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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털보무당의 조언에 따라 합방을 더 이상 늦추지 않기로 마음먹은 큰아지매가 태섭을 대동하고 의원한테 다녀오는 길이다. 태섭에게는 가을이 되고 하니 보약이라도 한 재 짓자고 했다. 자기를 진맥하는 동안 태섭을 나가라 하고 슬며시 의원에게 당부하여 후손을 보도록 남자에게 도움이 되는 약재를 부탁한 것이다. 미심쩍은 듯 눈알을 굴려대며 궁리하는 의원의 속마음을 모를 리 없는 큰아지매다. 하지만 체면이고 소문이고 떠나서, 작정하고 시작하는 일이니만큼 최대한 성공률을 최단시간에 노리고자 하는 큰아지매다. 이왕 짓는 약이니만큼 또 이왕에 의원에게 하기 어려운 속사정을 말한 만큼 소향의 약도 한재 들고 오는 중이다. 정기를 나오는 동서를 보고 -자네 이것 좀 받아주게- 하고 팔을 뻗어 약봉지를 내미는데 광수에미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으로 휭 나가버린다.
댓돌에 신발을 벗던 태섭도 그 모양새가 눈에 선지라 고개를 돌려 광수에미와 마누라를 번갈아 본다. 어이가 없는 큰아지매는 말을 하지 못한다. 이런 경우는 기억에도 없기 때문이다. 한참을 그 자리에서 대문 쪽을 응시하던 큰아지매는 몸을 돌려 정기로 들어서는데 정기 부뚜막에 소향이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웅크리고 있다.
아무 말 없이 소향의 흐트러진 매무새를 본 큰아지매는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직감하고 약봉지를 찬장 위에 올려놓고 그대로 정기를 나온다. 그때까지 건넌방에 들어가지도 않고 마루에 서있던 태섭이 눈을 크게 뜨고 마누라한테 묻는다. -무신 영문이요? 제수씨가- 들은 척 만 척 신을 벗은 큰아지매는 정기를 향해 소향에게 말한다. -너 좀 들어와라- 태섭은 더 이상 자기가 코를 들이밀 일이 아니라 생각하고 방으로 들어가고 소향이 치마를 툭툭 털어대며 정기를 나와 안방으로 들어간다. 들어서는 소향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방바닥을 손으로 훔쳐대던 큰아지매는 소향이 앉자마자 묻는다. -무슨 일이냐?- 소향은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큰아지매가 다시 묻는다. -그저 내 말만 믿고 기다리라고 했는데…. 동서하고 무슨 일이 있었나? 말해 보거라- 말하는 목소리에는 전혀 높낮이가 없이 아주 차분하지만 큰아지매 특유의 냉정함이 서려있다. 소향도 이렇게 머리 조아려야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래를 한 것 아닌가? 자기가 이집에서 죄인처럼 고개숙여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말했심더- 짧게 한마디 하는 소향이다. 사실 길게 하자니 구차할 것 같아서 거두절미해서 한 말이다. 문 앞에 드린 발에 그려진 봉황을 한참 쳐다보던 큰아지매도 짧게 묻는다. -왜?- 잠시의 간격이 둘의 머릿속을 각각 정리하는 참이다. -하도 닦달을 해서예- 더 이상 큰아지매는 말이 없다. 추분을 지난 지 어젠가? 날이 벌써 어두워졌다. -이제 당분간 동서가 이집에 안 올 것이니 너가 부엌살림 좀 챙기도록 해라. 나도 같이 돌볼 테니. 때가 됐으니 저녁 차리자- 소향에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하자고 하는 큰아지매다. 속이 후련해짐을 느끼는 소향이 발을 들추고 마루로 나와 어두워진 앞산을 보고 숨을 길게 내쉰다.
들판이 비어졌다. 까치나 참새가 떨어진 곡식을 찾아 여기저기 날아들 뿐 중간 중간에 쌓인 짚단가래 빼고는 거의 황량한 상태다. 상달이 접어들었으니 이제는 홑적삼이나 바지는 한기를 몰고 올 정도다. 오늘도 태광이 치부책을 들고 남은 몇 집을 돌고 있다. 매해 해오던 일이라 무슨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올해만큼은 특별하다. 기분이 좋아서 특별한 것이 아니고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근 한 달 가까이 마누라한테 시달림을 당하고 솟을대문 안에 발걸음을 끊은 채 소작꾼들한테 도지를 받으러 다니고 있다. 이제 거의 끝나가는 일이지만 주섭이네와 신흥에 있는 두어 집이 남아있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갈 일인지 태광도 답답하고 속이 타지만 태섭이가 알아서 입을 열지 않으니 섭섭하고 화가 나지만 이 모든 것이 안방 차지하고 있는 그 능구렁이 같은 형수 탓이렷다. 그래도 그렇지 무슨 사내자식이 마누라 하나 제대로 휘어잡지 못하고 사는지 답답하기 그지없다.
태섭은 속으로 생각해 본다. 몸탱이를 휘젓고 다니며 목소리는 또 굿판에 떠들어대는 무당같이 걸쭉한 마누라지만 자기가 눈빛 한 번 노려보면 지개 작대기로 한 방 맞은 개마냥 꼬리를 감추고 슬슬 몸을 숨기지 않는가? 그게 사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집안 제대로 다스리는 일인데 형님은 어찌된 일인지 그 서울내기 형수한테 쥐여 잡혀 사는지 모를 일이다. 예전 같으면 벌써 소박맞고 친정으로 돌아갔으련만 시대가 좋아져서 적자 하나 없이 살아도 오히려 큰소리치며 살림을 통째로 움켜잡고 있겠다?
하지만 실상 그런 생각을 하는 태광도 참으로 묘한 일이다. 언제부터인지 또 무슨 일로 그리되었는지 모르지만 형수한테는 그저 그렇게 되었다. 딱히 그렇게 될 사건도 하나도 없었고 또 이유도 없는데 그저 그 서울내기 앞에서는 묘하게도 풀 먹인 옷 입은 것처럼 그저 불편하고 어색한 것이다.
-어이, 주섭이 있나?- 누렁이 한 마리가 마루 밑에서 나오지도 못한 채 낮이 익지 않은 자의 방문에 그저 짖고 있다. 부르는 소리보다 개소리에 인기척을 느꼈는지 방문이 열리고 주섭이 앉은 채로 문고리를 잡고 있다. -행님 아인교? 들어 오이소.- -인자는 방에 불 넣어야 된데이. 몸은 잘 건사하고 있제?- 낮은 문을 피해 고개를 한껏 숙이며 방으로 들어서는 태광이 인사치레로 한마디 한다. -안 그래도 아침에 짚단 좀 땠심더. 누부있자이 등짝이 따시야지예- -글체. 그저 건강해야제-
막상 오긴 왔지만 동네가 다 아는 주섭이 사정이다. 그렇다고 적선하며 농사짓는 것이 아니니 따질 것은 따져야 할 판이지만 여름에 샘 친다고 우물 속에 있다가 무너져내리는 돌에 어께를 크게 다친 주섭이라 막판에 농사일을 제대로 마무리 하지 못해 소출이 적었고 또 집안어른 환갑이다 하여 생각보다 많은 지출이 생겨 약속한대로 도지를 내주고 나면 겨울날 양식도 없을 지경인 주섭이다.
-행님, 행님도 다 아시잖습니꺼? 지 사정을… 그라이께네… 올해는 좀 봐주이소. 내년에 지가 몸이 성해지몬 그때야 지가 행님한테 어려분 소리 하겠심니꺼?- -이사람아, 내가 오데 안 봐주나? 아, 남들 몫 반만 하자는데 그만 하몬 됐제. 니도 함 생각해 봐라. 만일에 니 맨치로 사람마다 에로분 소리 해대민서 약속대로 안 하몬 그기 오데 약속인가? 니도 알지만 그래도 우리 도지는 인근에 비하몬사 후하제. 니도 안 아나? 카이께네… 고만 삼할만 내놓고 마무리 하제이. 내도 인제 이 짓 안 할란다. 올해가 마지막이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주섭이다 -예? 무신 말씸입니꺼? 안 하다이요?-
주머니에서 권련을 빼물어 불을 댕긴 태광이 한 모금 길게 내뿜고 나서 대답을 한다. -안 하는기 아이고…. 내도 인제 내 농사짓자는 기지. 맨날천날 행님 일 하다 날 세고 있다 아이가?- 이미 동네사람들 모두 알만큼 알고 있는 일이라 그리 새삼스럽지는 않다. -아. 그말씸…- 주섭은 별일 아닌 것처럼 치부하고 슬며시 태광이 방바닥에 내놓은 권련에 눈을 준다. -행님. 지도 이거 한 대- 하면서 태광을 본다. -응, 그래. 한 대 태아라- -이기 그 라키 스트락꾸 하는 긴가 보지예? 맛이 우떨란가?- 미제 담배는 피우다 걸려도 벌금인데 태광은 어디서 구하는지 럭키 스트라이크를 구해서 피운다.
한 모금 빨아당긴 주섭이 길게 내뿜으며 맛을 음미하다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카~ 행님. 이건 와케 독합니꺼? 양넘들은 우째 이런 걸 피우는지 모리겠네- -글나? 케도 맛은 역시 양담배 아이가? 잎담배 말아피우몬 씹어서 못 피운다- 능글맞게 담배를 피워가며 은근히 자랑하는 태광이다. -아, 행님이사 양담배 아이라 양공준들 몬 사겠심니꺼? 맘만 묵으몬. 지들이야 언감생심 생각도 몬 할 일이지. 그나저나 회장님이 마이 주신답니꺼?- 뭘 묻고 있는지 태광은 알지만 모른 채 되묻는다. 사실 그 대답이 자신도 아직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 뭘?- -아, 모긴 몹니꺼? 논이고 밭이고 하는 기지. 대갓집 작은아들인데…. 행님만치는 아이래도 그래도 엥간히 물리받겠지예?- 남의 집 속사정도 모르고 떠들어대는 주섭이 태광의 눈에는 황당하게만 보인다. -내도 아즉 모리겠다. 행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우짜든지… 니는 그리 알고 삼할로 한데이. 됐제? 니가 알아서 실고 오든가 아니몬 몸도 아프고 하이 내가 하든가. 우짜든지. 내기 연락하래이. 내는 가볼란다- -행님도…. 이할만 돼도 나을낀데… 야박하시기도- 하면서 몸을 일으키는 주섭이다. 말이니 그렇게 할뿐 실은 삼할도 남의 반몫이니 감지덕지일수밖에, 몸을 다쳐서 고생은 했지만 몸 고생하여 그나마 그만큼 얻은 것이 다행인 주섭이다.
주섭의 집을 나선 태광은 신흥까지 가기가 싫다. 신명나는 일도 아니니 그럴 수밖에, 발걸음을 돌려 함창읍내 쪽으로 걸어간다. 대폿집이나 들러서 목을 축일 생각이다. 술 한잔 할 술집이 동네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술맛이 안 날 것이라 조금 멀어도 읍내로 나간다. 한참을 걸어서 동네를 굽이치며 벗어날 쯤에 저만치에서 태섭이 오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오는 태섭도 태광을 알아보고 가까이 왔을 때 자전거에서 내린다. -오데 가노?- -지예? 뭐 좀 살끼 있어서 읍네 가는 중입니더. 행님은 오데 댕기오시는교?- -음. 자유당 당원들 회의가 있어 점심하고 오는 중이다. 댕기오니라- 하면서 자전거 안장에 엉덩이를 올리는 태섭을 보고 태광이 자전거 손잡이를 잡고는 -행님, 지캉 얘기 좀 하입시더. 조조 주막에 가서. 좀 디릴 말도 있고- 무슨 말을 할지 태광도 대충은 짐작이 간다. -내는 지금 술 못 묵는다. 와? 무신 말?- -술을 못 묵다이요? 사흘두리 술 자시는 양반이 무신 말인교?- -아~ 요새…. 무신 약 묵는다꼬 묵지 마라 케서. 그래, 가자. 아, 술 안 묵는다꼬 주막에 못 갈끼야 없제- 하고는 안장에서 내려 자전거를 끌며 태섭과 걸음걸이를 맞추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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