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받이로 딸년 보냈다고…”

김담의 연재소설 <소향전> 15화

김담 | 기사입력 2013/09/27 [11:46]

“씨받이로 딸년 보냈다고…”

김담의 연재소설 <소향전> 15화

김담 | 입력 : 2013/09/27 [11:46]

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대포아지매가 떠난 점방 안은 친숙하게 느껴진다. 물동이며 성냥갑이며 대접에 주전자까지 여기저기 널려있는 장물들이 먼 길을 다녀온 자신을 반기듯 정답기까지 하다.


비록 막걸리에 국밥장사를 할지언정 대포아지매는 세상의 물정을 온정으로 품을 줄 아는 인정 많은 아지매다. 지난 몇 달간 그나마 대포아지매가 아니었으면 기댈 곳 하나 없는 소향네로서는 살림 형편을 떠나 어디 마음 한 곳 붙일 수 없었을 것이었고 지서 앞에서 엄마가 쓰러져 있을 때도 대포아지매가 그 넓은 품으로 자기 모녀를 품었던 것이다.


고마운 아지매라고 소향은 생각한다.
어쩌면 이 대폿집 옆이나 근처에 엄마가 할 수 있는 점방을 구하면 한결 마음도 놓이리라고 소향은 생각하며 입을 다물고 어금니를 문다.


문득 무슨 생각이나 난 듯 주머니를 뒤져보며 분주히 남은 지전이 몇 푼이나 되나 살피고 나서 소향은 황급히 문을 열고 나선다. 동생들에게 줄 먹을거리라도 살 요량이다. 아지매하고 엄마가 오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남았으리라 생각하고 제법 어두워진 장터거리를 지나 끝자락에 있는 잡화점에 들어가서 센배이 한 보따리와 막내 향숙이가 특히 좋아하는 오다마 한 봉지를 사고 보니 수중에 남은 것은 잔돈 몇 푼뿐이다.


들고 갈 것은 없다 해도 그래도 가게를 비워두고 그냥 나온 것이 마음에 쓰여 걸음을 재촉하여 돌아와 앉아서 엄마는 무어라 할 것이며 또 자신은 엄마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하고 생각해보지만 아무 말거리도 떠오르지 않고 굳어지는 것은 가야 한다는 마음뿐이다.


남폿불도 켜지 않은 점방 안은 이제 완연히 적막한 어둠뿐이고 아직 잠들지 않은 몇 마리 갈매기 소리가 끼럭거릴 뿐인데 먼발치에서 사람소리가 들리고 이어 열리는 문으로 대포아지매가 앞서고 뒤에 엄마도 들어온다.


-야는 불도 안 키고 있나?-
대포아지매는 탁자에 놓인 성냥갑을 들어 불을 긋고 심지에 당긴다.


비로소 우두커니 서있는 엄마의 모습이 소향의 눈에 들어온다. 말없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엄마. 울지도 않고 화난 얼굴도 아니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절망의 눈도 아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선가 본 듯한 그런 엄마의 눈이다. 그래! 바로 엄마의 그 표정이다. 언젠가 동생들이 마당에서 놀다가 종락이가 던진 돌맹이가 장독대로 날아들고 그것이 간장독을 깼을 때 엄마의 황급하고 난감하고 애달던 모습이다. 지금 엄마가 자기를 그런 눈으로 보고 서있다.


-앉아라 엄마야-
소향이 적막을 깬다.


-그래 앉거라 소향아. 내가 말했듯이 세상일은 세상 이치대로 간데이. 우리는 용써도 다 팔자대로 가는 기라. 앉아서 소향이 얘기나 들어보재이-
대포아지매의 말에 소향어미도 소향이 옆에 앉는다.


-니, 보살하고 같이 갔다 왔제?-
짤막하게 묻는 엄마다.
-엄마야. 내 말 들어보래이-
다시 잠시 생각에 잠기던 소향이 말을 잇는다.


-엄마하고 내하고 일 댕기면 우리 살 수 있나? 아부지 돌아가시고 나서 이제 삼천포서 대포아지매 말고 누가 일 시키주노? 그라고 운제꺼정 엄마가 대처로 장사 댕길낀데? 또 동생들 공부도 시키야 되고. 우째야 되노? 무조건 보살님한테 화만 낼끼 아이고. 내도 생각해 봤는데. 고만 보살님 말대로 내 할끼다. 엄마야도 내 하자는 대로 고만 하재이.-
끝말을 마치고는 옆에 앉은 엄마에게 몸을 돌리는 소향이다.


-아이구, 이 일을 우짜꼬. 우사시럽게 남의 집에 씨받이로 딸년 보냈다고 동네서 뭐라 칼끼고?-
소향어미는 그제야 눈을 크게 뜨고 다그친다.


-엄마야!-
날카롭게 엄마를 부르며 소향이 엄마의 손을 잡는다.
대포아지매는 아무 말 없이 맞은편 걸상에 앉아 두 모녀를 보고 있다.


-엄마야. 우사한다꼬? 우리는 벌써 그거 다했데이. 동네? 우리한테 동네가 오데 있노? 씨받이가 아이고 끝순이 언니맨치로 시집가서 장날 장사 하루 나오민 더 낫나? 안 그러면 가 동생맨치로 서울 가서 돈 번다꼬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리게 돌아댕기는기 나을까? 여서는 우리 힘이 아이면 몬산데이. 우사고 동네고 다 소용 없는기라 엄마야. 엄마 머리에 아무리 무거운 보따리가 있어도 우리 아이몬 아무도 안 내라준데이. 종락이가 커도록은 내도 엄마하고 같이 돈을 벌어야 할낀데. 함씨네 같이 줄 돈도 안주는 데가 여 아이가? 케서 내 이번에 엄마한테 점방 하나 채리줄끼다. 대처로 댕기지 말고 동생들도 키우민서 아지매 옆에서 장사하고 있거래이. 내 꼭 돌아와서 엄마하고 같이 장사하민서 살끼다.!-


맞은편에 앉은 대포아지매가 일어서서 소향어미의 곁에 조용히 앉으며 소향어미의 손을 꼭 잡으며 입을 연다.
-소향아. 니 맘은 내도 안다. 알재. 케도 소향이 말을 듣고 보이 또 달리 생각도 든데이. 자가 반품 팔던 아가 아이네. 철이 들어도 아주 단데이 들었다 아이가? 장사고 점방이고 문제가 아이고 자가 죽은 아바이 대신에 집안 생각하고 동생들 생각하는기 참 기특다-


소향어미는 울지도 않으면서 그저 아무 말이 없다.
그렇다. 그랬었다. 빨갱이가 뭔지는 몰라도 그 이름이 난 후로는 동네사람들 뿐만 아니라 삼천포 안에서는 모두 자기들을 무슨 벌레 취급하듯 피해 다니지 않는가? 서너번 대구로 건어물을 이고 다녔지만 안 해본 장사라 겨우 몇 푼 남기고 말았고 안 하자니 당장 다섯 입을 감당할 일이 없고 하자니 또한 자신도 서지 않는 입장 아닌가? 엊그제 배 아파 낳은 딸년이 언제 저리 컸는지. 남의 집에 씨를 받아주러 가겠다고. 그리고 그 돈으로 집안을 돌보겠다고.

다시 죽은 서방 생각이 간절히 나는 소향어미다.

-아지매. 우리 집에 갈랍니다. 고맙심데이. 아지매요-
소향어미가 일어서며 말한다.
-갈라꼬? 여서 내캉 저녁 묵고 가래이. 내도 아직 저녁 전이다-
-아이라예, 아아들만 놔놓고 와서 가야지예. 소향아 가자-
소향어미의 재촉에 소향도 과자 보따리를 챙겨 들고 나선다.
-아지매, 낼이 장이지예? 지가 오께예-
소향이 등 뒤로 말하자
-너그 엄마도 와야댄데이. 요새는 날이 좋아서 장이 어벱 큰기라. 바쁠끼다-
대포아지매가 문간에서 둘을 배웅하며 대답한다.


어둡긴 해도 돌맹이 뿌리까지 훤히 꿰고 있는 길이라 둘은 불편 없이 성큼성큼 걸으며 덕호로 올라간다. 둘 다 말이 없다. 세상의 요동에 지친 소향어미도 소향의 말마따나 우사고 남의 이목이고 간에 지금으로서는 소향의 말에 그저 끌려가고 있다. 그것이 어미로서 부끄러워 할 말이 없다.


-엄마야. 내 오래 안 있고 올끼다. 일 년 아이몬 이 년일끼다. 동생들한테는 아무 말 하지 말거래이. 내가 숙향이한테도 식모 살러 간다고만 할란다-
여전히 소향어미는 말이 없다. 밤길에 발자국 소리만 서벅거리고 거북바위 아래로 철썩거리는 바닷물소리만 요란하다.


 
꽤 넓은 들판에 못자리를 만들랴 소를 몰고 밭갈이나 논갈이를 하고 아낙들은 봄나물 거두고 남정네들 먹을 밥 나르기가 바쁜 봄이다.


멀리 아지랑이가 가물거리고 곰배가 휘둘려지는 논자락 끝에는 하얀 흙먼지가 풀썩거린다.
이곳 이안 함창 태봉지역은 충청도 속리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멀리 문경과 새재에서 내려오는 물 때문에 넓은 들은 물 걱정 없이 농사를 후하게 짓는 곳이다. 볕이 강한 오후나절에는 뻐꾸기소리가 유난히 가까이 들린다. 동네가 위치한 곳이 바로 야산을 뒤로 하고 있기에 꿩도 푸드득거리고 가끔은 노루도 동네에 내려오기도 한다.


-여보. 여태 비워두고 이제는 넘어가기 직전인 별채는 뭐 땜에 돈 들여서 고친다고 하능교?-
태섭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그라고 요새 손이란 손은 다 들로 밭으로 나가있는데……. 오데 가서 일꾼을 구한다 말인교?-
-그래서 며칠 전에 사당 수리하실 때 지목수 보고 별채일도 부탁하라고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봄이니 일하기도 수월할 것이고. 그래도 기와를 이고 있어서 속에 든 목재는 든든할 겁니다. 그저 벽이나 손보고 부엌이며 구들이나 다시 들이면 한 살림은 충분히 살 수 있을겁니다-
부부는 파릇파릇 잡초가 송송히 솟은 별채 마당에서 허물어진 별채를 보며 서있다.


-한살림? 아니 누굴 한 살림 채려준다는 거요?-
의아한 듯 태섭이 묻는다.


-동서를 살림을 내줘야하겠습니다. 지난번 노병구 때문에 서방님하고 동서가 살림을 났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고 또 이제는 분가를 할 때도 됐습니다. 영감도 스무 마지기 논을 따로 서방님한테 돌리도록 하세요. 그리고 이제는 영감도 집안일에 서방님 대신에 직접 신경도 써야겠구요-
눈이 왕방울같이 커진 태섭이다.


-아니? 부인. 여태 잘살고 집안 살림도 제수씨가 다 알아서 하고 태광이는 장차 광수가 크면 저절로 장손이 될 것이라 다 제 일같이 하고 있는데. 갑자기 땅에다가 분가라니요?-
큰소리는 아니지만 모처럼 목청을 키워서 따져본다. 태섭으로서는 자기 보고 집안일에 신경 쓰라는 마누라의 말부터 거슬린다. 삽자루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살아왔고 논둑길도 제대로 걸어보지 않았는데 갑자기 들판으로 내몰려는 마누라의 의중이 자못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영감의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여전히 태연한 자세로 대청을 기웃거리고 걸음을 옮겨 이곳저곳을 훑어보는 마누라는 마치 결론이 난 어조로 답한다.
-지목수 보고 낼 좀 오라고 하세요. 일하는 김에 소우리 옆에 있는 방구들도 다시 놔야 할 겁니다. 그 방은 불을 안넣은 지 하도 오래돼서 보나 안보나 속이 무너졌을 겁니다-
말을 마치고는 옆에서 머뭇거리는 영감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냥 발걸음을 돌린다.


태섭도 마누라의 뒤를 따라 두 집을 나눈 담을 돌아서 집으로 가면서 불편한 심기로 다시 묻는다.
-아니 여보 마누라. 금방 태광이를 분가시킨다하고서 또 그 밑에 방을 새로 고친다고하고. 도대체 빈방 두 개를 둬서 누굴 묵힐 참이요? 그라고 내는 농사일 못하는 거 당신도 잘 알낀데. 와카요? 갑자기?-
담을 돌아서 두 사람은 금방 솟을대문을 들어섰다.


돌계단을 올라서기 전에 큰아지매는 조용히 돌아서서 태섭을 보며 입을 연다.
-영감. 당신도 이제 종손노릇 제대로 하셔야지요. 만일 영감이 종친회의에서 종손에서 밀려나기라도 한다면 지금 부치던 종토는 다 남의 땅이 됩니다. 나도 들었습니다. 지난번 종친회의에서 태우가 들어서 환란을 일으키고 말썽을 피웠다고. 물론 핏줄로야 종손은 하나뿐인 영감이지만, 요즘 시대가 시대인지라 회의에 투표한다면 그걸 누가 막겠습니까?-
-집안에 어른들이 감히 첩의 자식을 종손으로 만들겠소? 그런 걸랑 아예 걱정도 마시구려, 마누라는-
태섭이 미간을 찌푸리며 답한다.


태우라는 자는 따지면 태섭의 배다른 형제지만 그의 어미가 첩으로 들어온 기생출신이라 태섭의 아비가 죽은 후에도 제대로 재산 쪼가리 하나 받지 못한 채 이십 리길 밖에 있는 척동리에 살고 있다. 그런 그가 여간한 권모술수꾼이 아니다. 함녕김씨 종친 중에 갓 쓰고 헛기침 깨나한다는 늙은이들을 모두 찾아가며 지극정성으로 대접하고 태섭의 나른한 종친운영에 불만을 만들어서 선동하기를 수년째다. 해방 전이라면 감히 꿈도 못꿀 일이지만 자유네 회의네 투표네 하는 신식바람이 부는 것을 십분 활용하는 태우는 지난번 회의에서 비록 지기는 했지만 일단은 있을 수 없는 일을 만드는 것까지는 성공했던 것이다.


그 일이 밖으로 새어나가고 종손으로서 태섭은 심한 모멸감도 느꼈지만 자신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그 일을 입에 담은 적이 없는데 오늘 다른 사람도 아닌 마누라한테 그 소릴 들은 것이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태섭이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해가는 태섭이다.


안방으로 치마꼬리가 흘러 들어가 버린 후 태섭은 한참이나 댓돌 밑에서 씩씩거리고 서있는데 아래채 문이 열리고 태광이 삐꿈이 고개를 내뽑아 나직이 부른다.
-행님. 좀 들어오시지요-


그럭저럭 허벅지 상처는 다 아물어가지만 여전히 등구들 지고 누워있는 태광이다. 방구석에 박혀있자니 젊은 몸이 여간 쑤시는 것도 아니지만 이참에 분가하고 땅마지기라도 얻어내보자는 마누라의 용심을 못이기는 척 덩달아 맞추고 있는 중이다. 어디를 갔는지 마누라도 없고 마땅히 할 일도 없는 오후나절인데 조용하던 집안에 문종이 한 장 사이로 두런거리는 소리를 듣고 귀를 세워 숨소리를 죽여가며 태섭이 내외의 얘기를 들은 태광은 형수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혼자 있는 형님을 부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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