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깊은 동짓달 밤이다. 바람이 세차게 바싹 마른 감나무 가지를 후려치는 소리를 낸다. 이불속에서 눈을 감고 있는 소향은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을 재고 있다. 오늘따라 웬일인지 영감님이 잠이 들지 않는 것이다. 빨리 잠이 들어야 아래채 자신의 방으로 갈 수 있는데. 자신의 몸 위에 올려져있는 영감의 손이 무거워 죽겠다. 다행히도 처음처럼 무슨 송충이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이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생각된다. 배를 불쑥거리며 숨을 쉴 때마다 걸리적거리지만 소향은 스스로의 손으로 치우는 것이 어쩌면 영감의 잠을 깨울 수 있다는 생각에 한없이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영감의 숨결이 잠이 깊게 들었는지 아닌지 이제는 알 수 있을 만큼의 소향이 되었다.
-니는 오늘도 니 방에 갈래?- 잠들기만 기다리고 있던 소향은 난데없는 태섭의 말에 실망감을 느낀다. 잠이 들긴 틀린 모양이다. 기왕에 그리 된 이상 우선 숨쉬기부터 용이하게 해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어 배위에 있는 태섭의 팔목을 들어 옮긴다. 한숨이 길게 나올 정도로 시원하다. -예- 태섭으로서도 아침에 혼자 일어나는 것이 편하다. 누구를 의식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 아침밥상을 들여다 주는 소향에게도 마치 어젯밤의 일은 없는 양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밤에는 잠이 들지 않는다. 지난 스무 며칠 동안 가끔은 아침에 잠이 깨었을 때 소향이 옆에 있었으면 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오늘이 동짓달 열사흘이다. -오늘은 기냥 여서 자거라- 두꺼운 솜이불 속에서 구들장의 온기가 등짝에 전해지는 동안에는 동짓달 한기도 그저 남의 얘기다. 천장만 바라보고 누워있는 자세가 불편했던지 태섭이 소향을 향해 돌아누우며 다시 그 무거운 손을 소향의 가슴팍에 올리고 하는 말이다.
소향은 할 말이 없다. 그동안 둘이 주고받은 말수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태섭도 사실 할 말이 없다. 나눌 정도 없으니 말거리가 생기지 않고 수십 리 떨어진 절간에서 합장하고 있을 마눌의 얼굴이 늘 눈앞에 얼른거리는 것이 또 다른 이유였다.
소향도 다르지 않다. 영감이 자리물 좀 들이거라 하고 귀뜸할 때마다 광수하고 재수를 집에 보낼 핑계를 만들고 공책위에 연습하는 글씨가 머리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내야 하는 태섭의 사내짓에 시간이 갈수록 더 어색해지는 소향이다. 소향으로서 가장 편한 시간은 아래채 자신의 방에서 네 활개를 펴고 잠자는 시간이다.
-니는 뭐 묵고싶노?- 할 말이 마땅찮다 보니 하는 말마다 두서가 없이 나온다. 태섭은 속으로 자신이 우습게 느껴진다. -낼이 함창 장날이라… 내는 니 묵고 싶은 기 있으몬… 사다줄라꼬- 변명하는 태섭은 자신이 또 한번 우습다. 여전히 천장만 바라보고 누워있는 소향은 자신의 가슴팍에서 꼬물거리는 영감의 손을 당장 치우고 싶지만 몸을 움직일 능동적인 의지가 없다. 이 방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영감이 숨을 푹푹 내쉬고 코를 풀풀거릴 때까지는 자신은 그저 죽었소 하고 내다 맡기고만 있어야 하는 것이 소향이 큰아지매한테 들은 말이다. 너는 그저 사내가 하자는 대로만 하면 된다는. -엄심더- 첨으로 하는 소향의 말이다. 상달보름날 밤부터 지금까지 소향이 한 처음의 말이다.
귀신 우는 소리를 내며 동짓달 바람이 사방을 휘젓고 다니는데도 넉넉히 지핀 장작불이 방안을 덥게 하는 탓에 태섭이 한쪽 다리를 이불위로 올려 이번에는 소향의 아랫도리를 누른다. 속으로 아이구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소향이지만 이 역시도 치울 생각은 못한다. 두꺼운 이불이 누르고 사내의 무거운 다리가 짓누르고 그리고 또 팔 하나가 가슴팍 위에 올려져있고, 소향은 마치 바위에 눌린 느낌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다. 하지만 스스로 몸을 움직이는 것이 마치 큰아지매와의 약속을 깨기라도 하는 것처럼 엄하게 생각이 드는 소향이다. 그래도 숨은 쉬어야 할 지경이라 소향은 작심하고 몸을 모로 돌려 양감의 숨결이 머리 뒤쪽으로 향하게 한다.
태섭은 그런 소향을 탓하지 않는다. 의식을 행하고 있는 둘의 모습에 무슨 말이 필요하고 따질 것이 있겠는가? 한편으로는 절간에 있는 마눌이 한동안 오지 않았으면 하고 헛바람을 마음에 넣어본다. 그동안 기방에서 품어보았던 근본도 모르던 여인네들하고는 소향은 무언가 많이 다르다. 갑자기 엊그제 읍내에서 만난 유지 한 사람이 너털웃음을 내며 소실을 두셨다면서요? 하고 물었던 말이 기억난다. 태섭은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예… 하고 짧게 답만 했다.
겨우 스무날이 지났는데 벌써 말은 마을을 벗으나 읍내까지 퍼져나갔다. 그것이 모두 제수씨 입에서 전해졌겠지… 하고 짐작은 하지만 그것 또한 탓할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그 유지가 소실을 두었다는 말을 했을 때 자신은 자랑스러움까지 느끼지 않았던가? 하지만 작첩한 것이 엄연히 아니다. 보름에 마눌이 돌아오면 모든 것이 다 제자리로 돌아갈 것인데. 하지만 아직 후손에 대한 기별은 어디에도 없다. 태섭은 지금으로서는 그런 기별에 별 관심이 없고 그저 풋과일 같은 소향이 좋기만 하다. 아쉬움에 오늘밤은 아래채로 가지 말고 자기방에서 아침을 밝히자고 말을 건넨 것이다. 막상 그 말을 하고나서 생각해보니 아침에 부스스하게 일어날 자신의 모습이 어설프다.
-보름이 이틀 남았나?- 또 엉뚱한 말이 입 밖으로 나온다. 그 말뜻은 소향도 정확히 안다. 작은 아지매가 보름에 큰아지매가 돌아온다고 서너 번 말했기 때문이다. 소향은 조바심이 난다. 빨리 몸에서 무슨 기별이라도 있어야 되는데. 실은 닷새 전에 달것이 비추어서 속으로 실망을 했었다. 다 하늘이 하는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잠도 설쳐대며 언제까지 이렇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고역을 감당해야 하는지 그저 아득하기만 하다. 하늘님… 빨리 삼천포로 가게 해주이소… 소향은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는 귓전에 기다리던 그 영감님의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풀풀거리더니 이어서 쿡쿡거리던 숨소리가 이제는 대장간 풀무소리마냥 쉭 하고 새나가기도 한다. 잠이 깊게 들었다는 소리다. 비로소 소향은 조용히 몸을 돌려 이불을 들추고 빠져나와 고양이 걸음으로 아래채로 왔다.
막혔던 숨결이 터진 것처럼 깊게 숨을 두어 번 쉬고는 이불위에 털썩 주저앉는다. 이제 큰아지매가 돌아오면 자리물을 들일 일은 없어지겠지만 그 다음은 어떻게 되나? 하늘님이 알라를 안주시면? 울엄마를 언제 보게 되나? 빨리 삼천포로 가야 되는데… 아무것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인다. 소향은 이불위에 푹 쓰러지며 오직 난감할 뿐이다. 큰아지매가 다 알아서 하시겠지. 그리고 늦은 잠에 빠진다.
* * *
- 소향아 불 좀 꺼내라 눗겠다- 가마솥을 나무주걱으로 저어대던 광수에미가 아궁이 앞에서 졸고 있는 소향에게 주문한다. 따신 불기운에 그만 어젯밤에 모자란 잠에 깜박한 소향이다. -예?- 하고 정신이 든 소향이 올려보고 광수에미에게 다시 묻는다. -니 조나? 불 빼라꼬! 눗는다- 마치 역정을 내는 것처럼 소릴 지른다. 동짓날이라 팥죽을 쑤고 있는 둘이다. 소향은 서둘러 활활 타고 있는 장작을 아궁이 밖으로 빼내고 물을 끼얹어 끈다. 매캐한 연기가 정기를 가득 메우는데도 광수에미는 주걱질을 계속하고 소향은 타다만 장작을 정기뒷단으로 옮겨 연기를 줄인다. -다 빼지 말고 미긴하이 때야지. 새알이 익제. 니가 저어라. 내가 불봐야 되겠다-
소향은 정신이 없다. 잠에 취해서 정신이 없고 매운 연기에 정신이 없고 광수에미가 주문하는 말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정신이 없다. -빨리 젓지 말고 천천히 안튀게 밑전을 저어래이- 아궁이를 들여다보며 불기운을 약하게 조절하면서 광수에미는 소향을 보지도 않은 채 말한다. -작년에는 팥죽을 몬 무웃다 아이가? 대신 시루를 했다- 연기에 눈물을 닦아내며 엉덩이를 정기바닥에 댄 채 이번에는 부뚜막에 걸터 있는 소향을 올려다보며 광수에미가 하는 말에 -와예?- 소향이 묻는다. -애동지라 케서… 작년에는- 동지가 일찍 드는 애동지에는 아이가 있는 집에서는 아이들에게 이롭지 못하다고 팥죽을 쑤지 않고 대신 시루떡을 해먹는 풍습을 말하는 것이다. 일렁거리는 팥죽을 나무주걱으로 저어대는 소향은 문득 포구에서 본 노가 생각난다. 노끝이 나무주걱처럼 널찍이 생겼고 어부들이 그 끝을 물속에서 일렁대며 저어대는 것이 생각난 것이다.
-아아들이 일찌거이 오디만…. 니 어젯밤에 광수 큰아부지 방에서 잣제?- 갑자기 묻는 질문에 소향이 당황스럽다. 소향도 작은아지매가 모른다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물어대니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아무 말도 않고 그저 주걱질만 해댄다.
광수에미도 대답 없는 소향에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렇지만 궁금해 죽겠는 광수에미다. 이미 동네아낙들에게 수다는 실컷 떨어댔지만 괜히 더 알고 싶은 마음이다. 실상은 다 그렇고 그런 일일 텐데도…. 광수에미는 연신 불을 살피고 소향은 노 젓듯이 팥죽을 일렁거려대는데, 둘의 말없는 시간이 잠시 흐르는 사이에 대문에서 사람소리가 들린다.
-적선 좀 하시이소. 찬밥이라도 한 덩이 보태 주이소- 오후햇살이 길게 늘어진 짧은 겨울 낮이 거의 지나가고 있다. 아마도 끼니를 걱정하는 거지들이 구걸을 하러 온 것이 분명하다. -소향아. 인제 다 됐을 끼다. 숯도 빼고 솥뚜껑 닫아라. 뜸 들구로- 거지들 소리에는 신경도 안쓰고 소향에게 이르는 말을 남기고 광수에미는 정기뒷단으로 나가버린다. 아마도 연기에 시든 눈을 말리려는 모양이라고 생각 든 소향은 시킨 대로 하면서 다시 대문에서 나는 거지들의 소리를 또 듣는다.
-아지매요. 우짜까예?- 정기 뒷문가에 서있는 광수에미에게 거지들을 어떻게 할까를 묻는다. 그동안 대갓집에 찾아온 거지들을 그냥 보내지 않는다는 것을 소향은 익히 알기에 큰아지매가 없는 지금 작은아지매의 결정을 묻는 것이다. -아, 지신도 안했고, 우리도 안 무웃는데 우째 넘부터 미기노? 안 된다!- 우뚝 선 채로 뒷담 너머로 얼굴을 향하여 하늘을 보고 광수에미가 하는 말에 소향은 -지신이 뭡니꺼?- -아, 팥죽을 집가에 뿌리는 기다. 액 물러 가라꼬!- 소향은 이제야 기억이 난다. 엄마가 작은 냄비에 끓인 죽을 꺽은 솔가지로 찍어 집주위에 뿌리던 것이 바로 그것이로구나 하고. -찬밥도 없는데. 우짜지예?- 그냥 보낼 것이 마음 편치 않아서 광수에미에게 되묻는다. -우짜긴... 그냥 가라 케라. 밥 엄따고-
소향은 아니다 싶다. 자신도 덕을 베풀어야 덕을 받을 수 있는법. 지금 자신은 어느 누구보다도 더 간절히 덕이 필요한 사람이다. 천지신명이 도와야 아이를 주실 것 아닌가? 소향은 두리번거리며 사발을 찾아 족대로 팥죽을 반쯤 채운 후 광수에미를 부른다. -아지매. 이거 한번 잡사 보이소- 숟가락으로 한 숟가락 떠서 광수에미의 입가에 대주니 뜨거운 것을 후 불며 입맛을 보고 -잘됐다. 무울 만하다- 스스로 대견한 듯 허리를 편 후 소향의 얼굴을 향해 웃는다. 소향은 정기 구석에 놓인 솔가지를 하나 꺾어서 팥죽 담긴 사발과 함께 집을 돌며 찍어 뿌린다. -니 지금 모하노?- 광수에미는 기가 찬 모양으로 소향의 그런 모습을 보며 묻고 소향은 들은 체도 안하고 여기저기 뿌려댄 후 다시 정기로 돌아와서 -인제 됐심더! 지신도 했고예. 아지매가 잡샀으이… 인제 저 사람들 좀 조서 보냅시더!- 광수에미의 허락을 구하는 눈으로 말의 꼬리가 올라갔다.
비로소 광수에미도 소향의 그 뜻을 짐작했다. 자신이 아까 정기 뒷단으로 간 뜻은 혹시라도 하는 마음이었다. 문둥이떼라면… 그런데 소향이 지신하기 전이라 안되고 또 우리가 먼저 입을 대지 못한 먹을 것을 주지 못한다고 한 말을 소향이 다 알아서 치룬 것이다. -아이구. 이것아… 그래라! 니가 알아서 해라. 하긴 이 죽을 다 우짜겠노? 입도 몇 안 되는데 죽은 한솥이니. 동네잔치를 해도 안 되것나?- 하면서 한편으로는 소향이 다시 보인다. 자신은 정기에서 꼼짝도 않고 소향이 거지들에게 팥죽을 퍼주는 것을 빼꼼히 내다보니 다행히 문둥이가 아니고 거지였다. 다행이다 싶은 마음 한 구석에 이런 날 이 따신 죽 한 그릇을 못주다니 하는 오라버니에 대한 아린 마음도 또 든다.
헛기침 소리가 들리고 돌계단을 오르는 아주버니 구두소리가 들려서 광수에미는 정기간을 나서서 인사를 하려는데 아주버니 손에 들린 물건이 눈에 띈다. -오싰네예- 태섭이 적이 당황한 듯 먼저 인사를 한다. 광수에미의 눈은 여전히 태섭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보면서 -예. 동지 아입니꺼? 팥죽 쑤느라고예- 소향은 어느새 정기로 들어가고 태섭은 손에 든 큰 보자기를 마루위에 놓고는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광수에미를 보고 -요새 광수하고 재수가 공부한다꼬 아래채에 있길래 무라고 장에서 샀심더. 주이소- 하고 들어간다. -아? 예- 광수에미는 보자기를 덥석 들고 정기로 와서 부뚜막에 올려놓고 바삐 풀어본다. 속에는 센베이며 오다마 사탕이며 심지어 연필에 공책도 두어 권 들어있다. 광수에미는 이런 아주버니를 본 적이 없다. 태섭에게 조카들인 광수나 재수에게 돈푼은 준적이 있지만 손에 무얼 사들고 다닌 적은 본적이 없었다. 봉지를 뜯어서 입에다 집어넣고 우물거리며 -이거 참 맛있다. 아나 니도 무봐라- 소향에게 주려고 산 것을 알지만 짐짓 모른 채 광수에미는 먼저 먹으면서 인심 쓰듯 소향에게 한 조각 내민다. 소향도 저것이 어젯밤에 영감님이 장에서 사다주랴? 했던 것이구나 하고 알지만 탐내는 마음 없이 몽당빗자루로 아궁이 앞을 쓸어 넣으며 -아입니더! 광수하고 재수 주이소- 하지만 속으로는 입맛을 다신다. 그 마음속에는 삼천포에 있는 종락이가 생각나서였다.
이 기사 좋아요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
많이 본 기사
일다의 방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