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갑자기 돈 보따리가 치마 위에 올라앉자 당황한 대포아지매는 큰아지매와 소향을 번갈아 보며
-오이야, 내 그리 하꾸마. 니는 그저… 아지매 말씸대로… 잘 듣고… 몸이 성해야 된데이. 야를, 그저 잘 돌봐 주이소, 아즉 아 아입니꺼? 지가 디릴 말씸이 없심더-
두서가 없는 말이다. 당연히 무슨 할 말이 준비되었을 리 없다. 그저 소향에미를 대신해서 어디서 살며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나 보러왔고 소향이 주는 돈을 삼천포까지 운반하는 것이 자기의 일인데 막상 큰아지매 앞에서 소향에미를 대신이라도 해야 할양이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딸 팔아먹고 돈 챙겨서 감사하다고 할 수는 없고, 씨 못 내려 돈으로 남의 딸년 아랫도리 살려 하느냐고 나무랄 수도 없고, 돈을 보고 소향을 보고 다시 큰아지매를 보고 대포 아지매는 그저 어색하고 난감하다.
눈치 빠른 큰아지매가 들어선다.
-아지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복이 없어 후손이 없는 터라 종손의 예를 지키고자 하는 일입니다. 하늘이 도와 보살님이 말씀하신 대로 소향이 아들을 놓으면 몸 푸는 대로 집으로 갈 겁니다. 집안일을 시키고자 오라 한 것도 아니고 아이를 키우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 염려하지 마시고 먼 길 가시면서 수중에 돈이나 잘 챙기시도록 하세요-
어느새 눈물을 훔치는 대포아지매와는 달리 소향은 도무지 아무런 표정이 없다. 그저 고개를 모로 돌려 문앞에 걸린 대나무발에 그려진 봉황을 보고 있을 뿐.
어느새 늦게 들이닥친 여름밤이다. 깜깜해지는 방안을 핑계 삼아 큰아지매가 일어서며
-남폿불을 켜야겠네요. 소향아, 너도 내가 남포 하나 줄 테니 들고 아래채로 가거라-
세 여자가 일어서서 마루로 우루루 나오는 참에 건넌방에서도 방문이 열리고 남자들이 나온다.
예기치 않게 맞닥뜨린 터라 대포아지매는 육중한 몸을 마루 한편으로 거두며 손으로는 또 소향을 잡아끈다.
-아니 벌써 일어서십니까? 말씀들은 다 나누셨나요?-
-예, 마님. 영감님한테서 말씸 다 들었고 화채도 잘 묵었심더. 마님-
지목수가 꾸뻑거리며 댓돌로 내려서고 그 뒤를 따라 장씨도 마당으로 내려가지만 인사도 말도 없고 누구도 관심 없다는 듯 쳐다도 보지 않는다.
태섭이 마루 끝에 서서 한마디 건넨다.
-그럼 장씨는 낼 샘 치우는데 좀 거들고 지목수는 바로 시작하시오-
-예, 그럼 낼 뵙시더-
벌써 대문을 나서는 장씨를 따라 지목수가 나서며 말을 남긴다.
모두 마루 끝에 서있다. 소향의 손을 잡은 대포아지매는 저자가 영감이구나 하고 안 보는 척 뜯어본다. 희멀꿈하게도 생겼다. 하이칼라라 하는 머리에 하얀 모시로 아래위를 입고 더운 여름인데도 대님까지 맨 걸로 보니 과연 대갓집 영감이구나 하고 생각하고 소향도 지금 이 순간에는 뭔가를 아는지 잡고 있던 대포아지매 손을 꾹 쥐어댄다.
태섭이 건넌방으로 들어가려다 뒤돌아서서 뒤에 서있는 낮선 여자들에게 인사라도 남기려는 듯 마눌을 보며 -손님을 와 밖에 서있게 하는교? 들어가지?- 하고는 여자들을 본다.
-아, 지금 아래채로 가던 중입니다. 하루 묵고 가신다 해서-
누군지 왜 왔는지에 대한 말은 아예 없다. 태섭도 마눌이 스스로 하지 않는 말은 여간해서 묻지 않는 게 습관이 된 상 그냥 한번 휙 보고는 방안으로 들어간다.
자기들을 두고 하는 말이라 대포아지매도 그냥 고개를 숙여 태섭에게 예를 표하고 소향을 잡아끌고 마루로 내려서고 끌려 내려가는 소향의 다른 한 손에는 돈 보따리가 들려있다.
마루에 서있던 큰아지매는 소향이네가 방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아직도 건넛방에서 놀고 있는 광수와 재수를 부른다.
-광수야, 재수 데리고 이제 집에 가고 낼 오너라. 큰아부지 주무셔야한다- 하고는 문을 열자 아이들이 후다닥 뛰어나오고 한 움큼 쥔 때기 조각을 흘리고 주우며 대문으로 나간다.
큰아지매는 영감 방안에 들어서서 문을 닫으며 앉기도 전에 태섭에게 묻는다.
-어쩐 일로 갑자기 샘에 지붕을 씌운다 하셨습니까?-
담배를 말던 태섭이 불을 댕기느라 고개를 기우뚱한 채 대답을 미루는 사이 큰아지매가 앉고 태섭이 날숨으로 담배 한 모금을 모로 뿜어내며 말한다.
-동네에서 그동안 얘기는 있었지만 돈이 드는 일이라 아무도 나서질 못했는데 오늘 모이서 샘 치는 일을 주고 받다보이 아무케도 우리 집에서 하는기 좋을 성싶어서 내가 지목수를 불렀소. 우리 집안이 들어서 해야지 누가 할 사람이 없잖소?-
동의를 구하듯 의향을 묻는데 말속에는 눈치 보는 심중이 다분하다. 돈 들어가는 일에는 선뜻 혼자 결정하기를 꺼리는 태섭이 오늘은 술 한잔 걸치고 마을사람들이 추켜세우는 통에 덥석 허세를 부리며 지목수를 오라 해라, 하고 말은 했지만 늦게 온 지목수를 집에 데리고 올 때까지 어쩌면 마눌이 동의를 안 해줄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심기가 불안했었다.
그런데 지목수가 있을 때 방안에서 잠깐 서두를 비추었을 때 마눌 표정이나 말투가 호의적이었던 걸 생각하며 내심 안심하고 있던 참이다.
태섭이 내뿜는 담배연기가 불편한 마누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모로 돌려 방안을 둘러본다. 평소 같으면 코가 매운 방에서 벌써 나갔을 마누라인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그냥 앉아있는 것이 태섭에게 무슨 할 말이 있음이 틀림없다.
-이왕지사 하기로 결정하셨으면 하셔야지요. 길게 보고 하세요. 지난번 문중회의에서도 그렇고 마을에도 이제는 종가다운 면모를 보여야지요. 더 이상 책 잡히거나 잡음이 나지 않도록 집안에서 우리가 미리미리 알아서 하고 당신도 종손으로서 체면을 생각해서 갖출 것은 갖추면서 살아야지요. 언제까지 그저 조상이 준 땅이나 지키면서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태섭은 재떨이에 담배를 끌려던 손을 멈추고 꼼짝도 않고 마누라가 지껄이는 알듯 모를듯한 소리를 새겨본다.
문중회의라. 그래! 그 기분 나빴던 문중회의를 말하는 것이렷다.
태우자식이 들어서 문중을 휘저어대며 자기에게 위협을 가했던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태섭을 무위도식이나 하는 허수아비 종손으로 몰아붙이며 반란을 꾀했던 일을 떠올리며 태섭은 쓴 입맛을 다신다.
그건 그렇다 치고 종손의 체면을 생각하라는 뜬금없는 주문이나 길게 보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가는 태섭이다. 손끝에 달려있던 담배를 그제야 재떨이에 비벼대며 입을 열려던 순간에 마누라가 또 말을 잇는다.
-정각을 올릴 것이면 대충하지 마시고 돈이 들더라도 우리 집안에서 하는 것답게 하세요. 덕을 쌓고 인심을 얻으려고 없는 우물도 판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물을 파는 것보다 정각 세우는 것이야 한결 쉬운 일일 테니 우리 마을에 번듯한 함령김씨 정각하나 세우는 것은 뜻이 있을 것입니다. 지목수하고 어떻게 말씀 나누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집 솟을대문만큼은 모양이나 위용을 갖추어야지요. 이왕이면 낼 지목수를 집으로 다시 오라 하시고 영감하고 저하고 같이 얘기를 나누어 보지요-
그저 눈비나 막으려고 했던 태섭은 마누라가 마치 무슨 역사나 대가를 올리는 것처럼 말하자 경비가 수월찮게 들 것이 염려된다.
-아니? 임자. 그저 비바람이나 막고 햇빛이나 막으면 될낀데. 모하로 그리 일을 크게 벌린단 말이요? 내는 임자 속을 모리겠다-
사실 집안에 돌아가는 금전적인 일에 있어서는 안주인인 마눌이 다 거머쥐고 있는 터라 태섭은 그저 속으로만 대충 짐작할 뿐 실상 정확한 사정은 어두운 것이다.
비바람막이 지붕 정도도 마눌이 허락한 것을 속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한술 더 떠서 솟을대문같이 높고 모양 있게 올리라니? 마눌의 속이 짐작이 안 되는 태섭이다.
-좀전에 말씀 드렸지요? 이제부터는 일을 길게 보고 종친들에게나 마을사람들에게 집안의 반듯한 모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되니 인심들이 사납습니다. 마을사람들 대부분이 우리농사를 짓지만 영감이 생각하기에 우리가 인심 얻고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면전에서야 말들이 없지만 지난번 종친회의에서도 보셨다시피 태우아재같은 한 사람이 들어서 되지도 않을 일을 시끄럽게 하고 또 그 말에 은근히 동조하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시기고 질투 아닙니까? 영감도 알아두어야 합니다. 종손의 일이라는 것이 그저 우리 집 담장안만 살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태섭은 할 말이 없다. 자존심도 상하고 아픈 곳을 찔린 것 같아서 불편한 심기가 솟구친다. 사실 자신이 한심하다고 생각든 지가 오래된 일이기는 하다. 종친들의 분위기 속에서도 그렇고 지난번 태광이 꾸루와이에게 당한 후에 보여준 기관장의 태도도 그렇고 더욱더 답답했던 것은 그 모든 일에 자신이 무력하게 아무것도 보여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다리를 번갈아 꼬아대며 방바닥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태섭은 입을 꾹 다물고 양미간만 강하게 좁힌다.
무슨 말이라도 하여 이 궁지를 벗어나곤 싶지만 마눌은 일어날 눈치도 아니고 답답하던 차
-그건 내가 임자말을 염두에 두고 차차 알아서 하리다. 그런데 아까 본 그 사람들은 누고? 자고 간다꼬 하던?-
큰아지매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이제는 벌어진 일. 어떻게든 꾸려나가면서 진행해야 할 판 아닌가?
-작은아이는 집에서 일도 시키고 할 겁니다. 같이 온 사람은 아이만 데려다주고 낼 갈 거구요. 동서네가 분가를 했으니 살림도 따로 살아야 되는데 아무리 식구가 적다해도 그래도 이집의 살림이 어디 적은 살림입니까? 사실 광수네가 농사를 따로 지으면 우리도 머슴이라도 들여야 되는데 그 문제는 영감이 알아서 좋은 일꾼하나 들이도록 하세요-
일단은 집안일을 하는 아이라고 둘러댔다. 그 다음은 다음이다 라고 생각한 큰아지매는 일어서며 다시 한마디 한다.
-올 가을걷이 끝나면 광수네 준다고 한 전답문서는 건네주시고 나머지 일부터는 영감이 차고 앉도록 하세요.-
아무 대답이 없는 영감을 남겨두고 큰아지매는 대청에 나서서 아래채를 바라본다. 남폿불도 꺼진 것이 먼 길에 지친 두 사람이 자는 것이 분명하다. 이제는 완연한 한밤중이 된 검은 하늘을 처마 끝을 피해 올려보며 큰아지매는 생각에 잠긴다. 과연 자기가하는 일이 잘하고 있는지. 하지만 순간 집안을 옳게 갖추어 잡음을 없애고 자신이 운신하는 폭도 넓혀야 한다고 작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