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지에서 나타난 장서방

김담의 연재소설 <소향전> 17화

김담 | 기사입력 2013/10/11 [12:47]

외지에서 나타난 장서방

김담의 연재소설 <소향전> 17화

김담 | 입력 : 2013/10/11 [12:47]

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이튿날 아침에 건넌방에서 태섭이와 아침을 먹은 태광은 아래채 소 우리 옆에 붙은 방문을 열어젖히고 잔뜩 쌓인 잡동사니들을 쳐다본다.


칸이 세 개로 만들어진 아래채는 소 우리가 제일 아래에 있고 그 위로 방이 두 개인데 제일 위의 방을 태광이 신혼 때부터 써 왔고 그 옆의 방은 머슴이 나간 후로는 그저 물건이나 나락가마니를 쌓아놓는 곳으로 변해버렸는데 아침밥상에서 태섭이가 동생 보고 그 방을 비우고 오늘 지목수가 오면 구들도 보고 쓸 수 있게 손볼 거라고 했다.


무엇보다 담 너머 별채를 수리해서 자기들 내외를 분가시킬 것이라는 형수의 계획도 듣고 논도 태봉 서쪽에 있는 스무 마지기를 떼준다는 말도 들었다. 땅은 마음에 드는 물길 좋은 곳이라 흡족하고 천석꾼 집안의 동생한테 준다는 스무 마지기라 조금 적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누라한테 이미 말했듯이 그저 주는 대로 받아 나가고 나중에 어차피 아들이 커서 종손자리를 이어받으면 힘 안들이고 다 우리 땅이 될 것이라는 계산에 별로 마음이 안 쓰이지만 집이 영 성에 안 찬다. 하필이면 바로 옆집이란 말인가? 좀 뚝 떨어져 살면 나 몰라라 하고 내일만 할 수 있겠건만 바로 옆이라니 밥그릇만 따로 차리지 삽자루는 여전히 이 집의 것을 쓸 수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에 흥이 안 난다. 아니 어쩌면 잠만 다른 집에서 자지 밥그릇도 한 부엌에서 차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방문을 열어젖혀둔 채 아침설거지에 분주한 마누라를 찾아 부엌으로 간다.


-광수야-
나직이 부른다. 가마솥을 걸레질 하던 마누라가 고개를 돌려보고
-와요?-
-니 좀 들어온나-
여전히 낮은 목소리다. 조용한 음성에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작은댁이 이미 방안으로 들어간 서방을 따라 아래채 방으로 들어선다.


-와요? 뭔데?-
손에 물기 가득한 것을 치마폭으로 닦아대며 묻는다.


-아침 무울 때 행님이 카더라. 저 옆에 있는 별채를 손봐서 우리한테 내준다꼬-
심통한 얼굴로 담배를 말아올리는 손만 쳐다보면서 말을 던진다. 작은댁은 아무 말이 없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아당기도록 그저 자기얼굴만 보고 있는 마누라다. 무슨 일에나 들썩거리기 일쑤인 마눌인데. 처음 나는 살림집 얘기를 듣고도 묵묵부답이다. 이상해서 고개를 빼고 마누라의 눈을 들여다보는 시늉을 한다.


-니 와 말이 없노?-
작은댁은 알량한 머릿속에서 열심히 생각 중이다. 생각이야 뚝 떨어져 눈치 안보고 산다면 동서 시집살이를 벗어나겠지만. 그래도 나중에 이집 재산이 다 광수 것이 될 것인데. 차라리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확실할 것이라는 생각에 미친다. 작은댁은 마음을 다잡은 듯 입을 다신 후 눈을 야무지게 뜨고
-보소, 광수아부지예. 그기 낫습니더. 이 집에 돌아가는기 다 우리가 알아야 되는 긴데 우리가 멀리 살민사 그기 그리 됩니꺼? 다 광수 몫인데 우리가 옆에서 지키야 됩니더. 그라고, 그래도 기와집입니더. 암말하지 말고 그리 하입시더-


태광이 물끄러미 마누라를 본다. 오늘 따라 이놈의 마누라가 왜 이리 영리해 보이는지. 자기가 미처 생각지 못한 구석까지 짚어서 일을 해석하는 마누라가 신통해보이고 그저 잠시 심통했던 자신이 우습다.


-니 참 이뿌네 오늘!-
너털웃음을 지으며 안하던 말까지 덧붙여 내뱉으니 마눌이 눈꼬리를 귀엽게 옆으로 째며
-이 양반이……. 아침을 잘못 무것나-
하고 말은 하지만 입은 여지없이 벌건 잇몸을 드러내며 한껏 벌어진다. 없던 정이라도 솟을 지경이다.


-내는 옆방을 치워야 된다. 저걸 다 오데 놓노? 많은데-
담배를 재떨이에 끄면서 태광이 말한다.
-옆방은 와예?-
뜬금없다는 눈치다.


-오늘 지목수가 와서 별채를 수리할 모양인데 옆 방구들도 손보게 할끼란다. 행님 말씀이-
-광수 아부지예. 당신은 그저 행님이 하자는 대로만 하이소. 그라고 무신 일이든지 꼭 지한테 말하고예. 내도 다 생각이 있읍니더-
하고는 입을 굳게 다문다. 딴살림을 나게 된 작은댁은 비로소 머릿속에 딴 세상이 생긴 것이다. 자기들만의 세상. 그동안 그리도 벼려왔던 그 세상. 뜻대로 할 수 있을 그 세상. 갑자기 사지에 힘이 불끈불끈 솟는 세상이 도래할 터라 이제는 서방한테도 자기에게 상의하라는 말까지 한다.


-니한테 말을 해? 생각이 있어? 니 참 웃낀다. 니 생각이 몬데?-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음을 지으며 태광이 마눌을 놀린다.
-내는 정기 치워야 됩니더. 그저 내 말대로만 하소. 당신은-
하고는 얄짤없다는 표정으로 서방의 비아냥에는 대꾸도 없이 나가버린다.


남들은 목숨 걸고 하는 재산싸움인데 태광이네는 논 스무 마지기가 그들의 대화에 등장조차하지 않는다. 광수를 앞세운 둘만의 달콤한 생각에 헛배만 잔뜩 불러있으니 그깟 스무 마지기가 대수인가?


먼지를 날리며 태광이 가마니를 들어내고 자루를 옮기고 아랫방을 치우는 동안 작은댁은 부엌일을 마쳤는지 치마를 잡고 대청 앞에서 안방에 대고 한마디 한다.
-행님요. 지 좀 들어가도 됩니꺼?-


금방 문이 열리고 앉은 채로 큰댁이 얼굴을 내민다.
-들어오게. 난 장롱정리를 하던 중일세. 날씨가 더워지니 봄옷이나 여름옷이나 챙기느라-
아랫방을 치우던 태광이 눈을 힐끗 안채로 보며 속으로 저 놈의 마누라가 뭐 하러 저 방엘 가나 하고 미덥지 못한 듯 느끼는데 닫아버리는 안방문 사이에 마눌의 검정 치마꼬리가 끼어져있다.

 

아침에 광수아바이가 카데예. 우리가 별채로 갈 끼라고-
평소와는 다르게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작은댁이다.
그것이 우스운 듯 큰댁은 입에 미소를 띄우며
-왜? 자네 딴살림 나기를 바랬는데, 싫은가?-
하면서 정리하던 옷가지를 챙긴다.


-언지예! 바로 옆이라서 행님 일도 거들 수 있고. 좋아서 카지예!-
하면서 손을 젓는다.
-그래도 그 별채가 조금만 손보면 쓸 만해. 아래채 단칸방보다는 훨씬 나을 걸세-
-와 아입니꺼! 지는 기와집이라서 더 좋습니더. 지붕 이을 일도 없을 끼고-
헤벌레 웃는 작은댁이다.


-그란데예. 우리 묵고 살 땅은 얼매나 내 주실 겁니꺼?-
아주 겸손한 말투로 묻는다. 엉뚱하다는 듯 큰댁이 옷을 만지던 손을 멈추고 돌아보며
-응? 그 얘기는 못 들었나? 영감이 아주버님한테 이미 말했을 터인데. 스무 마지기 내주실 거라네-
자기가 결정해놓고는 영감이 내준다고 한다.


잠시 계산을 해보던 작은댁은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예. 고맙심더, 행님요. 케도 밭이 좀 있어야 안 되겠십니꺼? 논이야 논이지 밭하고는 또 안 다름니꺼! 밭도 좀 주이소 행님요. 뒷산 삐알에 있는 거 그거만 주시민 지는 됩니더-
대답도 않고 장롱 속만 이리저리 뒤지는 큰댁도 생각해보니 고추며 깨며 밭에서 거둘 것들이 따로 있는데 덜렁 논만 떼어준 것이 미흡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 자네 말이 맞네 그려. 영감한테 내 그리 해보라고 하지. 그리고 오늘 지목수가 오면 일을 시작할 터이니 자네는 끼니 챙겨 내주고 아주버님도 다리 때문에 큰일은 못하더라도 내 집이다 하고 옆에서 도울 일이 있으면 도우라고 해-
-그라모예. 지가 다 알아서 할 낍니더. 걱정 안하시도 됩니더-


통통 튀는 목소리로 대답한 작은댁은 기분 좋게 안방을 나선다. 친정 살림살이를 생각해보면 스무 마지기에 산비탈에 비스듬히 놓인 밭까지, 배가 불러오는 작은댁이다.

점심 전에 지목수가 오고 소 우리 옆방은 굴뚝이나 한번 뚫어주면 될 거라는 말로 넘어갔지만 별채를 둘러보고는 제법 일거리가 많을 거라 일손도 하나 달고 올 거라 하고 떠났다. 가급적 서둘러서 살 만하게 만들어 보라고 당부하는 큰댁 옆에서 광수 내외는 그저 좋은 웃음을 참느라 속으로 애쓰며 서성거렸다.


이튿날 일찍 연장을 가득 실은 소달구지를 타고 두 사람이 왔다. 지목수와 함께 온 사람은 번듯하게 생긴 중년의 남자였다. 기골도 장대하고 얼굴도 반듯이 생긴 것이 잡일하는 사람 같지는 않게 생겼고 말수도 없이 그저 목수가 시키는 일만 꾀부리지 않고 느긋느긋하게 하는 장씨라는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허물어진 벽을 세우기 전에 속살을 대야 하기에 물푸레나무를 구하고 엮고 다시 싸리나무를 옹기종기 덧대고 나서 황토를 덧칠해서 두껍게 몇 겹을 칠했다. 험하고 힘이 드는 일은 주로 장씨가 하지만 마감하는 섬세한 일은 어김없이 지목수의 손이 나서야 각질 곳은 각져서 반듯하고 둥근 곳은 정확히 둥글어서 어우러진다.


담 너머 부엌에서는 작은댁이 지극 정성으로 밥을 해 나르고 태광은 하루 종일 작대기를 짚고 서성대며 담배를 권하거나 피우며 조심스럽게 일에 관여한다. 목수도 목수 나름이지만 인근에서는 그래도 지목수를 제일로 쳐주는지라 그저 비위 상하지 않게 무사히 자기집 일을 마치게 할 요량이지만 그러면서도 같이 온 장씨한테는 이것저것 시키면서 집주인 노릇 연습을 미리 하는 듯 하는데 도대체 이 장씨라는 사람이 말을 들어먹질 않는다.


힐끗 쳐다보면서 대답이라고 하는 게 고작 목수한테 물어보시오 하는 정도다. 나는 목수가 부리는 사람이니 날 부리려면 목수한테 허락 받으시오 하는 태도다.


하루에 한두 번씩 큰댁도 발걸음을 하고 그때마다 지목수는 광수 내외에게는 하지도 않는 경과를 일일이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 큰댁이 무심히 일하는 장씨를 보고는 그 면모가 목수 따라다니는 사람으로서는 뭔가 다르다고 생각하고 하루는 오후 새참을 먹는 자리에서 지목수에게 건네 물었다.


그는 인근에서 온 사람이 아니었다. 고향이 어딘지도 모르지만 말씨로 봐서는 그저 서울이나 경기도쯤으로 짐작만 될뿐, 지목수도 일이 없던 지난 겨울에 문경의 봉명광산에 품 팔러 일하면서 만났다는 것이다. 나이도 그저 마흔을 넘긴 정도라는 것뿐, 뭘 하던 사람인지 어떻게 이곳으로 오게 됐는지 지목수도 잘 모른다는 것이다. 광산 일이란 게 막장에서 묻힐 수 있는 험한 일이기에 목수가 자기 일을 돕고 배워보라고 권해서 따라나섰는데 사람이 진득하고 믿을 만하다는 게 지목수의 설명이었다.


봄볕에서 하는 일은 모든 게 순항이다. 적당히 잘 마르고 해가 길어 일도 진행이 빠르고 춥지도 덥지도 않으니 몸이 지치는 법도 없다. 필요한 자재는 그래도 태광이 자청하여 소달구지를 몰고 왕래하니 조달이 빠르고 일의 머리와 끝을 미리 짐작하는 지목수의 재간은 한 파수 정도가 흐른 시간에 이미 집의 틀이 반듯이 잡히고 제법 귀태도 자아냈다. 까만 기와가 햇볕 아래서 빛나고 미장으로 마감된 황토벽은 기둥이며 문이나 서까래의 나무가 지닌 연륜과 함께 아주 우아하게 조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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