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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소향은 광으로 따라 들어가며 -큰아지매예. 지가 지금 보살님 좀 보고 올랍니더-
약간은 푸르게 녹이 난 제기들을 주섬주섬 챙기던 큰아지매는 대수롭지 않게 듣는다. -여름이 되서 그런가 닦아놓아도 녹이 나네. 그건 그렇고, 아, 한 며칠 있으면 온다는데 굳이 갈건 뭐냐? 신덕이면 여서 한 십리 길은 되는데?-
마음이 한껏 달아있는 소향에게는 털보무당의 출현이 곧 삼천포에 두고 온 식구들의 출현이나 마찬가지다. -지는 지금 가야 됩니더!-
소향의 얼굴이 굳어있다. 물러나지 않겠다는 고집이 응결되어 사뭇 결연한 표정이다. 큰아지매는 그런 소향의 얼굴을 보다가 문득 십팔 년 전에 경험했던 자기의 상황이 떠오른다.
일제 말기라 어수선한 세상이었다. 물자가 딸린 왜놈들은 눈에 불을 켜고 온갖 공출을 일삼아 조선땅의 젓가락 하나도 없던 시절에 서울에서 시집을 왔다. 그래도 가마를 타고 상주에서 이십리 길을 왔을 정도로 소문난 잔치였지만 처음 해보는 시골 살이, 알아듣기조차 힘든 사투리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시집살림에 처음 몇 달간 몹시도 앓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저 간절한 눈 속의 소향의 마음이 그런가? 그렇겠지, 한시도 식구를 떠나보지 않았던 아이가 한 달이 넘도록 소식도 모르고 객지에서 지내고 있으니 고향 까마귀인들 반갑지 않으랴?
-나도 말은 들어서 신덕이라는 동네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한 번도 가보지는 않았는데…. 너가 갈 수 있겠나? 벌써 오후가 한참이나 됐는데?- 승낙의 기미를 알아챈 소향은 치마꼬리를 움켜잡은 채 동그란 눈으로 자신감을 내보인다. -걱정 마이소, 퍼떡 갔다올 수 있습니더!- 더 들을 것도 없이 소향은 뒤돌아서는데 큰아지매가 잡는다. -아서라. 다 큰 아이가 어디를 그리 함부로 다닌다고. 동서! 광수를 같이 좀 보내게-
몇 초 사이의 둘의 말을 봉당에서 듣고만 있던 광수에미가 미간을 찌푸리며 -아, 할 일이 태산 같구만 오델 간다꼬? 아가 정신이 있나 없나? 행님, 안 됩니더!- -동서, 소향이 지금 일 시켜도 맘은 이미 딴 데 가있으니 일도 안 될 걸세. 광수 앞세워서 빨리 갔다 오라고 하는 게 나을 걸세. 그리 해- 한시가 바쁜 소향은 안 된다는 작은아지매가 밉지만 지금 따질 때가 아니다. -광수 없어도 지 혼자 갈 수 있습니더- 이미 댓돌 위의 신발에 코를 꿰는 소향을 두고 광수에미는 정기로 들어가 버린다. -아서라 했지? 그래도 십리 길인데 혼자는 못 간다- 큰아지매는 더 이상의 이론이 없다는 양 하던 일을 도로 게속 하며 눈도 주지 않는다.
답답한 것은 소향이다. 안 되겠다 싶어 얼른 정기로 쫓아 들어간다. -작은 아지매예, 지 좀 갔다 오게 해주이소. 퍼떡 갔다 올게예. 예?- 거의 사정조다. 가마솥을 행주로 훔치는 작은아지매의 엉덩이가 거북바위 한쪽 끝만큼 크게 보인다. 광수에미는 솥에 엎드린 채로 고개만 옆으로 돌려서 묘한 눈빛으로 소향을 보며 -니, 카모, 내캉 약속 하나 할래?- -몬데예? 할께예- 듣기도 전에 약속부터 한다.
그제야 절구통만한 허리를 펴며 광수에미가 행주를 손바닥에 올려 주물럭거리며 한층 낮은 소리로 마루에 있는 동서가 듣지 못하게 -내 광수하고 갔다 오게 해주꾸마, 대신, 니 내기 그 비밀 말해주거라! 알았제?- 하며 소향의 눈을 응시한다.
이런 얄미운 여자가 있나? 약점을 이용하여 궁금증을 해소하려는 작은아지매가 비열해 보인다. 그러나 소향의 마음은 삼천포에 있는 엄마의 소식이 한시가 급하다. 하지만 큰아지매의 단호한 당부도 함부로 내던질 수 없는 일.
고개를 숙이고 정기바닥을 보던 소향이 천천히 몸을 돌려 아무 말 없이 정기문 쪽으로 나간다. 광수에미도 그저 소향의 몸짓만 보며 무슨 말을 기다릴 뿐이다.
정기를 벗어나려던 소향이 갑자기 몸을 돌려 -그라모, 광수한테 지한테 글 갈켜주라고 하이소. 카고예, 그건 한 달 뒤에 말씸 디릴게예- 거칠 것 없이 큰소리로 말하는 소향에게 놀란 작은아지매는 손짓으로 우선 들어오라고 시늉을 하며 광속에 있는 동서의 동정부터 살핀다. -좀 작게 말해라 이것아, 동네가 다 듣겠다. 한달 뒤에? 야가? 아주 보기보단 무서운 아네?, 좋다! 한 달 뒤다? 퍼떡 갔다 온나. 쿤데 니 신덕이 오데인지 아나?- -모립니더- -오야, 광수가 안다. 조조 태봉 뒤로 가민 있다. 재수는 놔두고 광수만 델꼬 갔다 온나-
대답도 없이 소향은 내달린다.
아이들이 모여 노는 곳이 뻔하다. 동네 입구나 뒷산 중턱 아니면 냇가일 텐데. 오후도 늦은 오후다. 빨리 갔다 오지 않으면 밤이 될 텐데. 한 번도 이웃마을이라곤 가본 적 없는 소향이 광수를 대동하라는 큰아지매의 당부를 어길 수 없으니 찾아서 데리고 가야 한다.
눈을 휘둘러 아이들이 있을만한 곳을 보니 뒷산 중턱에 소를 매어놓고 한 무리의 아이들이 모여 있다. 눈에 보일 만큼이라 해도 그래도 한참의 거리다. 급한 마음에 소향은 손을 모아 입에 대고 뱃속의 창자가 끊어질 듯 소리를 질러대 광수 이름을 부른다. 한번 길게 부른 이름이 허공에 달아났는지 아이들의 주목이 안 보인다. 두세 번 부른 후에야 그 중 한 아이가 손짓을 하고 그리고는 광수로 보이는 아이가 달려 내려오고 또 그 뒤를 작은 아이가 내려오는 것으로 봐서 광수 재수가 맞다.
광수의 걸음걸이가 잽싸지가 않다. 콩 심는 듯 한쪽 다리를 절룩거리며 오고 있다. -아지매, 와?- 멀리서 묻는 광수보다 먼저 소향에게 이른 재수가 소향의 손을 잡고 형 대신 묻는다. -와? 아지매?- -니는 엄마가 부른다. 퍼떡 집에 오라 카더라. 내는 광수하고 오데 좀 갔다 와야데이 니는 집에 가거레이. 광수야 빨리 가재이- 급한 마음에 달랑 그 말 한마디만 남기고 몸은 벌써 돌아서서 몇 발짝 걷고 있다. -오데 가는데? 내도 갈란다- 형이라면 어디든지 따라다니는 재수가 자기만 떼어놓고 간다는데 집으로 갈 리가 없다. -내 켔제? 엄마가 니 퍼떡 오라 켔다꼬? 그라고… 이따가 내 갔다 오고나서 니기 뭐 줄끼있다. 맛있는 거. 내 말대로 하래이? 알았제?- 이제 일곱 살이라 달래는 게 최고다. 줄 것도 없지만 우선 집으로 보내고 광수를 앞세워야한다. -몬데? 뭐 줄껀데?- -빨리 안 가나? 이따 준다꼬 했제? 광수야, 빨리 내 따라 온나!- 재수를 돌려세워 등을 밀고 광수를 재촉한다.
오기 싫은 눈치다. 필요 없는 재수는 가고 싶은 눈치고 데리고 가야 하는 광수는 제자리에서서 밍그적거린다. 할 수 없이 소향이 다가가서 광수의 손을 잡아끌고 걸음을 재촉하는데 딸려오는 광수의 발걸음이 불편하다. -니 와 이리 걷노? 오데 아푸나?- -발이 아푸다- 그제야 기억이 난다. 문둥이 놀린다고 뒤따라 다니다가 탱자가시에 찔린 것이 탈이라도 난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 소향의 마음은 그런 것을 따질 경황이 없다. -니 신덕이 오덴지 아나?- -신덕? 조 아이가?- 하면서 손으로 태봉 쪽을 가리킨다. 들판 한가운데에 마치 엎어놓은 사발 같은 태봉을 지나 멀리 야산 한 자락에 마을이 어렴풋이 보인다. 직선거리로 보이는 마을이 아까 큰아지매의 말로는 한 십리는 된다고 했지만 한층 가깝다.
-오데로 가노?- 물으면서 발은 거의 달리다시피하는 소향에게 광수는 한쪽 팔이 잡혀 끌려간다. -저 밑에 있는 다리로 간다- 이번에는 광수의 손이 마을과는 영 다른 쪽을 가리킨다. -응? 와 그쪽으로 가노? 동네는 저긴데?- 발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며 영문을 알아보려 한다. -이쪽은 다리가 엄따. 저 밑 다리가 있다 아이가?- 다리? 아! 물이 있구나. 난감한 소향이다. 하지만 보지 못한 물이라 얼마나 깊은지도 얼마나 넓은지도 모른다. 눈으로 마주보는 신덕은 똑바로만 간다면 그리 멀리 않겠다. -가자. 내 니 업고 건널게-
낙동강이 상주 경천대를 지나 안동 쪽으로 올라오다가 마지막 포구를 계집막에서 형성하고는 두 갈래로 갈라진다. 주류는 오른쪽으로 안동 방향 그리고 왼쪽으로는 영강으로 지류를 만들고 그 영강이 태봉 조금 못 미쳐 다시 두 갈래로 갈라서는데 왼쪽으로 이안천이라 이름 붙여졌다. 비록 지류라고는 해도 넓은 폭을 가지고 있고 위로는 은척과 문경새재로부터 그리고 멀리는 충청도 보은 속리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흐른다.
음력 팔월의 풀은 억세고 강하다. 논둑을 가로질러 강가로 가는 발걸음은 발에 걸리는 잡초와 뒤에서 끌려오는 광수 때문에 마음만 바쁠 뿐 느릴 수밖에 없다.
땀이 얼굴을 덥고 머리카락이 눈을 가린다. 입은 치맛자락이 풀에 걸리는 것이 더 힘이 들어 아예 손으로 움켜잡아 올렸다. 어둡기 전에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에, 한시라도 빨리 알고 싶은 삼천포 소식에, 소향의 발은 논에 미끄러지고 드러난 종아리는 억새에 베이고 있다.
그리고 나서 눈에 이안천이 나타났다. 강이라기보다는 냇물이라서 다행이다 싶었지만 그래도 늪으로 덥힌 폭이 넓고 가운데 흐르는 물이 제법 된다고 생각이 들지만 소향이 주저할 시간이 없다. -아지매, 내는 인제 못 걷겠다. 발이 아파서- 거의 주저앉다시피 하는 광수를 소향이 들쳐 업는다.
갈대밭을 피해서 걷는다고는 하지만 질퍽거리는 냇가에 기어이 고무신이 빠지고 다시 주어서 등에 업힌 광수 손에 쥐어주고 나서부터는 맨발로 냇물을 건넌다.
중간쯤에서는 물이 허리춤에 이른다. 흐르는 냇물에 치마는 쓸려 펄럭거리고 발밑에 닿는 돌들은 또 왜 이리도 미끄러운지…. 기어이 광수를 업은 채로 물속으로 한꺼번에 넘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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