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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광수는 아픈 발을 끌다시피 하면서도 이미 저만치 도망을 가고 있다. 소향도 겁은 났지만 마음을 다잡아 진정시키며 그 자리에서 돌아서서 자기를 부른 사람이 누군지 본다. 그때…. 보살님하고 같이 처음에 태봉으로 오는 길에서 낙동강변에서 마주했던 그리고 또 얼마 전에 집 앞에서 깡통으로 식은 밥덩이를 얻어갔던 그 대장 같은 남자였다.
남정네가 조심스럽게 두어 발자국을 앞으로 내딛고는 제자리에 섰다. 소향과는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어둑어둑한 초저녁에 소향에게 두려움을 주지 않으려는 태도다. -색시가 태봉에 사는 사람 맞지요?- 얼굴은 영락없이 문둥이 얼굴이다. 머리에 쓴 벙거지 때문에 그늘이 있지만 뭉개진 코 때문에 드러나는 형색은 한눈에도 알 수 있을 정도다. 콩콩 뛰는 가슴이 귓전에 울릴 만큼 소향도 겁에 질려 있다. -예- 다음 말도 없이 짧게 대답한다.
나무 뒤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우루루 일어서서 앞으로 나와 구경이라도 할 모양이자 대장이 고개를 돌려 굵직하게 한마디 한다. -너그는 그냥 앉아 있거라. 나오지 말고!- 문둥이떼가 도로 제자리로 앉자 남자는 소향에게 얼굴을 돌려서 -예. 그렇구만요- 하고는 한 발짝 더 앞으로 내딛는데 소향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친다.
그것을 본 남정네가 그 자리에서 서서 -우린 비록 문디지만 나쁜 사람들은 아입니다. 겁 안 내도 되이 내 한 발짝만 더 갈랍니다- 하고는 더 가까이 다가온다. 그래도 제법 어른 키 두 길이 만큼의 거리를 두고 선 뒤에 -색시…. 내 하도 배가 고파서 하는 말인데. 돈 좀 주고가민 안 되겠나?- 그 소릴 들은 소향은 완전히 얼어붙는다. 흔히 말로만 듣던 행패가 한적한 시골길에서 그것도 초저녁에 일어나는 것이렷다. 뒷걸음 치며 양손으로 가슴팍을 움켜잡자 사내는 금방 알아차렸다. -내 말은… 내기 돈을 좀 주고 집에 가서… 음… 아지매한테… 달라고 하민 줄낀데- 영 하기 힘든 말 인양 더듬거리며 이어나간다. 아지매한테 달라고? 소향은 순간 이것이 거지행패는 아니라고 직감한다.
크게 한숨을 내쉬니 마음이 한결 진정된다. 하지만 문둥이한테 돈을 주고 와서 왜 집에 있는 아지매한테 달라 하노? 도무지 짐작도 안 되는 말을 하고 있는 거지대장을 쳐다보지만 앞뒤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지매요? 우떤 아지매요? 울 집에 큰아지매하고 작은아지매가 있는데. 카고, 와 아지매가 돈을 줍니꺼?-
말을 하고 보니 소향은 수중에 돈이 있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도 아까 냇물을 건널 때 고쟁이 속의 복주머니는 이미 흠뻑 젖었을 것이니 돈도 물을 한껏 먹었으리라. 소향이 김씨집에 당도하고 대포아지매가 떠난 이후에 삼천포에서 떠나올 때 여비로 챙긴 것이 남아서 여태껏 주머니에 접어서 넣어놓고 있었다. 쓸 때도 없고 쓸 일도 없었지만 빈방에 넣어두는 것이 마음이 안 놓여서 항상 고쟁이 속의 복주머니에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기… 내 참… 말하기가 에룹어서- 대장은 땅을 보고 벙거지를 벗었다 쓰고 하면서 발로는 땅위의 돌멩이를 이리저리 굴린다. 그리고는 천천히 소향에게로 다가서더니 -색시, 조쪽으로 가입시다. 내가 조용히 말씸 디리지- 하면서 앞서서 광수가 간 쪽으로 걸어간다.
국방색 군복을 추슬러 입은 대장은 뒷모습은 마치 그럴싸한 남정네다. 허리춤에 동여맨 노끈자락이 덜렁거리는 것을 빼고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소향은 그냥 발목을 잡힌 것처럼 남정네의 뒤를 거리를 두고 따라간다. 사방이 이제는 어두워졌다. 가까이 있으면 형체가 보이지만 저쪽 어디엔가 있을 광수도 안 보일만큼 어둡다. -광수야!- 소향은 자기가 혼자가 아니라 저쪽에 비록 어리지만 누가 있다는 것을 거지에게 알려주고 싶어 보이지도 않는 광수를 큰 목소리로 불러본다. 자기가 놀려대던 문둥이를 보고 질겁을 하고 달아난 광수가 혼자 이 어둠속에서 집에 갔을 리는 없을뿐더러 더군다나 아픈 발 때문에 걸을 수도 없으니 저기 어디쯤에서 자기를 기다리리라는 믿음에서 다시 한번 부른다. -광수야!- 부르는 소리에 거지대장이 발을 멈추고 돌아서서 소향을 향한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광수의 대답이 들리는 것으로 봐서 그리 멀지않은 곳에 광수가 있다는 것을 소향은 느끼고 다소 마음이 안정된다.
-지는 빨리 가야 됩니더. 아가 아파서 업고 가야 되거던예- 핑계를 대보지만 마음 한 편에는 이 거지대장이 하고자 하는 말을 듣지 않고 가기는 틀렸는 것도 안다. 대장은 -우리는 죽지 못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더. 불쌍히 여기고 쪼매만 도와주시몬- 하고는 다음 말이 없다. 아지매한테 달라고 하면 돈을 줄 것이라던 그 얘기는 없다. 소향은 그 얘기보다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갈 일이 급하다.
돈이 아깝지 않을 리 없지만 이미 발목 잡혀서 걸음도 멈추었으니 차라리 한 푼 건네주고 가는 일이 빠르겠다고 생각한 소향은 몇 발짝 거리를 두고 서있는 대장을 뒤로 하고 돌아서서 고쟁이 속의 복주머니를 꺼내 젖어있는 오백 원짜리 한 장을 꺼냈다. 지니고 있던 돈이 전부 천오백 원이니 내심 아깝기 그지없지만 이 돈으로 여길 빠져나가기를 바라며 아지매 얘기는 묻지도 않고 -이기 지가 가진 돈 전부입니더- 하고 손을 내미는데 더럭 겁이 난다. 언젠가 낙동강변 나무 아래서 대포아지매가 던지고 간 돈을 주워서 건네주었을 때와는 영 다른 공포감이다.
거지대장도 약간은 의아한 듯하다. 선뜻 내주는 돈을 건네받기보다는 더 이상 구차한 구걸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오히려 익숙치 않아서다. 두 발짝을 떼고서 손을 길게 뻗어 돈을 두 손으로 잡아서 소향에게 불필요한 공포심을 주지 않으려는 듯 다시 뒷걸음친다. -고맙심더. 고맙심더!- 허리를 굽실거린다. -카모… 지는 갑니더- 하고 소향은 거지대장을 지나쳐서 내달린다. 머리 뒤를 당기는 듯한 공포가 땅위를 달리는 발걸음을 마치 허공에 놓은 듯하다.
-광수야! 오데 있노?- 달리면서 숨이 턱에 차오르지만 말을 하지 않고는 더 무서워서 광수를 찾는다. -여있다. 아지매- 제법 말이 가까이 들린다. 그리고는 땅에 앉아있는 광수가 보인다. -퍼떡 가재이. 늦었다. 우짜꼬- 광수를 들쳐업는데 아까보다 무게가 더 무겁다. -다리가 여서 머나? 어두버서 물은 건낼 수 없으이 할 수 엄따. 다리로 갈수밖에-
귓불을 스치는 바람 자락이 선뜩하다. 추석이 모래라서 그런가? 아니면 아직 마르지 않은 옷 때문인가? 마음이 급한 소향은 점점 더 무거워가는 광수를 몇 발짝마다 추스르며 가빠지는 숨을 들이마시다가 문득 어떤 아지매한테 돈을 달라고 하면 되는지…. 또 왜 아지매가 준다는 것인지…. 거지대장에게 묻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고 주고 온 돈 오백 원이 아까워진다.
* * *
-아입니더. 후하게 쳐주싰구만요- 돈을 받은 지목수가 송구한 듯 몸을 조아려대며 반신은 연신 굽실거린다. 장씨는 일도 끝냈고 또 날도 어두우니 시원하게 속을 비울 량으로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술잔만 비워대고 옆에 있는 태광도 좋아하는 술을 마다하지 않고 들이마시다가 -행님. 지 생각인데…. 울 집에 어차피 누군가는 일을 돌봐야 안 됩니꺼?- 유지들하고 기방에는 자주 가지만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태섭은 받아놓은 술잔에 손도 대지 않고 있다. 또 지목수나 장씨 그리고 동생하고 주고받는 잔이 그다지 성에 차지 않는 태섭이기도 하다. -무신 말이고? 일을 돌보다이?- -아! 이 많은 농사를 누군가는 들어서서 해야 된다는 말 아입니꺼?- 못 알아듣는 것을 탓이라도 하듯 양미간을 찌푸려대며 태섭에게 목청을 높인다.
잠시 물끄러미 태광을 보던 태섭이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안듯 -니가 안 있나? 여태 그래 해와놓고 인제 무신 말을 하고 있노?- 태섭은 다리를 바꿔 꼬아 앉으며 새삼스럽다는 듯 태광에게 퉁명하게 말한다. -아! 행님도! 인제 지도 살림 안 났습니꺼? 행님 집안 일은 행님이 하시야지예- 태광으로서는 하기 쉽지 않은 말이었다. 농사라면 아무것도 모르는 형님에게 전부 떠안기고 자기만 따로 살림 챙기겠다는 것이 마치 연이라도 끊겠다는 것처럼 느껴져서다.
-니 지금 머라 카노?- 태섭은 잠시 생각을 해 본다. 그래, 한참 전에 마눌이 살림을 내준다고 했고 전답도 떼어주기로 하긴 했지만 그래도 농사일은 두집 것을 같이 돌볼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니꺼 내꺼 갈라서 하겠다는 태광의 심중이다? -니가 하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하다꼬. 일은 농사짓는 사람들이 다하는구만- 태광을 보며 대수롭게 말한다.
* * *
아까 시동생에게 운자를 떼라고 말한 큰아지매는 정기에서 마루에 귀를 대고 듣고 있으면서도 어두운 밤까지 돌아오지 않는 소향과 광수가 신경이 쓰인다. -동서, 야들이 늦네- 하면서도 마음 또 한편으로는 머슴 얘기가 아직 나오지 않은 것이 답답하다. 광수에미는 대수롭게 대답한다. -오겠지예. 뭐. 행님 우리꺼정 저녁 무울까예?- -마루에 남자들이 있는데. 우리끼리 먹는 것도. 조금만 더 있어보세- 하고는 일어서서 마루로 나간다.
-영감. 저 좀 보시지요- 하고는 정기문에 그대로 서있다. 태섭은 자기를 오라는 말인 줄은 알겠지만 정기문간에 서있는 마눌을 보고 어떻게 정기로 자기를 오라 하느냐는 눈치를 보내며 헛기침을 한다. -잠깐이면 됩니다. 부엌이 남자 잡아먹는데 아닙니다- 하고는 엷은 미소를 띄운다. 그제야 태섭이 느릿 걸음으로 댓돌의 신을 신고 내려오자 마눌은 정기로 먼저 들어가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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