고 보았다. 대부분의 미디어는 미혼모를 ‘골칫거리’, ‘범법자’와 같은 용어로 표현했으며 “비정한 엄마들은 수치스러움을 숨기고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이를 죽인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클리오나는 영아살해 사건이 ‘혼외 임신에 대해 매우 불관용적인 사회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20세기 초반에 사회복지 지원은 거의 없고, 무관심과 낙인, 비난만이 있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느끼는 상황에서 혼외 출산한 여성이 영아살해를 저지르는 것은 거의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혼외 출산이 더이상 문제되지 않는 사회로
19세기 말, 복음주의 전통에 입각한 여성자선가들은 미혼모를 구호의 대상으로 보고, 여성개혁의 일환으로 미국 전역에 200여 개의 미혼모 시설을 세웠다. 이들은 자매애에 기초한 기술, 연민, 종교적 독실함 등을 미혼모 시설에 도입하였다. 그러다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복지’는 ‘근대학문’의 영역에 포함되었고, 사회복지사라는 전문 직업인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기존의 박애주의에 입각한 복음주의 여성개혁가들이 해왔던 ‘미혼모 보호’와 ‘갱생 지원’은 너무 ‘여성적’이라고 비판했다. 전문 사회복지사들은 ‘과학적’이고 ‘이성적’이며 ‘객관적’인 ‘지식’을 통해 ‘치료’를 한다고, 자신들의 역할을 차별화시켰다. 이제 미혼모는 ‘구제받아야 할 타락한 여성’에서 ‘치료받아야 할 문제를 지닌 여성’이 되었다. 이처럼 서구 사회는 빅토리아 시대에서 20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미혼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낙인 찍고 통제하는 오랜 역사를 거쳤다. 그러다가 ‘입양’이 근대법 하에 제도적으로 자리잡고 일반화되면서 1950년대 이후 각 나라마다 시기와 상황은 약간씩 다르지만 혼외 출생아를 생모로부터 분리하여 다른 중산층 가정에 대거 이동 배치시키는 ‘베이비 스쿱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후 서구 사회는 근대 핵가족 모델을 탈피해나가며 더 이상 혼외 출산이 문제가 되지 않게 되었다. 물론 세월이 흘러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건 아니다. 미혼모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있었고, 사회적 포용과 국가적 지원이 함께 따랐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베이비박스에 버려지는 아이들을 줄이기 위해, 이들을 ‘부모를 알 수 없는 아이’로 만든 뒤 다른 가정에 입양 보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주장. 아동 유기 문제를 이런 식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불명예스러운 ‘베이비 스쿱 시대’가 연장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고 미워할 대상조차 잃어버린 생모와 아이에게는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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