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장씨는 이런 놈들에 익숙하다. 난전에 몸을 섞으면서 겪어본 험하다고 하는 놈들은 대개 뒤가 무른 놈들이 많았다. 대부분은 지방에서 똥 깨나 뀐다는 부호들 자녀들이거나 아니면 이런저런 일로 감옥에라도 한 번쯤 다녀온 것을 마치 무슨 벼슬처럼 행세하며 활개 치는 족속들이다.
꾸루와이 역시 술기운을 빌려서 그저 땅 파먹고 사는 시골 촌부들을 괴롭히는 졸개에 지나지 않으리라는 것이 장씨의 짐작이었다. 장씨는 한발 물러선 꾸루와이에게 한 발 다가선다. 꾸루와이가 손에 쥔 삽을 올리려는 찰라 장씨는 우악스럽게 삽을 쥔 그의 한쪽 팔을 잡는다. 그리고 얼굴에 미소를 띠운다. 꾸루와이의 눈을 응시하며 팔을 잡은 손을 으스러지게 움켜잡으며 -내가 술을 한 잔 주지. 그리고 너는 내 술을 마시고 잠을 자거나 그냥 가는 거다-
귀에다 대고 소곤거리는 말이 구덩이 속에서 삽질하고 곡괭이질 하는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또 무슨 사단이 날 것이라 일손을 멈추고 시선을 집중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장씨가 꾸루와이의 팔을 붙잡고 무슨 사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장씨는 꾸루와이의 팔을 잡아끌고 술판이 벌어져있는 멍석으로 오며 큰소리로 주위의 사람들에게 들으라는 듯 말한다. -형씨가 오늘 제 입장 봐서 술이나 한잔 하시고 품 팔아먹는 불쌍한 놈 귀엽게 여겨주시오-
보기에는 장씨가 마치 꾸루와이를 부축하여 멍석으로 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움켜잡힌 꾸루와이의 한쪽 팔은 뼈라도 부러질 듯한 통증으로 옴짝달싹할 수 없고 또 다른 장씨의 한손은 꾸루와이의 목 뒤를 홑적삼과 함께 휘감아 잡아끌고 있으니 무슨 패악이라도 부려야 하는 꾸루와이는 그저 입술만 달싹거릴 뿐 거의 질질 끌려서 멍석에 짓눌려 앉혀졌다. -자, 한 잔 그득하게 드시오. 그리고 나도 한 잔 합시다- 장씨는 소반 위에 술잔을 우지끈 소리가 날 정도로 놓는데 사기그릇이 두 조각으로 쩍 갈라져버린다. 순간 장씨의 손에서 선혈이 배어나오지만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아이고. 미안합니다. 형씨, 딴 잔으로 합시다- 장씨의 눈이 냉정하게 꾸루와이의 눈을 힐긋 맞춘 후 다른 술잔에 술을 가득 채운 후 주전자를 통째로 입에 대고 들이붓는다. 입가로는 술이 뚝뚝 떨어지고 주전자를 잡은 손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진다. 꾸루와이는 앉은 채로 고개를 위로 하여 장씨의 모습을 보고 있는데 입이 반쯤 벌어져있다. -자, 이제 일 좀 해봅시다- 입가를 닦으며 장씨는 허리춤에 손을 올려서 주위를 대고 고함을 지른다.
종가의 둘째며느리를 앞세운 동네의 아낙들이 점심을 가져올 즈음 꾸루와이는 분에 못 이겨 퍼먹은 술기운으로 멍석 위에 대자로 누워 퍼지고 그의 안사람은 일꾼의 등을 빌려 그를 집으로 옮겼다. 그리고 꾸루와이는 샘가에 이튿날도 또 그 이튿날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윗마을의 샘이란 게 말이 샘이지 그저 작은 웅덩이 정도에 지나지 않는지라 그래도 수십 호는 되는 마을사람들이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바가지로 퍼 담은 물이 고이기가 바쁘게 긁어대니 거의 흙탕물이나 다름없지만 밤새 가라앉혀서 먹는 도리밖에 없다.
일꾼들이 웅성거리는 샘가를 오늘도 소향은 네댓 번쯤 지나치며 웃마을의 물을 퍼다 날랐지만 거리가 멀다보니 반은 쏟고 남은 것도 바로 먹을 수는 없는 흙물이다. -아지매. 아지매는 오데서 왔노?- 어제부터 졸졸 따라다니며 말을 붙일 듯 말 듯 하던 큰놈 광수가 궁금한 듯 묻는다. 젖은 옷도 말릴 겸 대청에 다리를 걸치고 앉은 소향은 댓돌 아래에 있는 광수를 보고 작은아지매 아이라는 것을 알았다. -니는 학교 안 가나? 하루 종일 집에만 있노?- 묻는 말에 엉뚱한 질문으로 대답한다. -방학 아이가? 아지매는 방학도 모리나?- 눈을 동그랗게 뜬 광수가 한심하다는 듯 말한다. 물끄러미 광수를 보는 소향은 종락이 생각이 간절해진다. 거의 비슷한 또래다. -니는 맺살이고?- -열살. 야는 일곱 살이고- 광수는 옆에서 역시 대청을 올려다보는 재수를 가리키며 대답한다.
소향은 고개를 들고 처마에 반쯤 가려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삼천포를 생각한다. 종락이, 엄마, 숙향이, 그리고 대포아지매. 궁금하지만 알 길이 없다. 그저 대포아지매니까 수중의 돈도 잘 전달했으리라 믿을 뿐. 언젠가 보살이 오면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 든다. -아지매, 아지매는 이제 우리하고 여서 살거나?- 정신줄을 놓고 하늘을 보던 소향이 마당에 여전히 선 채로 묻는 광수의 질문에 정신이 난 듯 고개를 돌려서 아이들을 본다. -그래. 그럴끼다. 쿤데 니는 이름이 머꼬? 니 동생은?- -광수다. 야는 재수고- -내는… 저 아래채에서 살끼다. 너거 집은 저 담너머제?- -아이다. 우리 집은 여도 우리 집이고 저도 우리 집이다. 둘 다- -오이야. 니는 집이 두 개나 돼서 좋것따-
대문이 시끌거리는 듯 하더니 광수에미가 동네 아낙들과 함께 머리에 대소쿠리를 얹고 들어온다. 아마도 점심을 치르고 오는 모양이다. -남자들이 묵었으이 인제 우리도 묵자- 소쿠리를 내리며 작은아지매가 걸걸한 목소리로 아낙들에게 말한다. 소향도 갑자기 심하게 허기가 지는 걸 느낀다. 낯선 집에서 낯선 사람들하고 먹는 끼니가 그저 불편했던 소향이 먹는 시늉만 했던 탓이라 배가 고프고 또 오늘 아침나절에 웃마을 샘터에 수행보 하느라 기운이 빠졌다. -소향아. 우리 아아들 밥 좀 챙기거라. 니도 같이 묵고. 내는 기운이 없어서 못하것다- 더위에 일꾼들 치다꺼리하는 것이 쉬울 리는 없지만 그렇다고 동네아낙들이 거드는 판에 그렇게 힘들 리도 없지만 이제 부엌데기가 있으니 이렇게 좀 시켜먹자는 심보고 또 동네 여자들한테 보란 듯이 소향을 부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광수에미다.
소향은 아무 말도 없이 아낙들이 내려놓은 소쿠리 속을 뒤져 이것저것 주섬주섬 소반에 올려서 대청으로 나가고 아낙들과 광수에미는 부엌 바닥에서 수다를 떨며 점심을 때운다. 물을 이고 오느라 오전 내내 윗마을을 들락날락하는 통에 몰랐는데 밥을 먹으며 생각해보니 큰아지매가 안 보인다. 소향은 그저 안 보이니 궁금했을 뿐 딱히 왜 안 보이거나 어디를 갔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다.
한 밥상 위에서 밥을 먹는 아이들이 부쳐놓은 전을 집어서 달아날 때의 아이들처럼 그렇게 철이 모자라거나 없지는 않다고 생각이 들만큼 제법 밥 먹는 자세가 점잖다고 느껴졌다. 흘리지도 않고 시끄럽게 떠들거나 투정도 하지 않고 먹는 모양이 동생 종락이보다도 더 낫다고 여겨졌다. -전보요- 자전거를 세우고 대문으로 들어서는 우체부가 큰 소리로 외친다. -김소향이 누굽니꺼? 주소는 김 회장님 집으로 돼있는데- 우체부의 등장도 그저 관심 밖으로 둔 소향이 밥숟가락을 입으로 옮기는 데만 열심이었는데 갑자기 들리는 자기 이름에 반쯤 입속으로 들어갔던 숟가락을 후다닥 빼내어 밥그릇 속에 찔러두고 -진데예!- 하고는 신발에 발도 꿰지 못하고 봉당으로 내려 달려간다.
머리를 달랑거리며 달려오는 소향을 우체부는 의아한 듯 본다. 그도 그럴 것이 우체부는 이집뿐만 아니라 이 마을의 대부분의 식솔들을 꿰고 있는데 처음 보는 아이가 아니 여자가 마을에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소식이었다. 우체부는 어정쩡한 태도로 접힌 전보를 건네며 -여 있다- 한 마디만 한다. 아이 취급을 해야 할지 아니면 처녀 취급을 해야 할지 어중간한 나이의 처자이니 그저 호칭 없이 전보만 내밀었다. 언제 나왔는지 작은아지매가 정기문 앞에서 우체부를 보고 큰소리로 말한다. -김주사. 들어오이소. 우리 오늘 마을행사 하니라 점심 묵고 있심더. 한 그릇 하고 가이소- 자전거를 돌려세우며 우체부는 어깨 너머로 고개만 돌려서 -아입니더. 지는 바빠서 고만 가봐야 됩니더. 집에 식구가 생겼네요- 하고는 휙 한 발로 자전거를 밀고 다른 발로는 능란하게 자전거에 올라가 버렸다. -니한테 온기가?- 손에 꼭 쥔 전보를 펴보지도 못한 소향은 남은 밥부터 먹을 요량으로 숟가락을 다시 들던 차 작은아지매가 묻는다. -예- 작은아지매는 그저 건성으로 물었을 뿐이다. -광수야. 밥 묵고 재수캉 집에 가서 방학숙제 하거래이- 입속에 남아있는 음식을 혀로 이리저리 돌려대며 작은아지매는 대청에 엉덩이를 붙이고 아이들을 보고 말한다. -엄마야, 내도 숙제하고 싶다- 작은놈 재수가 작은아지매를 보고 응석이다. -오이야, 니는 내년에 핵교 가민 신물 나게 할낀데 와카노? 소향이 니는 오후에 참 좀 내주고 오니라. 술안주만 갖다 주민 된다-
소향은 아까부터 모든 소리가 건성으로 들린다. 밥숟가락이 입으로 들락거려도 그저 머릿속에는 전보에 뭐라고 쓰여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궁금하지만 막상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 했으니 읽을 수 없다는 것이 난감하기 때문이다. 이틀 전이니 분명 잘 도착했다는 내용이 분명하리라. 아니지, 혹시라도 또 무슨 변고라도 알릴 수 있지 않을까? 갑자기 맘이 쿵쿵거린다. 숟가락을 내린 소향은 앞에 앉은 광수를 보고 -니 이거 좀 읽어봐라- 하며 전보를 내민다.
소향을 의아하게 보던 광수는 -아지매도 글 모리나? 울 엄마도 모린다. 이리도.- 두 번으로 접힌 누런색의 전보를 펼친 광수는 전보를 이리저리 모로 돌려세운 후 -잘 도착. 소향- 달랑 한마디를 한 후 광수는 전보를 소향에게 건네주고 도로 먹던 밥을 먹는다. 잘 도착이라는 말은 확실한데 다음의 소향이라는 이름은 자기의 이름인데 대포아지매가 보냈다면 대포아지매일 테고 아니면 소향에미거나 하다못해 동생이름 숙향이라 해야 할 텐데 덜렁 자기이름을 붙인 것은 또 뭐꼬? 소향은 놓인 반찬그릇을 광수와 재수 쪽으로 밀어주며 -마이 무라- 하고는 정기로 들어간다. 넋 놓고 있는 것은 차라리 바삐 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느끼는 소향이다. 더군다나 여기는 낯선 집 아닌가? -아지매요. 참은 운제 나가몬 됩니꺼?- -야는 점심 먹은 지가 운젠데 벌써 참 타령 하노?- 너덧 명의 아낙 중 하나가 부엌 바닥에 퍼질러 앉은 채로 밥을 먹다가 소향이 작은아지매한테 물은 질문에 대신 나서서 답한다. -해가 기니 천천히 가도 된다. 소향아, 니 담 너머에 가서 호박 좀 따온나. 넝쿨을 잘 들차 보민 속에도 열린 기 숨어 있니라. 오후 참은 호박전에 막걸리몬 됐는기라- 작은아지매의 말에 아낙들도 “그렇지. 그만 하몬 됐지” 하면서 수다를 늘어놓는다. 소향은 오후 햇살이 뜨겁다는 것을 느끼며 대문을 돌아서 별채와 나란히 하고 있는 돌담 위를 이리저리 살핀다.
솟을대문을 좌우로 연결한 담은 기와로 이어있는 잘 쌓은 담이지만 그 끝부분에 광수네가 산다는 별채와의 연결부분은 흙과 돌로 적당히 경계만 지어놓은 담이라 이곳에 호박을 심어 올린 것이다. 그저 작은 아이 머리통만한 호박이 제법 서너 개가 치마폭에 쌓였지만 소향의 요량에도 일꾼들이 한둘이 아니니 좀 더 따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리저리 호박순을 제쳐 속을 들여다보다가 기겁을 하고 뒤로 나자빠진다. 제법 굵은 뱀이 돌담 속으로 스스륵 사라지는 것을 본 것이다.
땅에 굴러서 호박에 돌도 박혔지만 소향은 쿵덕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치마폭에 쌓인 호막을 정기 부뚜막에 내려 놓는다. -그기 다나?- 광수에미의 말에 소향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땀을 닦는다. -뱀 때문에 이거밖에 못 땄심더- -뱀이 있더나? 하기사 한여름 아이가. 또 그가 돌무더기제. 됐다. 니는 이거나 부치라- 어제도 부쳐본 전이라 소향은 혼자 솥뚜껑을 뒤집어 눕히고 불을 피우고 밀가루를 이겨 준비를 한다.
이 기사 좋아요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
일다의 방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