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를 캐다

김담의 연재소설 <소향전> 53화

김담 | 기사입력 2014/07/01 [20:14]

고구마를 캐다

김담의 연재소설 <소향전> 53화

김담 | 입력 : 2014/07/01 [20:14]

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예, 날은 그렇다 치고. 보살님이 치성을 들여 주실 겁니까?-

묻는 큰아지매의 말이 한참을 굶었다 피운 독한 담배 기운에 무당의 귀에 먹먹하게 들린다.

 

-지가예? 아입니더. 아이지예! 이 집안일 입니더. 그라고, 마님일 입니더. 마님이 정성을 디리야 됩니더. 몸이사 소향을 빌린다 케도 아가 마님아 아입니꺼? 지가 볼 때 마님은 씨앗이 없는 줄은 압니더. 케도… 목전에 합방하는 꼴을 보민사… 그기 오데 정성이 들겠십니꺼? 케서 디리는 말입니더. 부처님 같은 마음으로 정성을 디리자민 날을 잡아주고 마님은 절에 가이소. 처처불상이고 사사불공이라 켔심더. 절에만 부처가 계신 것은 아니니 오데서든지 부처님이 계신다고 여기고 또 언제 뭐하든지 부처님 앞이라 생각하며 공손한 마음으로 복을 빌면 음계와 양계가 잘 어울리게 됩니더. 그라고… 이기사 그저 디리는 말입니더. 동네에 아들 마이 둔 집에 있는 도끼를 훔치다 놓이소. 아! 기왕이몬 힘 좋은 아들이 안 좋심니꺼? 하하하-

 

호롱불을 응시하며 무당의 말을 듣고 있던 큰아지매는 무당의 말에 공감을 한다.

자신의 입지를 위해 벌린 일이지만 그래도 서방이 딴 계집을 품는다는 것을 상상만 해도 은근히 창자가 꼬이는 것이다. 물론 그동안 태섭이 기방 출입하는 것쯤이야 모르고 살아온 것도 아니지만 드러내놓고 아는 여자와 합방을 시키는 것에는 자신도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는데 보살의 말이 모든 것을 쉽게 해결해 주는 것이다.

그래. 내 떠났다 오면 안 보고 안 듣고 해서 좋을 것이고 또 정성도 함께 봉수할 것이니 어차피 동네에서 알게될 일인데 그때 자신의 대범함이나 인자함 혹은 정성이 요란한 뒷말들을 다 잠재울 수도 있으리라.

 

-예. 보살님 말씀이 옳습니다. 그리하지요-

말을 마치는 것으로 들은 무당은 황급히 입을 연다.

-그기까지는 마님이 하신다지만… 그 후에, 아가 들어서고 난 다음에는 지가 큰 치성을 드리지예. 하늘의 기운을 받고 땅의 기운을 득하고 복과 명을 같이 크게 받도록 말입니더-

그러면 그렇지. 털보무당이 돈 냄새를 피해갈 리가 만무하다.

-그카고… 오늘 복채도 좀 넉넉하이 주이소. 먼 길 오니라 바쁜 일도 다 제쳐두고 왔다 아입니꺼?-

여간해서 하지 않는 복채 얘기를 입에 올린 계면쩍은 털보무당이다. 빈털터리가 된 지 한참이라 지금 체면 따질 때가 아닌 것이다.

 

-언제 떠나실지?-

용무를 끝낸 큰아지매다. 군더더기 객식구 하나가 그것도 신기 어린 사람이 집에 있다는 것이 반갑지는 않다. 그리고 수중에 지전을 넣고 오지 않아서 오늘 밤에 복채를 주어야 되는지 아니면 내일 주어도 되는지를 아울러 묻는 것이다. 

돈이 생길 것이 뻔해지자 자꾸 아편 생각이 간절해지는 무당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대며 애써 떨쳐낸다.

-지야… 이만 하이께네. 낼이라도 가봐야 됩니더. 맹절 땜에 미라놨던 일들이 많아서 기대리는 사람들이 많심더-

 

담배 하나를 더 댕기는데 양담배라는 것이 어떻게 비벼말아 피우는 엽초보다 더 독하다.

-예. 그럼 낼 아침에 복채는 놓겠습니다. 집이라 그냥 오는 바람에 지닌 게 없군요-

-아이구. 아무렴 우떤교? 괘안심더-

이미 큰아지매는 일어서서 문을 나서고 방안에는 털보무당이 홀로 남아 흔들리는 호롱불 그림자에 자신조차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는 담배 때문인지 아니면 술기운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아편기운이 아우성쳐서 그런지 그저 몽롱해지는 정신 속에 모로 픽 쓰러져 버린다.

 

   *   *   *

 

마을에는 어느덧 가을걷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품앗이하여 베는 벼는 소달구지로 실어 집으로 각자의 집으로 들인다. 비를 염려하여 맑은 날 타작을 하자는 것이고 우선은 논에서 거두어들이는 것이 급선무다. 시퍼렇게 갈아낸 낫도 하루 종일 벼를 베고 나면 날이 무딜 정도로 되어버리니 하물며 사람들의 허리는 끊어질듯 아프고 고단하지만 일 년 중 한철을 위해 지은 농사를 눈앞에 두고 피곤하거나 힘들다고 넋두리 떨 수도 없고 또 받아줄 이도 없다.

 

태봉 앞뜰의 금빛 일렁거림도 하루가 다르게 한 조각씩 사라져가고 있다. 그래도 올해는 우순풍조한 해라 소작꾼들도 기대감이 크고 김씨네 집에서도 작황을 눈여겨보고 있는 중이다.

 

-광수야, 니는 빨리 도가에 가서 술 한 말 갖다 달라 해라-

태광이 신발을 벗고 대청에 걸쳐 앉으며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킨다. 농번기라 학교가 실습을 겸한 일주일의 짧은 방학이다. 

마당에서 소향이와 함께 익은 양대를 까던 광수에미는 치마를 털어내며 일어선다.

-술은 와 시킵니꺼?-

한 말씩 배달시키는 것으로 봐서 혼자 먹을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응, 아…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 목이나 축이라고 해야지. 물론 저그끼리 묵기야 묵지만, 또 우리 집에서 내놓는 기 다르지. 안글나?-

-그래, 당신 말이 맞소. 우째 그런 것도 다 챙기고. 우리 영감 참 용해졌네?-

-와? 내가 매년 하던 일인데 새삼시레 카노? 시끄럽다! 고만-

광수에미는 영감 앞에 앉으며 눈을 샐쭉하게 뜨고 아양을 떤다.

-그래 올해는 누집 농사가 젤입디꺼? 지 생각으로는예. 아무케도 종필이 아제가 제일인 성싶은데?-

-응? 그기야. 아직 모리제. 타작을 해봐야 알제. 케도, 니 말대로 종필이가 농사를 잘 짓더라. 입지로 본다민사… 물길 좋고 땅 좋은 태봉 옆인데. 종필이가 여간 부지런하나? 그 자슥은 올해 쌀 가마니나 좀 만질 거다. 물론 딴 논도 올해는 다 평년작을 넘기는 넘지만-

-당신이 한다꼬 해봐야 올해가 마지막입니더. 인제 내년부터 우리농사 지으대민사. 이집에 집사 노릇도 다 끝 아입니꺼? 그저 원성 안 사도록 하이소-

 

원성 사지 않도록 하라는 광수에미의 말을 태광은 알아듣는다. 타작을 한 후에 나락이 몇 섬이냐에 따라 도지를 받는데 대체적으로 칠할을 거두어간다. 그것은 인근에서 상통하는 것보다 김씨네는 그래도 후한 셈이지만 곡식을 눈앞에 둔 소작인들이 종종 타작한 나락을 땅속에 파묻거나 옹기단지 속에 숨겨서 도지를 계산할 때 조금이라도 더 득을 보자고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태광이 눈여겨 보아둔 속셈으로 다그칠 때가 있고 그것이 틀릴 때는 면목 없어지기 일쑤인 것을 마누라가 말하는 것이다.

 

-오이야. 내 다 알아서 한다. 근데 니는 웃말 샘터 옆에 있는 고구마는 운제 캘낀데? 내가 주섭이한테 말해놨다. 갸가 실어다 줄끼다-

-안그케도 오늘내일 하고 있습니더. 말이 나왔으이 오늘 저녁에는 햇고구마나 밥에 올리볼까?-

추석 전에 제상에 올릴 고구마 몇 개를 캐보았지만 덜 영글은 것이 생각난다.

 

-소향아. 우리 웃말 밭에 가제이. 고구마 캐로-

둘의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던 소향이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고개를 돌린다.

-지금 저녁때가 다 됐는데. 고구마를 인제 캐로 갑니꺼?-

일을 하자고 치면 아침나절에 하는 것이 농삿일인데 갑자기 밭에 가자는 작은아지매의 말이 어리둥절했던 것이다.

-다 캘끼 아이고 그저 몇 개만 캘라꼬. 저녁에 묵구로-

-몇 개만 캘거민. 지가 갔다 오지예. 뭐 할라꼬 둘이나 갑니꺼?-

-그래. 니 말마따나 모할라꼬 둘이나 가노? 그래라 니가 무울만치만 캐온나-

 

소향이 호미와 소쿠리를 들고 집을 나서자 광수에미가 영감 앞에 코를 대고 다시 앉는다.

-광수 아부지. 당신이 광수 큰아부지한테 꼭 말해 보이소. 우리논은 태봉 옆에 있는 걸로 달라고. 그라고예, 다 한쪽으로 붙은 걸 주민사 더 좋을낀데-

담배를 손에 든 태광은 피우던 행동을 멈추고 마누라를 째려본다.

-니 미친나? 그 땅은 어림도 없따-

눈을 한쪽으로 감아 피어오르는 연기를 피하며 다시 한 모금 빨아대는 태광에게 엉덩이를 옮겨 바짝 다가앉으며 광수에미는 다그친다.

-와예? 그기 우째 안 됩니꺼? 다 같은 이집 땅인데?-

-빙신아. 그건 문중 땅이지 행님 땅이 아이다. 니는 우째 종갓집 며내리가 돼서 그것도 모리나? 참!-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그동안 이집에서 산 지가 벌써 십수년이지만 광수에미는 그저 다 이집 땅이라고만 믿었지 문중 땅 다르고 시아주버니 땅 따로 있다는 것은 오늘 처음 들어보는 것이다.

-예? 카모… 문중 땅이 따로 있고 큰아부지 땅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꺼?-

-그래. 이 답답아! 문중 땅은 대대로 내리오는 땅이라 택도 없다. 준다고 했으이 행님 땅 중에서 띠주겠지-

 

광수에미의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농사란 그저 땅이 좋아야 하는데 그동안 보아온 경험으로도 좋은 땅 놓고 싸움질하는 소작들을 어디 한두 번 보았는가?

-카모? 당신은 오데 땅이 맘에 듭니꺼? 고걸 달라꼬 하이소!-

-니는 우째 받을 사람 맘대로 이거 달라 저걸 달라 하노? 다 행님이 알아서 줄끼다. 케봐야… 다 태봉 뜰에 있는 논이라 다 똑같다-

닦달하는 마누라의 채근이 이유 없다는 듯 잘라서 말을 끊는다.

-아입니더! 내는 벌써 행님한테 웃말 밭을 받기로 했심더-

-웃말 밭? 그 고구마 밭?-

태광이 묻는다.

-예. 그 밭이 젤로 좋심더. 크고 땅도 좋고 풀도 덜 납니더. 뭘 심어도 잘만 됩디더. 케서 지는 벌써 그 밭을 받기로 안 했심니꺼?-

-참! 예펜네. 욕심은 많아서… 잘했다. 하긴… 그 밭이 좋긴 좋지-

처마 끝으로 길게 들어오는 저녁햇살을 쳐다보며 태광은 그런 마누라의 말에 헛웃음을 날린다.

 

-그나저나 우째 집이 이리 조용하노? 행수님 안 계시나?-

-당신도 참! 아, 행님 계시몬 우리가 여서 이렇게 얘기를 합니꺼? 점심때 읍내 갔십더-

-읍내? 혼자 오데 잘 안 가시는 분이 우짠 일이고?-

-가을이 돼서 진맥도 하고 한다꼬. 혼자 간기 아이고 큰아부지하고 같이 갔심더-

-와? 오데 아푼가? 진맥은 와?-

-우째 압니꺼? 내가 보이께네 아푼 건 아이고. 아마 보약 지으러 갔지 싶습니더. 광수아부지, 우리 아아들도 약 좀 해믹입시더. 광수는 그렇다 해도 재수는 영 살집도 엄꼬-

마누라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태섭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됐다, 고마! 정신이 나갔나? 하는 소리가 우째 그리 철땍서니가 없노? 갸가 우때서? 내가 보이 잘만 커던데?-

서방 입으로 철없다는 말을 들은 광수에미는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앙칼진 소리로 목을 훑어낸다.

-아, 말만 대갓집이지, 당신이 들어서서 모 하나 우리식구 챙긴 거 있습니꺼? 분가한 것도 내가 우기싸서 된거고 땅을 받구로 된 것도 다 내가 했는데 머요? 철때서니가 없다고? 참!-

-시끄럽다, 고만. 내는 들에 가봐야 되이. 이따 술 오민 바로 들로 가오라 케라-

대문을 나서는 서방한테 한껏 눈을 흘기지만 광수에미의 속내는 그저 기쁘기만 하다.

 

   *    *    *

 

추석 전에 작은아지매하고 와서 고구마를 캔 것이 겨우 보름도 안됐는데 그동안 몰라보게 달라진 밭을 보고 소향은 놀란다.

 

줄기는 더 말라 비틀어졌지만 그 사이사이로 땅이 쩍쩍 갈라져있고 틈틈이 보이는 붉은 고구마 껍질이 그저 신기하다. 물론 소향이도 고구마를 처음 캐보는 것은 아니다. 덕호에서 콩밭 옆 손바닥만한 땅 한편에 매년 고구마를 심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크고 좋은 땅에 널리 퍼진 고구마를 보며 속으로 감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많이 캘 것도 아니니 그저 밭 입구에서 순을 걷어내고 땅에 쪼그려 앉아 호미를 땅에 대는데 밭 반대쪽 숲에서 버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산이라 할 것도 아닌 만큼 작은 능선 위에는 뽕나무가 잔뜩 심어져있고 가을누에를 치는 사람들이 종종 발걸음을 하는 곳이라 그러려니 하고 소향은 다시 호미질을 해댄다. 아주 탱글탱글하게 영근 고구마가 부드러운 흙속에서 툭툭 떨어진다. 불과 몇 순 캐지도 않았는데 소쿠리는 거의 고구마로 가득하다.

 

이만큼이면 됐다고 여긴 소향은 탐스런 고구마를 손으로 만지며 흙을 털어내는데 또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가 나는 통에 문득 짐승인가 하는 생각으로 뒤꼭지가 쭈뼛하는 걸 느껴 소향이 벌떡 일어서서 소쿠리를 옆구리에 끼고 돌아서려는데 나무 사이로 분명 남자인 듯한 자가 숲을 헤집어대며 뽕나무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숲속이라 땅이 고르지 못한 탓인가 남자는 한쪽으로 몸이 쓰러지고 허우적대며 헛발을 여러 번 딛고는 없어졌다.

 

다행히도 산돼지나 승냥이가 아니라 마음을 놓은 소향이 밭을 벗어나 옹달샘을 지나간다. 지난여름에 마을의 샘이 탈 났을 때 온 마을사람들이 이 작은 옹달샘에 바가지를 대고 머리다툼을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물만 졸졸 흐를 뿐 아무도 찾아주지 않고 있다. 소향은 흐르는 물이 너무도 좋아서 소쿠리를 내려놓고 고구마를 땅에 쏟아 붓는다.

 

그리고는 하나 하나 흐르는 샘물에 고구마를 예쁘게 씻어서 소쿠리에 담는데 저만치 밭 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분명 아까 그 숲을 헤치고 남자가 지나간 쪽인데 이번에 들리는 소리는 분명히 여자소리다. 울음인가? 신음인가?

소향은 벌떡 일어서서 귀를 기울이지만 발자국은 떼지 않았다. 해가 남아있기는 해도 마을 한 귀퉁이에 있는 밭은 인기척이 드물기 때문이다.

가만히 서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하려는데 저쪽 밭 끝에서 여자가 일어섰다가 다시 풀숲으로 숨어든다. 분명히 여자다. 그런데 다시 그 여자가 일어서더니 또 풀숲으로 숨어든다.

 

소향은 몸을 움직이지도 않고 선 채로 응시하는데 가만히 보니 그 여자가 숲속으로 숨는 게 아니고 풀숲 속으로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서고 또 쓰러졌다가 일어서곤 하는 것이다.

이제는 아예 기어대는 모습인가 풀이 누운 채로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사람이다. 그것도 여자다. 무엇인가 불안한 예감으로 소향은 후다닥 고구마 골을 건너뛰어 기어대는 여자 쪽으로 뛰어간다.

 

중간쯤 가서 일단 발을 멈춘 소향은 상황을 다시 확인한다.

밭이 원체 큰 탓에 한쪽 끝에서는 다른 한 쪽 끝의 소리나 물체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지만 반쯤 남긴 거리에서는 확실히 그 여자가 누군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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