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칼럼 ‘블럭의 한 곡 들여다보기’가 연재됩니다. 필자 블럭(bluc)님은 음악평론가이자 음악웹진 “웨이브”(weiv)의 운영진입니다. [편집자 주]
관습화된 플롯, 프로레슬러 같은 래퍼들의 캐릭터
연재를 통해 자주 하는 이야기지만, 힙합 음악은 한두 가지의 특징만으로 전체를 보여주기 어렵다. 힙합은 우선 음악이라기보다는 특정 문화나 태도를 지칭하는 단어에 가깝다. 그 문화에서 형성되는 음악이 모여 하나의 카테고리가 되면서 힙합이라는 장르 이름이 붙게 되었다. 랩이라는 새로운 표현 방식이 ‘랩 음악’이라는 장르와 혼동되면서, 사람들은 개념을 깔끔하게 재정립하기보다는 마구잡이로 쓰고 있다. 그래서 단어 사용에 다각도의 혼란이 오고 있다.
힙합은 특정한 음악적 뿌리에 근거하여 발생한 하위 장르가 아니다. 사회 현상과 흐름에 의해 발생한 문화다. 그래서 음악적 원류를 찾자면 엄청나게 다양하고, 이후에도 다양한 장르와 섞이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힙합 음악, 랩 음악(나도 그냥 힙합이라고 칭하겠다)은 저항 정신도 가지고 있지만 돈 자랑을 하기도 하며, 남성 우월주의적이고 단순하기도 하지만 사회의 민감한 부분을 조심스럽게 풀어내기도 한다. 내가 힙합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일부의 가시적인 면을 통해 힙합을 이렇다 저렇다 생각하는 편견을 깨고 싶은 마음도 크다.
힙합 안에서 총, 여자, 차, 돈 이야기가 절대 다수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실제로 그러한 곡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티스트의 비중이나 인지도, 이야기, 사회적 영향력 등을 고려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랩 가사 안에서도 ‘관습화된 플롯’이라는 게 존재한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나 서부극이 가지고 있는 관습화된 플롯을 분석하는 시도처럼, 래퍼의 이야기도 비슷한 방식으로 분석할 수 있다고 본다. 랩 음악에서 내가 분류하는 큰 카테고리는 ‘타자화’ 여부이다. 어떤 주제의 이야기를 할 때 그 속에 자신을 담아서 이야기하고 있는지, 아니면 대상을 타자화시키고 있는지, 나의 이야기를 할 때에도 얼마나 진솔한지 등을 기준으로 삼는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어떤 이야기를 꺼낼 때 많은 래퍼가 하나의 이야기를 놓고, 그 이야기에 담긴 서사를 자신과 분리하는 작업을 해왔다. 물론 자신의 성공이나 갱스터 시절 화려한 무용담을 늘어놓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성공이 전제되었을 때 하는 이야기였다. 그런 방식으로 힙합에서 갱스터, 포주 등의 컨셉이 흥하던 시절도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해도 그마저도 결국은 컨셉, 그러니까 아티스트의 본 모습은 아니었다. 마치 미국 프로 레슬링에서 각 선수가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어가듯, 음악 시장이라는 엔터테인먼트 업계 내에서 래퍼들이 각자 캐릭터를 만들어가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도 그러한 형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ATCQ, 합의되지 않은 관계의 폭력성을 말하다
이번에 소개할 곡은, 어떤 이야기를 외부에서 가져와 문제 의식을 풀어낸 경우이기는 하지만, 꽤 예전임에도 불구하고 앞서 이런 주제를 꺼냈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바로 데이트 강간에 대한 이야기다.
‘어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A Tribe Called Quest, 이하 ATCQ)는 1985년에 결성되어 1998년까지 활동했던 그룹이다. 큐팁(Q-Tip)이라는 최고의 아티스트가 멤버로 있었고, 2006년 이후 잠깐 재결성하기도 했다. ATCQ는 힙합 역사상 최고의 그룹 중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미국 힙합 황금기라고 부르는 1990년 전후에서 중요한 팀이다. 또한 의식 있는 가사와 긍정적인 마인드, 다양한 소재를 다루며, 재즈 사운드를 비롯해 당시 생소했던 음악적 장치를 쓰면서도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
데이트 강간에 대한 경고를 담은 “The Infamous Date Rape”가 담긴 앨범 [The Low End Theory]는 1991년에 발표되었다. 이 앨범은 스핀(Spin), 롤링 스톤(The Rolling Stone), 더 소스(The Source), 올뮤직(Allmusic) 등의 매체에서 만점을 받은 작품이다. 앨범은 재즈와 힙합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은 음악과, 여유 있으면서도 다양한 이야기를 담는 랩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다.
그 중 “The Infamous Date Rape”는 데이트 강간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당시 흑인 사회 내에서 데이트 강간이 빈번해지자, 이를 경고한 것이었다.
※ A Tribe Called Quest- “The Infamous Date Rape” 듣기 http://bit.ly/1zqAaFP
곡이 발표되고, 이 곡의 가사에 대해 부정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어 논쟁이 일기도 하였다. 하지만 논쟁을 만드는 이들 대부분은 데이트 강간의 문제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The Infamous Date Rape”는 합의되지 않은, 일방적인 관계가 갖는 문제점을 시사하고 있다.
의도가 어떤 것이었든 간에, 다른 사람에게 일방적인 행위를 한다는 것은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다.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그 상황에 놓인 두 사람 사이의 대화와 이해일 것이다. 한국도 ‘소통의 시대’ 운운하고 있지만, 서로가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기 때문에 잘 듣는 태도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 가까운 사이에서 뜻밖에 소통이 부재한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1991년에 나온, 보편적인 문제를 다룬 이 곡의 문제 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처럼 힙합은 더욱 날카로운 문제 의식을 가지고 사적 영역을 바라보기도 한다.
올해 발표된 <데이트 폭력을 경험한 여성의 관계 중단 과정에 대한 연구>(이화영, 성공회대학교 석사논문)에 따르면, 데이트 폭력 피해자 중 40%가 폭력을 당한 이후에도 관계를 유지한다고 한다. 사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리고 감정적 문제라는 판단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공적인 영역에서도 현재 한국 사회는 성폭력 사건들로 들끓고 있다. 쌤앤파커스 성폭력 사건도 그렇고, 박희태 전 국회의장을 비롯해 고위 공무원들의 성추행 논란이 일고 있다. ‘내 뜻은 그런 게 아니었다, 억울하다’ 식의 변명은 오히려 더욱 화가 난다. 아직도 가부장적 사고 방식,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 태도를 당연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다. 정말, 존중이 필요한 때다.
더욱이 상대가 연인이라면, 그 사람을 자신의 소유나 연인관계 속 대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동등한 주체로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직도 말해야 할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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