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가예, 보살님 보러 가야 됩니더!”

김담의 연재소설 <소향전> 44화

김담 | 기사입력 2014/04/28 [18:14]

“지가예, 보살님 보러 가야 됩니더!”

김담의 연재소설 <소향전> 44화

김담 | 입력 : 2014/04/28 [18:14]

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아직도 줄기가 성한 고구마 넝쿨을 손으로 헤집어가며 광수에미는 땅을 뒤적거린다. 제상에 올리거나 먹을 것을 캐러 텃밭에 온 것이다. 말이 추석이지 아직 오곡이 영글라치면 족히 한 달은 더 있어야 될 텐데 늘 제상에 올릴 것도 흔치 않게 다가오는 것이 음력 추석이다.

 

-그라모… 오데… 딴년한테서 씨라도 받았다는 말인가?-

동서가 던진 말이 머릿속에서 뱅뱅 돌고 있다

“부엌에서 일 시키려 데려온 아이가 아닐세.”

-아이제…. 나이로 봐서도 그건 안 맞아들고. 그라모? 뭐꼬?-

 

소향의 나이를 생각해봐도 딴 여자한테서 본 아이는 아니다. 또 동서가 대하는 태도를 보아도 분명 시앗하는 태도는 없으니 도통 모를 일이다. 허리를 펴고 뒤돌아서 저만치 역시 영근 고구마를 찾고 있는 소향을 보다가 부른다.

-야야, 니 일로 좀 온나-

손에 고구마 몇 개를 들고 있지만 크기가 그저 그렇다. 소향이 고구마 넝쿨에 엉덩이를 반쯤 묻고 앉아 있다가 고개를 돌려 광수에미를 본다.

-와예?-

-좀 오라카이-

오라고 한 작은아지매가 오히려 소향이 쪽으로 발을 옮긴다. 고구마 줄기를 다치지 않게 발을 성큼하며 작은아지매가 소향이 쪽으로 다가간다.

-니 말이다. 우리 집에 모하러 왔나? 내 말은… 우째 오게 됐나 하는 기다-

겨우 씨알이라곤 그저 작은 아이 주먹만 하거나 아니면 어른 엄지만한 굵기가 전부인 고구마 몇 개를 손에 들고 있던 소향은 대답 대신 흙 묻은 고구마를 손으로 털어낸다.

-그건 큰아지매한테 물어보이소. 지는 말 못합니더-

-뭐라꼬? 말 못해? 야야, 니 무신 큰 비밀이라도 있나? 와 말을 못해?-

 

큰아지매가 그저 아무 말 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다 자기가 알아서 할 것이니 그때까지 맡겨두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동안 역정을 내며 하수 다루듯 하는 작은아지매가 엊그제 정기에서 큰아지매가 한 말 때문에 하는 질문이라는 것을 소향도 안다.

-비밀은 아이라예. 케도… 큰아지매가 말하기 전에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 하싯서예. 그라이 지도 말 못합니더-

 

더 궁금해지는 광수에미다. 사실 동네에서 안방 차지하고 앉아있는 동서 빼고는 아무도 자기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는데 밤톨만한 영글지도 않은 계집아이가 당돌하게 딱 잘라서 대답을 한다?

하지만 광수에미도 별 도리가 없다. 소작이라도 부쳐야 종가 둘째 며느리로서 은근히 유세를 하거나 협박을 할 테고 집안 대소사에 부엌일 시키러 불러주지 않을 것을 빌미로 큰 목소리가 통할 것이지만 지금 이 계집아이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내 니기 비밀 지키꾸마. 뭐꼬? 내기만 말해도고 응?-

허리를 반쯤 굽혀 땅을 보고 있는 소향의 눈높이로 얼굴을 맞대며 이제는 달래보는 광수에미다.

-그래도 안되예-

그리고는 소향이 돌아서서 저만치 가버린다.

어이도 없고 엉치가 막히는 기분이지만 궁금증을 해소할 길이 없다.

-니 정말로 그켔제? 안 좋을낀데…-

눈에 쌍심지가 돋아있는 광수에미는 체념하고 고구마 줄기를 확 걷어챈다.

-됐다, 고마 가자-

대소쿠리에 반쯤 담긴 고구마를 소향이 허리에 끼고 광수에미의 뒤를 따라온다.

 

-작은아지매요-

-와-

냉담한 대답이다.

-광수 보고 지한테 글 좀 갈카주라 해주이소-

글? 자기도 배운 적 없는 글? 안방에나 있는 동서야 그래도 서울내기고 무신 학교를 다녔다고 했으니 글을 안다고 하지만 촌에서 여자가 글을 왜 배워? 그 시간에 풀이나 더 매고 길쌈이나 하면 더 하지?

-글은 와 배울라 카노? 일이나 배우민 됐지-

-그냥 배아둘라꼬예-

-추석에 할 일이 태산이다. 낼 모레 아이가? 누굴 부를꼬?-

 

엉뚱한 대답이다. 아니 광수에미의 머릿속에는 동네 아낙 중에 누구를 불러서 추석 일을 할 것인지로 가득하다. 사실 종가의 일을 혼자 감내하기는 힘들 수밖에 없다. 여느 집 제사도 차리기 힘든 게 추석상인데 그래도 종갓집 제사이니 오죽 하겠는가? 제종들이 모여도 기백명은 들 것이고 사당에 모실 음식만 해도 수십 가지이니 그 입을 먹이고 그 제기를 채워야하는 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도 광수에미의 입에는 큰 미소가 번진다. 이유는 올 가을에 추수가 끝나면 방금 고구마를 캐온 그 옥답도 자기 것이 된다는 사실이 그저 즐겁기만 하다. 논도 열다섯 마지기는 준다고 했겠다. 그 동서 시집살이도 이제 얼마 남자 않았으니…. 내 살림 내가 꾸리고 알콩달콩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눈에 읍내에 있는 청수장 색시들이 한다는 파마라는 것이 선하다. 조석으로 감고 말리고 빗고 틀어 올리고 하는 불편도 없앨 양 꼭 파마도 하리라. 소향이 바짝 뒤따라오는 발자국 소리도 귀에 안 들릴 정도로 손이 오글거리고 가슴 저리게 혼자 유람을 하며 집으로 가고 있다.

 

솟을대문 보일 때 문 앞에 웬 남자가 지게를 진 채 서성이고 있는 것이 보인다.

들어가지는 않고 밖에서 기웃거리는 것이 무슨 일로 온 것이 확실하다. 광수에미는 큰 목소리로 묻는다.

-누군데 남의 집을 기웃거립니꺼?-

초라한 복장의 중늙은이다. 말려 올라간 한 쪽 바지는 흙색이 역역하고 굵은 주름골로 뒤덮인 얼굴로 봐서도 쉰은 족히 넘었겠다.

-아, 예, 지는 저 신덕에서 왔심더. 누가 이집에 말 좀 넣어달라 케서…-

-누가 무신 말을 넣어달라 했는지 해보이소-

-이집에 주인이십니꺼?-

말을 남기지만 눈은 안채의 위용을 구경하느라 번뜩거린다.

-말해 보라카이요?-

아주 안하무인격이다. 행색이 그러한 사람에게는 더 위세를 부리는 광수에미다.

-마님한테 전해달라 캅디다. 보살님이 열여덟 되는 날 들린다꼬예. 그카민 안다꼬.-

빈 지게를 연신 꾸벅거리며 남정네는 뒤로 한두 발 물러서서 돌아간다.

 

-아저씨예-

숨도 멈춘 소향이 황급히 남정네를 부르며 뒤따른다. 광수에미는 별로 중한 일도 아니라는  듯 그저 집안으로 쑥 들어가 버린 뒤다.

뒤돌아선 남정네는 그 마님 뒤에 있던 젊디젊은 아가씨가 자기를 왜 부를까 생각한다.

-와?-

딸 또래처럼 보이니 말도 놓고 한다.

-그 보살님이 삼천포에서 오신 보살님 맞지예?-

숨이 헐떡거린다.

-그래, 니 아나?-

-운제 오싰어예?-

마치 죽은 사람이라도 만난 양 소향은 가슴이 콩닥거린다.

-어제 저녁에 오싯다. 와? 여는 추석 지나고 한 삼일 후에 들린다꼬 아까 내가 전했는데? 와?-

-아저씨가 오데서 오싯다 켔지예? 지가예…. 보살님 보러 가야 됩니더-

-니가? 이집 마님이 아이고?-

남정네는 이상한 생각이 든다. 분명히 보살님이 말하시기를 이집의 마님이 자기를 기다릴 것이라 하셨는데….

-오데라고예? 동네가?-

재차 묻는다.

-신덕이다. 조조… 여서 얼마 안 멀다-

지게 작대기로 허공을 가리키며 방향을 알리지만 소향의 눈은 남정네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을 뿐 보이지도 않는다.

-아저씨집에 우째 가는지 좀 알려 주이소예. 지금-

황급한 듯 한 발짝 더 다가서며 소향이 재촉한다. 남정네는 오히려 뒤로 한 발 물러서며

-아, 신덕도 모리나? 그서 석수집 찾으민 된다. 내가 석수 아이가-

-신덕예. 그라고 석수예. 지금 보살님이 집에 계십니꺼?-

-카이께네. 계신다꼬. 됐나? 내는 간데이-

뒤돌아서는 남정네를 눈으로는 보지만 마음으로는 아까 들은 신덕이라는 마을 이름과 석수라는 말을 새기고 있다.

그리고는 뒤돌아 후다닥 달린다. 소쿠리에 반쯤 담겼던 고구마가 두어 개 튕겨져 땅에 떨어지는 바람에 소향은 바쁜 걸음을 멈추어 주워 담고 다시 집으로 내처 들어온다.

 

-큰아지매예!-

대청으로 성큼 올라서며 다짜고짜 부른다.

안채 광에서 추석에 쓸 제기를 꺼내던 큰아지매는 손길을 멈추고 내다본다.

-왜 그리 황급하나? 뭐 때문에?-

얼굴조차도 벌겋게 익은 소향을 보며 큰아지매는 묻는다.

-보살님이 오싯데예-

숨조차 헐떡거리며 눈을 똥그랗게 뜬 소향이다.

그제야 큰아지매의 기억이 살아난다. 추석 무렵에 집에 들려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 그렇지 않아도 추석쯤에 오신다고는 했는데. 벌써 오셨다고?-

손에는 여전히 노란 방자제기가 들린 채 대청으로 걸음을 옮기며 눈으로 마당을 살핀다.

그제야 큰아지매가 자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소향이

-아니예, 여 오싯다는 기 아이고예. 저기 신덕에 와 계신데예-

-신덕에?-

정기에서 소리를 들은 광수에미가 젖은 손을 치마에 말리며 정기문을 나서며 마루에 있는 큰아지매한테 말한다.

-아까 집에 들어오는데 웬 남자가 말 전해 달라민서 캅디다. 열여덜 날에 온다꼬예-

-그래? -

이제 전후 상황을 이해한 큰아지매는 도로 광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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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월 2014/04/30 [10:28] 수정 | 삭제
  • 소향, 집소식이 올매나 궁금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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