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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시집올 때 가지고 온 벽시계가 오늘따라 유난히도 그 소리가 귓전에 사납게 들린다. 큰아지매는 끝이 너불대는 밧줄처럼 마음이 어수선하다. 어제 보살이 남긴 말마디가 지워지지 않고 괴롭히고 있다.
하지만 사실 그녀도 마음 한구석에는 무슨 수를 내지 않고는 이렇게 공들이고 돈 들인 일이 사단이 날 수도 있다는 초조한 마음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라 종갓집 며느리로서 그럴싸한 핑계를 들여 발걸음을 하고자 궁리를 하고 있는 중이고 또 이번에는 어디로 가야 할까 하는 것도 곁들여 머리를 쥐어짜고 있다.
한편으로는 서글픈 생각도 드는 큰아지매다. 내로라하는 집안에서 났고 내로라하는 집안으로 시집와서 내로라하게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막상 잠시 동안 몸 붙일 곳을 찾으려 하는데도 절간 빼놓고는 갈만한 데가 떠오르질 않는 것이 한심하다. 시집온 지 거의 이십년이 다 되도록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단 말인가? 회한이 몰려오는 큰아지매다.
아침에 넣어놓은 불기운에 구들이 온몸을 녹이는 중이지만 지금 한가히 낮잠에나 빠질 때가 아니다 싶은 큰아지매는 벌떡 몸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대승사에서 돌아온 지도 어언 달포가 되어 가는데 그동안 한 번도 영감이 소향을 찾지 않았고 소향 또한 감히 대청을 가로질러 건넌방으로 갈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을 큰아지매는 알고 있다. 탓할 생각은 없다. 자신이 소향을 후차서 건넌방으로 밀어 넣을 생각도 전혀 없고 하지만 뒤끝이 타고 있는 큰아지매다.
-소향아- 문을 열고 밖으로 몸을 빼내 부른다. 마당 한쪽에서 낫을 들고 무언가를 깎고 있던 장씨가 안방을 보고는 다시 아래채 소향의 방 쪽을 향해 큰소리로 부른다. -소향아! 부르신다!- 소반 위에서 무언가 열심히 적고 있던 소향이 얼른 연필을 놓고 나서며 대답부터 한다. 그 옆에는 아침을 먹자마자 구들을 지고 낮잠에 빠져있는 털보무당이 문이 펄럭거려도 모른 채로 여전히 자고 있다. 소향은 열려있는 안방문을 보고 고무신 코도 제대로 꿰지 않고 끌며 돌계단을 오른다. -뭐 좀 하니라고예- 괜히 핑계를 댄다. 소향이 무당이 삼천포에 갈 때 엄마에게 전해주라고 부탁할 편지를 쓰고 있던 중이었다. 아직은 광수가 보여주는 책만큼은 어림도 없는 글이지만 보살님이 삼천포를 들린 지가 오래 됐다는 말과 함께 그동안의 소식도 변변히 전해준 것이 없었기에 큰맘 먹고 편지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괜찮다. 동서는 어디 있나? 좀 오라고 해라- -예-
대청에 오르지도 않고 그대로 돌아서서 마당으로 나서는데 장서방이 소향에게 -이제 팽이가 다 돼서 닥나무 하러 갈 건데 너도 간다고 했지? 지금 갈래?- -작은아지매만 불러오민 됩니더. 쪼매만 있으이소- 치마를 펄럭거리며 대문을 나서는 소향은 마음이 급하다. 쓰다만 편지를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은아지매도 집에 없다. 소향은 몸을 돌려 샘을 지나 을순이집으로 간다. 어제 그 아지매가 보살님하고 같이 광수네집에 있었으니 혹시 그 집에 있나 하고 간다. -아지매- 불러보지만 아무 대답이 없고 건넌방에서 을순이가 내는 알아듣지 못할 신음소리만 난다. 문을 보니 숟가락 하나가 문고리를 가로질러 꽂혀있다. 밖에서 잠근 것이다.
난감하지만 별수 없는 소향이 발을 돌려 천천히 집으로 돌아오는데 저만치에서 시끌거리는 소리와 함께 창호어마이, 광수에미 그리고 또 샘에서 봄직한 낯익은 아낙들이 함께 몰려오고 있다. -작은아지매요. 큰아지매가 오시랍니더- - 와?- -모립니더. 그냥 찾으시던데예- -보살님은 지금 모 하시노?- -주무시고 있어예- 광수에미는 뒷전에 몰려있던 아낙들을 보고 -너그는 우리집에 가있거라. 내 보살님 모시고 금방 갈 끼다. 아침에 불 넣놔서리 방이 뜨끈뜨끈 할끼다- 좁쌀 한 되박하고 쌀 두어 되로 성이 안찬 무당은 넌지시 광수에미에게 동네사람을 불러오라고, 용한 보살이 왔다고 소문을 내라고 일러두었다. 어차피 발걸음 한 이상 지전이라도 몇 장 건져볼 욕심에서였다.
-와예? 행님?- 방에 들어갈 생각도 없이 대청에 한쪽 궁둥이만 걸친 채로 안방에 대고 부른다. -추운데 들어오지 않고 왜 마루에 앉아있나?- 큰아지매의 말은 고맙지만 한 무더기 여자들이 자기집 안방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가하게 안방에 궁둥이를 붙일 마음이 없다. -괘안심더! 와예?- 눈치 빠른 큰아지매는 저것이 무슨 바쁜 일이라도 있구나 하고 직감을 하고 목소리를 낮춘다. -음. 자네가 안 바쁘면 나하고 함창에 좀 다녀왔으면 했지- 말끝이 벌써 그릇되었다는 듯 희미하게 마친다. -됐네. 내 혼자 다녀와도 될 성싶네. 됐으니 자네 볼일이나 보게- 하고는 문을 닫는 큰아지매다. 광수에미는 팽이를 들고 마무리 낫질을 하는 장서방을 힐끗 보고는 아래채 소향이 방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가고 잠시 후 무당과 같이 나오더니 소리 없이 대문을 나서 집으로 갔다.
장씨를 따라 소향은 고구마밭으로 간다. 괜스레 가슴이 쿵닥거리지만 애써 태연함을 찾으려하는 소향의 모습이 장씨의 눈에도 이상스레 보였던지 묻는다. -너는 무슨 일로 산엘 따라오냐?- 장씨는 비록 소향이 건넌방 태섭이에게 들락거리지만 애초부터 말을 놓고 지내기로 마음을 정했었다. 딸 또래밖에 안된 소향이고 또 어차피 오래 한집에 살지도 않을 거니와 종가에서도 소실이나 첩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상 장씨 스스로도 소향을 편하게 부르는 것이 모두를 이무롭게 하리라 생각해서였다. 단 태섭이 딴지를 걸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그러나 지금까지의 눈치로 보아서는 태섭도 이의를 나타내는 듯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냥예. 뭐 좀 찾아볼 끼 있어서예- 궁색한 변명이라 장씨도 더 묻지 않는다.
소향의 가고자하는 고구마밭의 의도를 전혀 모르는 장씨는 자꾸만 광수가 손으로 가르쳐준 산의 한쪽 끝으로 가려는 듯 고구마밭과는 영 다른 쪽으로 발을 딛는다. -아저씨예. 이리 가이소- -아침에 광수가 그러던데. 저쪽에 닥나무가 많다고- 발걸음을 멈추고 소향의 얼굴을 보며 또 산이라고 말만 산이지 그저 동산일 뿐인 야산의 한 자락을 가리키며 장씨는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이 추운 겨울에 처자가 무슨 일로 산엘 간다고? -그래! 그럼 니가 가자고 하는대로 가보자. 까짓 닥나무야 어디에도 있겠지. 너가 앞장서고 가자!- 소향의 거침없는 발걸음을 따라 이번에는 장씨가 뒤에서 따라온다. 휑하니 빈 고구마밭은 걷어낸 마른 고구마 줄기만 밭가에 수북이 쌓여있다.
소향은 장씨도 안중에 없이 곧장 고구마밭을 가로질러 앙상하게 가지만 내놓고 있는 감나무 쪽으로 갔다. 마른 풀더미가 엉켜있지만 발 디딜 틈은 충분히 보인다. 소향은 치마 한쪽을 걷어들고 이리저리 서성이며 그날 그놈이 뒤뚱거리던 감나무 밑을 왔다 갔다 하며 땅을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걸어보아도 비탈도 없고 몸이 기울어질 만큼 땅이 패이거나 험하지도 않다. -소향아! 뭘 찾나?- 장씨도 소향이 곁으로 와서 눈을 땅에 대고 두리번거리다가 묻는다. -머리삔을 잊어버맀어예. 지난번에 고구마 캐러 왔다가예- -머리핀을? 아이구. 그것이 얼마나 크다고 풀숲에서 찾고 있나? 아서라. 내 다음 장날에 하나 사다주지- 아무것도 모르는 장씨는 그야말로 풀숲에서 머리핀을 찾고 있는 소향이 한심할 수밖에 없다.
소향은 고개를 들어 맑은 오후의 겨울 하늘을 본다. 감나무 끝에 까치밥으로 달린 빨간 감 몇 개가 눈에 들어오지만 마음에는 그 기우뚱대던 놈의 뒷모습이 얼른거린다. 확실하다. 그놈이 확실하다. -아저씨예. 지는 못 찾겠심더. 고만 갈랍니더. 먼저 갈게예- 장씨는 거의 어이가 없다. 평소에는 그리도 순리에 맞게 행동하던 소향이 오늘따라 뭔지 모르게 넋 나간 사람처럼 갈팡질팡이다. -그럴래? 그래라. 나도 몇 개만 하면 되니 금방 갈거다- 저만치 내려가는 소향을 보고는 장씨도 위뜸에 보이는 나무를 향해 발을 옮긴다.
광수네집 안방에 무당이 자리를 펴고 아낙들을 후려대고 있는 동안 광수에미는 정기에서 호박죽을 끓이고 있다. 늙은 호박을 몽당 숟가락으로 벅벅 거죽을 벗겨낸 다음 씨를 발겨내 부뚜막 가에 널어 말리고 칼로 숭덩숭덩 조각을 내어 가마솥에 안쳤다. 미지근하게 오래 끓이면 다 녹아내릴 것이고 다음에 양대도 넣고 밀가루 수제비도 떠 넣을 참이다. 옆에서 창호어마이도 부지깽이로 아궁이를 휘저어대다가 광수에미를 보고 걱정스런 목소리로 한마디 한다. -지릉을 한 사발을 먹이도 꿈적도 엄따. 광수야- 주걱으로 가마솥 밑을 자어대던 광수에미는 연기에 매운 한쪽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머라 카노? 무신 지릉을 믹인다노? 누구한테?- 연신 팔을 휘젓다가 갑자기 알았다는 듯 -을쑤이한테 말이가?- 눈이 왕방울만하게 커진 광수에미가 놀란 눈치다. -그래. 혹시나 그기 아를 떨쿨카 싶어서리. 아바이가 잡아 벌리고 내는 입에 들이붓고 했는데도…. 효험이 없따!-
광수에미는 알만하다. 원치 않는 아이가 뱃속에 들라치면 짠 조선간장을 한 사발 마셔대면 아이가 떨어진다는 소릴 들은 적은 있지만 그렇게 아이를 떼어냈다는 사람은 본적이 없다. -그카다가… 을쑤이 직이겠다. 아이고- 하고는 다시 주걱질을 해댄다. -종가에는 그렇게 원하는데도 안 생기고, 생기몬 안 되는 집에는 와 그리 생기뿌노?- -그케 말이다. 원래 필요 엄따꼬 하민 지천이고, 약에라도 쓸라치몬 눈 씻고 봐도 엄는 기다- 둘은 주거니 받거니 한탄이고 걱정이고 염려스런 을순이 일로 방안에서 일어나는 털보무당의 장단도 까맣게 잊고 있다.
방으로 돌아온 소향은 마음을 진정시킨 후 쓰다만 편지를 계속 쓰려고 소반을 당겨 앞에 놓지만 눈앞에 얼른 거리는 그 놈의 뒷모습 때문에 글씨가 엉망이 된다. 그래도 이 편지를 읽는 엄마가 얼마나 자신을 대견해 할지 생각나서 꼬불거리고 삐뚤거리고 오르내리는 언문을 적어내려 끝을 맺는다. 이제 이것을 보살님이 삼천포로 가져다주시기만 하면 된다.
대문쯤에서 큰소리가 들린다 -소향아, 이거 좀 무봐라- 크고 걸걸한 목소리는 작은아지매가 무슨 일이든 당당할 때 쓰는 목소리다. 손에는 큰 양푼을 들고 김이 슬슬 서리는 무언가를 들고 왔다. -행님도 디리고 니도 무봐라. 지금 막 끼맀다- 안방손님들을 위해 쑨 호박죽이다. -큰아지매는 엄써예. 아까 나가싰어예- -그래? 그래! 맞다. 아까 읍내 간다꼬 했니라. 이따 오시몬 디리고. 장씨 아저씨도 디리고. 니도 뜨실 때 무봐라. 무울만 하데이- 하고는 큰 엉덩이를 흔들어대며 솟을대문을 나선다.
소향은 양푼을 들고 정기로 들어가서 통째로 빈 가마솥에 넣는데 이번에는 남자 목소리가 들린다. -누구 계십니꺼?- 소향은 정기를 나서며 마당 한가운데에 서있는 두 사람을 보니 한 사람은 순경이고 또 한 사람은 거지꼴의 남자다. 순경은 소향을 보자 곧장 묻는다. -집에 회장님 계십니꺼?- -언지예. 아침에 나가싰는데예- 소향은 남루한 거지를 보자 그가 곧 문둥이라는 걸 알았다. 난데없이 순경이 문둥이를 대동하고 무슨 일로 종가에를 왔는지. -오데 가싰는지도 모릅니꺼?- 순경은 난감한 듯한 목소리로 소향에게 묻고 소향도 모른다고 대답하자 순경은 한마디 더 남긴다. -오시몬. 서에 한번 들리달라꼬 해주이소. 중요한 일이라고-
오후 늦게 돌아온 태섭이 소향의 말을 듣고 다시 함창지서로 갔다 돌아와서 태광을 불러들였다. -우리 동네에서 누군가 문디를 죽을만치 팼단다. 누군지는 모리지만 이 동네에서 나온 남자가 문디들 모인 요 앞 산모퉁이에서 지게작대기로 인정사정없이 두디리 팼는데 그 중에서도 성한 놈 하나가 대들다가 아주 심하게 맞은 모양이다. 저쪽 재 너머에 성심원이라꼬 와 생깄다 안 하더나? 그 문디이 촌 말이다. 독일에서 왔다나? 무신 미국에서 왔다나? 성이 왕씨라는 신부가 지서에 고발을 했단다. 문디이라서 병원에서도 안 받아주이께네 기냥 그 문디이촌에서 치료를 하는 모양인데 거의 인사불성일 정도라 칸다. 서장이 카는데… 낼 현장에 있던 문이디를 델꼬 우리 동네로 와서 대질을 할 끼라꼬. 케서 동네 남자들을 있는 대로 다 모아달라꼬 부탁을 하는데. 니는 누군지… 짐작이라도 가나?
태광은 의심의 여지없이 짐작이 간다. -태촌이 행님입니더- 스스럼없이 내뱉는 태광의 말에 태섭은 -니도 알고 있었나?- -아입니더! 오늘 첨 듣지만. 그 행님이 요새 걸뱅이건 문디이건 걸리기만 하몬 요작을 낼 끼라꼬 벼르고 댕깄심더- 자신 있는 태광의 말투로 봐서 거의 그런 모양이라고 느낀 태섭은 -와? 이유가 몬데?- 아직까지 동네에서 일어난 을순이 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는 태섭으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다. -글뱅인지 아니면 문디인지 모리지만… 그 집에 을쑤이가 아를 뱄답디더. 그기 누가 카는데… 글뱅이 아니몬 문디라꼬 케서 요새 태촌이 행님이 벼르고 있었습니더. 틀림없어예!- 태섭은 동네에서 이런 시끄러운 일이 생기는 것이 자신이 의도하는 대사를 그르칠 수 있다는 생각에 입맛이 쓰다. -니가 가서 태촌이 좀 오라 케라. 조용하게. 알았제? 지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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