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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햇살이 금화보석처럼 마당에 쏟아진다. 가을햇살에 넋을 놓고 머릿속으로 삼천포를 그리는 소향의 눈은 반쯤 감겨있다. 오늘이 보살님이 오신다는 열여드레인데. 점방을 열었다는 보살의 말이 왜 이리 미덥지가 않고 풀어진 눈동자로 방바닥에 널브러졌던 보살의 모습이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소향아- 들리지도 않게 마루로 나선 큰아지매의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가다듬은 소향은 마루를 일어서서 큰아지매를 향해 돌아선다. -뭘 그리 보고 있어서 불러도 들리지도 않더나?- -예? 불렀습니꺼? 못 들었네예- 한낮인데도 뻐꾸기가 멀리서 울고 있다. -동서는 들에 갔나?- 마루 끝에 자리를 잡은 큰아지매도 처마를 빗겨가는 햇살에 눈을 주며 묻는다. -아침에 광수 업고 학교 델따 준다고 가싯어예- -점심때가 됐다. 그러고 보니 우리 둘밖에 없네. 니가 뒤에 가서 상추나 다른 나물가지라도 뜯어 온나. 그걸로 쌈이나 먹자-
그제야 소향도 배가 고픈 걸 느낀다. 그 많던 추석 음식도 인사차 들락거리는 사람들에게 한 움큼씩 싸주고 남은 것들도 삼일이 지나자 쉬어서 버리고 말았다. -예, 갔다 올께예- 정기 뒷문으로 가던 소향이 대문에 인기척을 느끼고 보니 보살이 들어선다. -보살님 오십니꺼?- 마당으로 달음질 내는 소향을 보고 마루에 있던 큰아지매도 앉은 채로 자세를 고치며 인사를 내놓는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지요? 한낮의 땡빛이 따거울텐데- -올해는 대풍입니더. 오다 보이께네 농사가 잘 됐습디더- 숨을 씩씩거리며 다섯 돌계단을 오르는데 그것도 힘에 부치는지 마지막쯤에는 무릎에 손을 대고 밀어올린다. -소향아, 마침 보살님도 오셨으니 점심상도 넉넉히 채리거라. 우리도 마침 점심 먹으려하던 참이었습니다. 쌈이나 해서 먹자고 했는데 찬이 없어도 같이 하시지요-
마루에 엉덩이를 걸친 털보무당은 마루에 서있는 소향을 보고 숨 사이사이로 주문한다. -내 물 한 사발 주거라- -소향아, 감주가 아직 있나 모르겠네- 부엌살림을 알 리 없는 큰아지매의 말에 소향이 답한다. -단지를 아침에 다 씻었어예- -그랬구나. 그래 시원한 물이라도 어서 내오느라-
눈을 두리번거리며 두어 달 보지 못한 집을 둘러보는 무당의 모습을 큰아지매도 넌지시 살핀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털보무당의 얼굴이 전에 보았던 그런 모습과는 뭔가 달리 보인다. 눈에는 눈곱이 마른 채로 달라붙어있고 광대뼈가 불쑥 솟아있다. 옷차림새도 허접스러운 것이 입은 채로 잠을 잔 것이 분명하다.
-보살님. 어디 불편하십니까?- -예? 언지예! 아입니더. 괜찮습니더- 하면서 정신이 난 듯 쪽을 뽑아 입에 물고 머리를 뒤로 쓸어올려 틀고 다시 쪽을 찌른다. -땀을 흘리노이께네. 머리가 산발이 됐네예- 아무데서나 머리를 풀어헤치는 것이 아닌 것쯤을 자신도 안다는 것으로 변명을 한다. -지가 샘물 떠올께예, 그기 시원합니더- -그래, 아무래도 금방 떠온 샘물이 시원치- 큰아지매의 말을 듣고는 소향이 동이를 한손에 들고 샘으로 나선다.
손끝이 떨리는 것을 애써 눌러가며 털보무당은 마음을 가다듬어 보려고 애쓰지만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는다. 마지막 남은 것을 아침나절 태봉길 나서기 전에 피워서 이젠 수중에 든 것도 없는데 정신이 더 산란해지고 있다. 더워서가 아니라 그냥 식은땀에 배어나오고 속가슴까지 떨려오는 것이 어께로 팔로 이제는 머리 위로 전이되고 있다.
큰아지매의 예리한 눈길은 수전증 앓는 사람같이 떨어대고 한겨울 오한에 움츠려드는 양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무당을 놓칠 리 없다.
-보살님, 아무래도 어디 편찮으신 모양입니다. 아랫방에 가셔서 좀 누우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제가 보기에 여름 고뿔이라도 단단히 드신 것 같습니다-
좀전만 해도 아니라고 괜찮다고 하던 무당은 이제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대답도 않는다. 숨소리조차 거칠어져가는 무당은 기어이 마루에 머리를 꼴아박고 가슴을 움켜잡은 채 앞으로 쓰러지며 그저 숨통을 쥐어짜는 듯한 신음을 연발한다.
놀란 것은 큰아지매다. 두발로 걸어 들어온 사람이 갑자기 자기집 대청에서 꼬꾸라지니 어찌 할 바를 모른다. -보살님, 보살님!- 어께를 흔들며 불러보지만 무당은 쌕쌕거리는 신음만 낼뿐 꼼짝도 않는다. 어찌 할 바를 모르는 큰아지매는 대청에 큰 키를 곧추 세운 채 주위를 둘러보며 누굴 찾아보지만 눈에 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마침 소향이 물을 이고 들어온다. -소향아, 이리 빨리 와봐라. 아무래도 보살님이 아프신 모양이다- 천근이나 되는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있는 소향은 고개도 까딱 못한 채 눈만 떠올려서 광경을 보고는 -예- 하고 대답하는 순간 입에 물고 있던 따뱅이 끈이 앞으로 떨어진다. 황급히 동이를 정기바닥에 내려놓은 소향이 대청에 갔을 때도 큰아지매는 아무 손도 쓰지 않은 채 무당 옆에 그냥 쪼그려 앉아서 땀에 흠뻑 젖은 무당을 내려다보고만 있다.
소향은 양팔로 무당을 감싸 안고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보살님예. 오데가 아풉니꺼?- 하고 소향의 가슴팍에 안긴 무당은 눈을 감은 채 그저 부들부들 떨고만 있다. -아이구, 큰아지매요, 보살님이 땀을 마이 흘맀습니더. 옷이 다 젖었다 아입니꺼- 소향은 자기 몸에 전해지는 습기를 느끼고 큰아지매를 올려다보며 무슨 대책을 기다린다.
-소향이 빨리 아래채 너 방으로 옮기자- 말은 하면서도 큰아지매는 무당의 몸에 손도 대지 않고 그저 앉았다 섰다만 할뿐이다. -보살님예, 힘주이소. 지한테 기대고 일나이소- 소향은 물동이 이고 내리듯 무당을 가슴팍에 대고 양팔로 무당의 허리를 질끈 잡아 세워 돌계단으로 내려가려고 할 때 무당은 눈을 뜨고 힘없이 한마디 한다. -됐다. 가마 있거라. 내 정신 채리고 보재이- 하면서 팔 하나를 뻗어서 마루 끝을 잡는다. 다시 소향은 무당의 몸을 떠밀다시피 하여 마루 위로 올려주자 무당은 힘없이 벌렁 마루 끝에 누워버리고 다시 눈을 감는다.
-보살님예- 소향은 무당의 얼굴 가까이에 자기의 얼굴을 대고 불러보는데 숨결에서 배어나오는 냄새가 익다. 담배냄새가 아니고 바로 엊그제 신덕에 갔을 때 보살이 피우던 장죽에서 나던 냄새였다. -아무래도 많이 편찮으신 게 틀림없다. 소향아 니가 부축해서 아랫방으로 가자- -예, 보살님예. 방으로 가입시더. 지 잡으이소- 하고는 다시 부축하여 계단을 내려오는데 큰아지매의 눈에는 위태하기 짝이 없이 보이지만 막상 무당을 힘으로 부축하고 있는 소향의 팔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젊은 소향에게 곯아빠진 털보무당은 짚단 하나쯤으로 여겨졌다.
큰아지매가 문을 열어주고 소향이 털보무당을 방에 눕히는 동안 큰아지매는 한동안 들여다 보지 못한 소향의 아래채 방안을 휘 둘러본다. 짐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보따리 하나가 윗목에 있고 여름내 덮었을 홑이불 하나가 아랫목에 있다.
큰아지매는 문밖에 선 채로 문고리를 잡고는 무당을 불러본다. -보살님, 의원이라도 불러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의원이라는 말에 무당은 입을 달싹거리며 대답한다. -아닙니더. 쪼매만 있으민사… 괜찮아질 겁니더. 오한이 들어서 그캅니더- 아무도 모를지언정 자신의 증세를 알고 있는 털보무당은 의원이 고칠 수 있는 증상이 아니기에 사양하여 번거로움을 막으려한다.
-예. 소향아, 이불 덮어드리고 한잠 주무시게 해라- 하고는 염려스러운 듯 목을 길게 뽑아 안을 한 번 더 둘러보고는 문을 닫고 돌아선다. 소향이 홑이불을 끌어당겨 무당의 몸 위에 올려주자 무당은 -덥다- 하고는 밀어내버리는데 다른 한손은 소향의 손을 꼭 잡은 채 떨고 있다. -보살님예. 정말로 괜찮을 낍니꺼?- 무당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며 소향이 걱정스레 묻는데 머릿속이 온통 젖어있다. -지가 물수건 좀 갖고 올께예. 땀이 너무 마이 났심더- 거미같이 희미한 눈을 뜨고 무당은 소향의 잡은 손을 더 꼭 움켜잡으며 -아이다. 됏다. 이래 쪼매만 있거라- 하고는 다시 눈을 감아버린다.
소향은 영문을 모르겠다. 아, 두발로 멀쩡하게 걸어서 여기까지 온 보살님이 갑자기 무슨 역질이라도 걸렸는지 반은 인사불성이 되어 소향의 손을 쥐어짜고 있지 않는가? 보살님이 오면 삼천포 소식이라도 자세히 들으리라 했는데…. 지금은 그저 보살이 걱정이 된다. -좀 주무시이소. 이따가 지가 점심 채리 디릴께예- 하고 슬그머니 무당의 손을 풀고 일어서서 나오는데도 무당은 아무 말도 없이 시체같이 누워있다.
대청 끝에 신발도 벗지 않고 걸터앉은 큰아지매가 방을 나온 소향에게 묻는다. -좀 괜찮아지나? 어떠시냐?- -모리겠네예. 그냥 땀을 마이 흘리시는기- -그래? 좀 있어보자. 있다가라도 차도가 없으면… 의원이라도 불러야지. 갑자기 저럴 수도 있는지… 여름 고뿔이 무섭다고는 하더라만. 주무시게 놔두고 우리라도 점심 먹자- 한바탕 난리를 치는 동안 점심때를 훌쩍 넘겨버렸다. -그래예, 지가 상치 뜯어올께예- 하고 소향이 정기뒷문으로 나섰다.
점심을 먹은 소향은 작은아지매가 거둬들여 잿간 앞에 쌓아놓은 팥더미를 막대기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오후 햇살은 늘어져서 힘은 없지만 그래도 살갗에 닿는 느낌이 따끔거린다.
휘청거리는 물푸레 나뭇가지를 휘둘러 줄기를 팰 때마다 속에서 튀어나오는 팥이 여기저기 흩어지고 때로는 얼굴도 때리지만 소향은 이렇게 정신을 쏟고 몸이 피곤해지게 일을 하는 것이 마음을 편하게 한다고 알고 있다.
-아지매! - 하면서 광수가 재수를 뒤로 하고 문에 들어선다. -우짜까? 니 걸어서 왔나?- 아침에만 해도 작은아지매 등에 업혀서 학교에 갔는데 걸어서 들어오는 광수를 보고 소향이 눈을 크게 뜨고 묻는다. -엄마가 온다 케놓고 안 왔다 아입니꺼? 케도, 인제 안 아풉니더- 제법 목소리가 또렷한 걸로 봐서 많이 나아가고 있는 모양이라고 보인다. -그래? 다행이다. 케도 마이는 걷지 마래이. 아직도 덧날지 모린데이- 하고는 다시 하던 막대기질을 마른 팥줄기 위에 퍼붓는다.
웬일인지 광수는 소향의 옆에 서서 그 광경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재수는 대청으로 달려 올라가있고 소향은 무심히 일을 하다가 문득 광수가 햇볕 아래에서 자기를 보고 있다는 걸 느끼고는 손을 멈추고 광수를 보고 -니 그 와 서있노? 덥다. 마루로 가던지, 아니몬 집에 가서 숙제를 하던지 안하고- 광수는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양 쭈뼛거리다가 대뜸 부른다. -아지매- -와?- - 아지매 내기 공부 갈카달라 했지?- 소향의 귀가 번쩍 뜨인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일이었는데 난데없이 광수 입에서 공부 얘기가 나오는 것이 반갑기 그지없다.
몸을 돌려서 광수 쪽으로 향한 소향은 -그래! 와? 니가 갈차줄래?- 소향의 입에 미소가 서려있다. 아마도 작은아지매가 광수에게 말을 한 것이 분명하다. -케도… 내도 공부 잘 못하는데- 난감한 표정을 짓는 광수다. -니, 가갸거겨는 다 아나?- -그건 다 안다- 대답이 자신 있어 보이는 광수다. -그카몬 됐다. 내는 니기 한글만 배우민 된다. 내가 니를 선생님으로 해주고 무울 것도 주고 할게. 좀 갈차도오- -그럼 가갸거겨만이다. 아지매! 산수캉 다른 건 안 된다!- 소향을 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단단히 약속을 받아내는 걸로 봐서 광수는 다른 과목에는 별로 자신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 글만 갈차주민 된다. 됐제? 운제 할까?- -몰라, 아무 때나- 하고는 돌아서는 광수를 붙잡고 소향이 덧붙인다. -저녁 묵고 나서 내기 오니라. 재수하고 같이 와서 숙제도 하민서 내를 갈차도고. 됐나?- -응, 그럼, 지금은 놀아도 되겠다. 알았다 아지매- 하고는 뛰어서 나가버린다.
광수의 뒷모습을 보고서있는 소향의 머릿속에는 집에 있는 종락이 생각이 간절하다. 늦은 나이지만 유일하게 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어 다행이었고 이제 자신도 글을 배울 수 있게 됐다는 것에 왠지 마음이 뿌듯해지는 소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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