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칼럼 ‘블럭의 한 곡 들여다보기’가 연재됩니다. 필자 블럭(bluc)님은 음악평론가이자 음악웹진 “웨이브”(weiv)의 운영진입니다. [편집자 주]
니키 미나즈와 페미니즘과의 연결 고리?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 곡은 추천하고 싶어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야겠다. 사실 니키 미나즈(Nicki Minaj)가 만들고 발표한 대부분의 곡들이 폭력적이거나 과잉 성욕화를 보여주고 있으며(‘엉덩이’로 점철된 가사 등), 이 여성 래퍼 자체가 다분히 성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반면, 그녀는 힙합 음악 안에서는 굉장히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뮤지션이기도 하다. 각종 시상식에서는 미국에 있는 모든 여성 래퍼를 압도하고,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앨범 판매량도 엄청나고 그만큼 뛰어난 평가와 팬들을 가지고 있다.
니키 미나즈는 잘한다. 단순히 잘한다 이상이다. 랩에서 극단적인 흐름을 아무렇지 않게 만들어내는가 하면, 노래와 랩을 그야말로 가지고 노는 정도의 여유와 기술을 선보인다. 그녀는 랩의 역사를 다시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 존재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개념인 셈이다.
그런데 최근 미국 언론이나 음악계에서는 니키 미나즈를 새로운 페미니즘의 아이콘으로 여기는 듯하다. 니키 미나즈의 곡을 페미니즘의 입장이라고 해석하거나, 여성주의적으로 그녀를 재조명하는 기사와 의견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몸에 보정물을 넣고 성형을 감행해가며 섹슈얼한 몸과 얼굴을 드러내는 그녀가 페미니즘의 아이콘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그녀는 긴 시간 동안 자신의 엉덩이를 자랑하며 섹스 어필을 해왔고, 섹스에 관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자신보다 못한 남성과 여성 모두 깔아뭉개며 힙합 특유의 자기 과시, ‘내가 최고’임을 과시해왔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사용한 대부분의 비유나 문장들이 성적인 코드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 니키 미나즈는 하이퍼섹슈얼(hypersexual, 과잉성욕자)의 대명사쯤으로 여겨지곤 한다.
다만, 니키 미나즈는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무대 밖에서, 음악 밖에서, 여성에 대한 성녀/창녀 콤플렉스를 보여주는 대중의 이중 잣대와 음악 시장의 여성혐오에 대해 이야기해왔다. <Vlad>라는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단순히 산업 시장이 원하는 대로 귀엽고 예쁜 이미지를 하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가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으로서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고, 다른 팔릴 만한 것을 만들어내고 싶었다’고 한 바 있다. 그 결과가 지금의 이미지라는 점에서는 별로 좋은 결과라고 할 수 없지만, 니키 미나즈는 자신의 음악과 비주얼이 굉장히 능동적이라는 걸 강조했다.
MTV와의 인터뷰에서는, 자신이 쓰는 ‘bitch’라는 단어는 여성혐오의 뜻이 아니며, 힘있고 단정적인 사람을 부를 때와 같은 상황에서 남성은 ‘boss’라 불리지만 여성은 ‘bitch’라 불린다고 말했다. 또 음악 시장이 가지고 있는 ‘여성 혐오’와, 그들만의 리그 속에 여성이 체감하는 진입 장벽에 대해 여러 매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말해왔다. 이런 맥락을 봤을 때 니키 미나즈는 일정 부분 투쟁하고 있는 면모를 보여온 셈이고, 가사도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닐 수 있겠다 라고 다시 생각해볼 만하다.
성적인 ‘자기 과시’ 이면에 무엇이 있을까
내 생각에, 니키 미나즈는 다분히 이중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니키 미나즈를 볼 때, 일차적으로 드러나는 섹슈얼한 비주얼과 가사, 음악으로 판단하게 된다. 앞서 이야기한 그녀의 다양한 맥락이나 의미는 그녀에게 음악 이상의 더 깊은 관심을 가진 이후에야 인식될 수 있는 정보이다. 물론 미국에서의 인지도나 영향력은 상당하기 때문에, 니키 미나즈가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나는 그 이야기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만약 내가 니키 미나즈라면, 해명 수준의 이야기보다는 스스로 ‘여성 괴물’을 자처했다고 말할 것 같다. 그녀가 ‘바기나 덴타타’(Vagina dentate, 이빨 달린 질)의 개념을 사용하고자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사에서 그와 흡사한 비유를 종종 쓰고 있기도 하다. 남성을 잡아먹는 여성, 혹은 남성을 눌러 이기는 여성의 모습을 아예 한 곡 전체에서 쏟아낸 경우도 있다.
바바라 크리드의 <여성 괴물>(The monstrous-feminine, 1993. 공포영화를 통해 정신분석학적으로 가부장제 사회에서 공포의 본질을 분석한 저서)에도 등장하듯, 남성이 여성에게 느끼는 공포는 여성(숨겨진 질과 자궁, 월경, 생명을 창조하는 힘)이 거세당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남성을 거세하는 존재여서이다. 니키 미나즈는 ‘거세하는 존재’로서 여성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최근 니키 미나즈는 “Anaconda”라는 신곡을 냈다. 미국 언론 <Mic.com>은 이 곡이 ‘설 믹스-어-랏’(Sir Mix-A-Lot)의 “Baby Got Back”을 차용하여 의도적으로 기존 곡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전복적으로 사용한다고 분석했다. 기존 곡은 노골적으로 여성의 신체 부위를 예찬하고 큰 엉덩이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미디어에 등장하는 마른 여성을 조롱한다. 그러나 “Baby Got Back”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여기고 몸과 섹스에 집착한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마초적이다.
반면 니키 미나즈는 “Anaconda”에서 마돈나의 가사를 인용한다든지 하며, 기존 곡이 가진 남성과 여성 간의 관계를 깨고 페미니즘에 가까운 이야기를 한다고 <Mic.com>은 보도했다. 이 미국 언론이 하는 이야기가 맞는지에 대해서는 일단 내 의견을 보류하는 바이다.
페미니즘은 한 가지 이슈나 주제에 국한되지 않고, 그것을 정의하고 표현하고 또 행동하는 방식은 정말 다양하다. 그러나 니키 미나즈를 지금 미국 언론들이 바라보는 방식으로 봐도 적합할 지에 대해선 선뜻 동의가 되지 않는다. 성적인 자기 과시 이면에는 나름의 생각과 의견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녀의 음악이나 이미지를 단순하다고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이 선보여온 파편화된 모든 맥락들을 끌어안고, 큰 갈래를 하나의 작품으로 풀어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니키 미나즈와 페미니즘과의 연결 고리에 대해 동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미국 언론은 새로운 페미니즘 아이콘을 세우고 싶어하고 그 아이콘을 찾아나서는 경향이 있다. 특히 팝 음악 시장 안에서 더욱 그러하다. 팝 컬쳐와 페미니즘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그 주인공이 능동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언론이나 시장의 프레임에 의해 구축되는 것을 볼 때 조금 씁쓸하다. 뮤지션이 어떤 발언을 하거나 활동을 할 때, 그 중심을 본인이 가지고 있어야 그 영향력과 수명이 오래 가는 법이다.
이 기사 좋아요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블럭의 한곡 들여다보기 관련기사목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