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작은 지역에서는 김태섭이 나름대로 종손으로 대접받고 또 수천 석 땅마지기는 기관장도 무시 못 하는 힘이 되니 비록 정부 인감 찍힌 직함은 하나 없어도 지서장이며 면장이며 조합장하고 어울려 대소간의 지역문제를 머리 맞대고 상의하고 청하고 수하고, 대개는 그의 주머니에서 술값이며 기생값이 치러지는 것이지만 속사정은 그저 그가 가진 돈이지 어디 가진 것 없는 힘 때문이런가?
서의원으로 찾아온 지서장하고 동생의 폭행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상의하는 중에 김태섭은 의외로 지서장이 소극적이고 미온적인 것을 느끼며 기분이 상한다.
-지서장님. 땅 붙여먹는 놈 주제에 싫으면 말면 되지 어데 사람을 이렇쿠롬 해를 끼칩니꺼? 대한민국에는 법이 있는데 저런 놈은 그냥 둬서는 안됩니더. 내 지서장님한테 다 맡끼놀 테니 알아서 하이소. 혼쭐을 내야 됩니더.-
태섭은 으름장을 놓지만 지서장의 귀에는 마치 합바지 털어내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사건 자체로서는 가해자인 노병구를 당장이라도 잡아 처넣을 수도 있을 만큼 중하지만 일이 터진 지 불과 반나절도 안 되어 여기저기서 연통이 오고 이런저런 군더덕 붙은 소리를 듣게 된 지서장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만큼 난감한 입장에 처해있다.
사변에서 불구자가 되어 돌아온 뒤로 노병구는 대한상인군인회에 등록이 되었고, 아직도 전쟁의 탄환메아리가 남아있는 지역 구석구석에 주둔하고 있는 군부대의 연줄을 자랑처럼 떠벌리고 다니며 또 지역유지들을 고문으로 하는 무슨 반공단체에 가입되어 그저 공술 먹고 떠들어대는 재미로 다니는 꾸루와이라 어느새 여기저기에 연락을 취해 지서장으로 하여금 사건을 무마하려고 하는 바람에 같은 지역유지 입장에 지서장은 여러모로 불편한 참이다.
지서장으로서 무슨 회의 회장이나 단장, 혹은 단체장과는 직접적으로 이해관계가 얽혀있지만 김태섭이란 자는 그저 지방의 몇 되지 않는 종친에 지나지 않는지라 어떻게든 이번 사건을 김태섭으로 하여금 양보하게 만들려는 것이 지서장의 속셈인데, 다짜고짜 그의 입에서 강경한 말들이 쏟아지자 지서장도 심정이 복잡해진다.
-김회장! 작디작은 지역에서 그래도 김회장 가문이 수백 년 동안 복 받고 명성 얻어가며 전통을 지켜온 것은 다 가문에서 베푸는 너그러움 아니오? 사실 사건 자체로서는 김회장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저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콩밥을 멕여도 충분하겠지만 그놈이 어디 사람이오? 몇 년 살다가 나오면 그때는 도끼 들고 찾아갈지 누가 알겠소? 나도 내 관할에서 이런 불미스런 사건이 터졌다는 것이 도에까지 알려지면 치안관리 잘못했다고 시말서 쓸지도 모르고 앞으로의 인생에 큰 낙점이 찍힐 것이라 입장이 곤란해서 하는 말이라오-
-아니 서장님! 지금 그놈을 두둔이라도 한다는 말입니꺼?-
화가 치밀어 오르는 김태섭은 병원입구에서 헛기침을 속으로 눌러가며 제법 듬직한 소리로 대들어 보지만 한편으로는 지서장의 속내를 이미 짐작은 하고 있는 터이다.
-김회장! 내가 왜 그놈을 두둔하나? 이미 그놈은 지서에 감금돼 있고 조서를 받고 김회장이 고소를 하는 대로 바로 본서로 이첩할 것이지만 지역사정을 잘 아는 우리로서 같이 무슨 좋은 방도가 없을까 해서 얘기 나누는 것 아니오?-
예전에 상주목사도 부임하면 종가에 제일 먼저 인사 왔다는 것은 이제 먼 얘기고 특히나 해방 후에 신문물이 들어오면서부터는 양반가문에 곰팡이가 슬기 시작했다는 것쯤은 자기도 익히 경험하고 있는지라 허울 좋은 가문에 불과한 자신의 무력함이 그저 아득하다.
-서장님! 집안을 이끄는 내 입장도 생각해 보이소. 또 그놈이 댕기민서 저지르는 온갖 행패를 지서장님도 잘 알꺼 아입니꺼? 그런데 이런 일을 그냥 넘어가면 그놈이 우리지역을 우째 볼 건지는 생각 안 하십니꺼?-
지역에서는 김태섭을 부를 마땅한 직함이 없는지라 그냥 종회의 회장 자리를 빌려서 김회장이라 부르고 있다.
-김회장! 내가 어찌 그런 걸 모르겠소? 김회장이 하는 말은 다 옳지만 추후에 남겨질 일이나 또 벌어질 일들을 생각해보면 그 흉악무도한 놈을 그저 몇 년 콩밥 먹인다고 해결될 성싶지 않구려-
지서장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공권력에 여러 가지 눈에 안 보이는 압력과 청탁이 흠을 내는 것이 싫지만 그것도 지역의 기관장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라 가장 이해관계가 적은 김태섭을 회유하려는 것이다.
콧바람이 씩씩거릴 정도로 화를 삭이며 담배를 피워대는 김태섭을 쳐다보며 지서장은 다시 한마디 더 한다.
- 김회장! 그럼 지금 서로 같이 갑시다. 고소장을 접수해야 나도 그놈을 넘길 수 있으니-
그리고 지서장도 담배를 꺼내 물고 김태섭의 표정을 곁눈질 한다.
난감하다. 김태섭은 그저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감옥을 보낸다 한들 얼마 후에 지서장 말대로 칼이나 도끼를 들고 찾아와 행패를 부려대면 그것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며 또 그냥 속 쓰리게 넘어가주고 그놈 마누라한테서 필요 없는 꾸뻑절이나 수십 번 받아봐야 그 또한 물탱이 함녕김씨 집안이라고 얕잡아 보일 것이니 이래도 저래도 그저 힘없고 권력 없는 자신이 아득할 뿐이다.
-지서장님! 오늘은 지도 태광이를 집으로 델꼬 가야 되고 또 해도 저물어가이 낼 보이시더. 서장님 입장이나 얘기를 지도 다 이해도 하고 압니더. 케도 참 세상이……. 우찌 됐던지간에 서장님 낼 뵙시더-
남은 권련을 발밑에 비벼 넣은 김태섭은 지서장을 남겨놓고 병원 안으로 들어와 버린다. 일종의 지서장에 대한 불편한 심기의 시위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무력한 자신을 한시라도 빨리 감추고 싶은 창피한 심정이기도 하다.
이튿날 지서장은 꾸루와이에게 으름장을 놓고 종가에 용서를 빌고 고소를 취하 받지 않으면 콩밥을 한 십 년을 먹을 거라고, 머리가 백발은 돼야 햇빛 볼 것이라고, 소작이고 뭐고 그 집안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거라고 빌어야 한다고, 치료비고 보상이고 부잣집에서 그런 건 바라지 않을 것이니 그저 머리 조아리고 빌어야 마누라 해주는 밥 얻어먹고 살 거라고……. 김태섭의 체면도 챙기지 않으면 후에 자기 입장도 여러 가지로 곤란할 것을 생각하고 또 이런저런 연줄로 연락받은 꾸루와이 선처 부탁도 이 정도 선에서 결말 지어주면 지서장의 위신도 한층 돋보일 것이라 생각하여 일을 꾸민 것이고 또 일은 그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지만 소작도 없어진 꾸루와이는 결코 그 일을 그냥 지나갈 사람이 아니었다.
아래채 방안에서 꿈쩍도 못하는 광수아비 때문에 광수애미 역시 집을 비우는 법 없이 봄일도 걷어치운 채 지극정성으로 세끼밥상을 돌보고 용변수발을 들고 있다.
내일이 보름인데……. 보살이 집에 들어서면……. 저것이 또 무슨 일일까? 하고 귀를 세워 듣고자 할 것이고, 자기만 알고 진행하는 일이 사전에 새어나가기라도 하면 은근히 광수가 종손 되기를 바라던 입장이라 또 무슨 입방아를 찧을지도 모르리라. 영감이야 무슨 일을 만들어 심부름 시키면 반나절쯤이야 집을 비우게 할 수 있는데……. 생각에 잠긴 큰아지매다.
이튿날 아침에 큰아지매는 건넛방에서 얼굴도 내밀지 않은 영감을 찾아 문밖에서 부른다.
-영감! 일어나 보시구려. 오늘이 보름인데 좀 하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각방을 쓴 지가 언젠지도 모를 만큼 오래 되었고 이제는 오히려 두 사람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들조차 당연하게 여길 만큼 안방과 건넛방 두 주인은 태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아직 마흔 중반의 사내인 태섭이라고 어디 계집이 싫겠는가만은 마누라만 보면 도무지 그 기생집에서 일어나는 흥이 돋아나질 않으니. 눈치 보아가며 또 체면에 생채기 나지 않을 정도로 이런저런 모임을 하면서 술집기생을 품어보곤 하는 태섭이니 마누라 목소리를 들으면 그저 어릴 때 자기를 부르던 아버지 소리와 같이 느껴질 뿐이다.
-내 벌써 일어났는데. 들어오시구려-
말과 함께 미닫이문을 열어젖히고 앉은 채로 올려본다.
-오늘 당신이 좀 다녀와야 할 데가 있습니다. 채비하시고 서두르세요-
-어딜? 무슨 일로?-
태섭은 영문을 모른 채 묻지만 마누라는 벌써 안방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사각거리는 치마소리를 들으며 대답도 않고 방문을 닫아버리는 마누라 뒷꼭대기에 대고 미운 눈화살을 쏘았다.
비록 형식이야 꾸루와이가 집으로 절룩거리며 찾아와 댓돌 아래에서 허리 굽혀 사과하고 마을사람들은 담 너머로 구경하는 것으로 겨우 체면치레는 했다고 하나 사과하던 꾸루와이의 얼굴표정이나 사건 전후 속사정을 아는 태섭은 도대체 얼굴을 들고 나다니기가 어려워 며칠째 방안에만 있었던 참이었다.
대충 옷을 걸치고 헛기침으로 자기의 접근을 알린 다음 안방문을 열고 들어서서 마누라의 얼굴을 비껴 자리를 잡았다. 마누라는 부엌을 등진 정중앙 아랫목에 항상 앉는데 매번 안방에 들어설 때마다 느끼는 묘한 감정을 태섭은 오늘도 느낀다.
그래도 자기가 종손이고 이 집안의 어른인데 이놈의 마누라는 하늘같은 서방이 들어와도 최고 상좌라 할 수 있는 안방자리에서 자기 엉덩이를 떼는 법이 없으니 늘 어디에 앉으면 체면에 흠이 나지 않을까 하고 고민 아닌 고민을 하는 태섭이다.
들어오는 서방도 본 체 만 체 손에 든 무슨 책자를 뒤적거리는 마누라에게 태섭이 먼저 묻는다.
-무슨 일인데 할 일이라니?-
무언가 깨알같이 적힌 책자를 이리저리 넘기던 마누라는 비록 찰라 같은 뜸이지만 약간의 틈을 둔 뒤 대답을 한다. 상대를 제압하는 그녀만의 특기였다.
-한식청명이 며칠 남지도 않았는데, 어째 당신은 종묘나 사당에 발걸음도 하지 않습니까? 요새 우리 집안이 어수선한 건 알겠지만 이럴수록 종친들이나 마을사람들한테 입에 오를 일을 만들지 말고 종손이 솔선수범해야 할 것 아닙니까?-
태섭이 할 말이 없다. 사실 절기도 종종 놓치고 챙겨야할 제사며 집안 대소사를 늘 마누라가 주선하니 버릇이 된 양 무신경하게 사는 자신이다.
-제가 며칠 전에 사당에 가보니 겨울동안 생긴 손볼 일이 많습디다. 기왓장도 벗겨지도 사당 뒷전에는 처마 한 군데가 주저앉았습디다. 아마 눈이 많이 와서 썩은 서까래가 감당을 못한 모양이고. 종묘도 뗏장 입혀야 할 곳이 여기저기고. 그래서 오늘 당신은 문경에 있는 지목수를 찾아 우선 사당을 손보게 하시고 마을사람들 몇이 종묘를 둘러보게 하세요. 그냥 놔두면 한식에 종친들이 뭐라 하시겠소?-
태식은 여전히 할 말이 없다. 마누라의 말속에는 여러 가지가 녹아있기 때문이다.
태어나길 종손으로 나서 지금의 자리라도 지키고 돈푼이라도 아쉽지 않게 쓰고 다니지 무엇 하나 자기 손이나 노력으로 이룬 것이 없는 태섭이다. 잔잔히 들리는 종친들의 웅성거리는 불만과 지금 지키고 있는 태봉 들판의 경작권에 대한 뒷담, 무엇보다도 아직 자식 하나 두지 못하고 집안을 갖추지 못해 엉성한 느낌 속에서 살던 차 이번에 벌어진 꾸루와이의 일이 장차 있을 종친회에서 필시 말거리로 등장할 것을 염려하는 마누라의 사전대책이니 자신으로서는 아무 할 말이 없을 뿐이다.
-안 그래도 나도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소. 태광이 땜에 속이 상해서 그랬지-
다시 헛기침으로 어색함을 녹이고 일어서는데 마누라는 더 보탠다.
-사당 수리가 끝나면 지목수한테 뒤에 별채를 수리할 거라 하고 좀 데리고 오세요-
-뒤에 별채를 수리해? 아니 그 집은 집이라고도 할 것이 아닌데 수리해서 뭐하시게?-
한창 집안이 성했던 한 시절에 집안의 하인들이며 일꾼들이 살았던 담 너머 있는 무너지기 직전의 집이다. 손보지 않고 사람도 살지 않은 지 수십 년이니 하늘이 훤히 보일 만큼 지붕은 날아가고 흙벽이 무너져 겨우 나무기둥 몇 개만 남은 집을 이고 있을 뿐 별채라는 말과는 영 거리가 먼 흉가나 다름없는 집이다.
-그건 다음에 얘기하기로 하시고 어서 다녀오시구려!-
손에 들고 있던 책자를 문갑 속에 집어넣으며 마누라가 눈도 주지 않고 말끝을 맺자 태섭도 그냥 나와서 길을 나서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