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8월 31일 밤, 일본인 가토 나오키 씨(47)는 동료들과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해 알리는 블로그 “9월, 도쿄의 길 위에서”(페이스북 www.facebook.com/kugatuTokyo)를 만들었다.
관동(関東) 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 지역에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사망했다. 그런데 불안과 혼란 속에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쳤다’는 소문이 퍼져나갔고, 대대적인 ‘조선인 색출 작업’이 벌어졌으며, 희생자 수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조선인이 살해당했다. 희생자 수는 6천여 명으로 추정되지만, 일본 정부의 공식 발표는 233명에 그쳐 아직도 진상이 규명되지 않은 사건이다.
가토 나오키 씨는 동료들과 함께 당시의 역사적 자료와 증언을 찾고 현장을 방문해 사진을 찍고, 이를 토대로 90년 전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글로 적었다. 그리고 참극이 일어난 시간 순에 따라 지속적으로 블로그를 업데이트했다. 이 블로그는 일본 사회에서 많은 반향을 얻어 올해 3월 같은 제목의 책으로 발간되었고 큰 화제를 몰고 왔다.
가짜 말들이 왜곡하고 삭제해버리고 있는 과거를, 지금을 사는 사람으로서 진실되게 느끼고 주변에 전하며 미래의 지표로 삼고 있는 사람. 가토 나오키 씨에게 블로그를 만들고 운영해온 경위를 직접 듣는다. <정리: 구리하라 준코>
큰 재해가 발생하면 외국인이 폭동을 일으킨다?
제가 처음 관동대지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발단이 된 사건은, ‘이시하라 삼국인(三国人) 발언’이었습니다. 2000년 4월, 당시 도쿄도지사였던 이시하라 신타로는 ‘삼국인’이 흉악한 범죄를 거듭하고 있으며, 큰 재해가 일어나면 분명 외국인이 소요를 일으킬 것이므로 자위대에 출동 요청을 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습니다.
‘삼국인’(침략과 전쟁의 결과로, 일본에 남게 된 조선인과 중국인, 대만인 등 식민지 출신자들을 일컫는 차별 용어)이라는 용어를 쓴 것에 대해 세간에서도 충격을 받고 주목했지만, 저는 “외국인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니 군대를 동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더욱 더 공포스럽다고 느꼈습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대지진을 틈타 외국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발언이 과연 ‘현실성이 있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1995년 한신 아와지 대지진이 발생한 후 피해 지역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했을 때, 외국 국적의 주민들은 점점 피난소에 있기 어려워졌던 상황이 떠올랐습니다. 그들이 처해 있던 약자로서의 위태로운 입장을 떠올리니 더욱 의문이 끓어올랐습니다.
서둘러 과거 30년 간, 세계에서 발생한 대지진을 조사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식료품점에 대거 사람들이 몰렸다는 정도의 내용은 있었지만, 군대가 출동을 했다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대지진일 발생했을 때 외국인이 폭동을 일으키기는커녕, 폭동이라는 것 자체가 일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사회학의 재해연구자들은 “재해 시 범죄가 횡행한다는 것은 환상”이라고 지적합니다. 오히려 이런 때 사회적 약자와 비주류에 대한 유언비어를 조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유언비어로 인한 비극은 전 세계에서 일어난 바 있습니다. 14세기 유럽에서 페스트(흑사병이라고도 불리는 급성 열성 전염병)가 번졌을 때,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소문이 번져 많은 유대인이 살해된 것도 한 사례입니다.
‘행정 수장’이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것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은, 군중이나 자경대가 패닉을 일으켜 사람을 죽였다는 식의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행정당국이 유언비어를 확산시켜서 참극이 대규모화된 사건입니다. 재해 시 발생하는 비극은, 사회의 주변부 사람들이 나쁜 일을 일으킬 것이라는 망상에 근거해 유언비어가 생기고, 그 유언비어를 행정이 확산시킬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2000년 이시하라 발언으로 돌아가보면, 행정의 수장이 유언비어를 퍼뜨린 셈입니다.
제가 “9월, 도쿄의 길 위에서” 블로그를 시작한 계기는, 작년에 제가 태어나고 자란 도쿄 신오쿠보에서 재특회(재일한국인의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모임)의 헤이트스피치(hatespeech: 특정 집단에 대한 공개적 혐오발언)를 접하고서입니다. 그들이 내걸고 있는 “뻔뻔한 조선인”이라는 플래카드가 90년 전 조선인 학살과 겹쳐지면서 오싹해졌습니다. 도쿄는 제노사이드(genocide: 인종 말살)의 거리이기도 한 것입니다.
동료들과 이에 대항하는 집회(counter-demo)를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90년 전 조선인 학살에 관한 전단을 배포했습니다. 하지만 재특회의 헤이트스피치에 항의하는 사람들조차 이를 조선인 학살과 연관시키는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더군요. 저는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지금’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앎’과 동시에 ‘느끼는 것’이 중요해
블로그를 통해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전할 지가 가장 큰 고민이었습니다. 난징대학살(1937년 12월부터 당시 중국의 수도 난징과 그 주변 지역에서 일본군이 자행한 일반인 대학살)에 대해서도,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서도 부정하는 역사수정주의가 세상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점에, 잘 기획하지 않으면 블로그에 접속하는 것조차 유도하기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저는 역사를 ‘앎’과 동시에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장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학살의 진행 순서와 같은 타이밍에 글을 업데이트하는 방식을 생각해냈습니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개성을 가진 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이 보이도록 하는 데 가장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조선인을 죽여라’라는 구호는 조선인을 인간이 아닌 ‘기호’로 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기호화된 사람들을 다시 인간으로 ‘해동’하고 싶었습니다.
처음 글을 올렸던 8월 31일이 가장 두려웠습니다. 크게 망하면 어쩌나 하고요. (웃음) 하지만 다음 날부터 블로그 내용이 트위터(twitter)로 퍼지기 시작했고, 10월에는 블로그 방문 건수가 5만 건에 이르렀습니다.
“이건 90년 전의 일이 아니라 지금의 일”이라고 적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현실적 감각을 가지고, 90년 전의 사건을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타자가 존재하는 기억’으로 역사를 다시 쓰자
지금 일본은, 지금까지는 보지 않아도 별일 없었던 타자(他者)와 마주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고 있습니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유일한 근대화와 민주화의 모델’이며 중국도, 한국도 언젠가는 지금의 일본처럼 될 것이라고 믿었던 교만한 일본인의 세계관이 흔들린 것입니다. 한국도, 중국도 각자 역사를 만들어 오고 있었던 것이죠. 다른 국가가 일본과는 다른 방식으로 바싹 뒤쫓아오고 있다는 데에 대해 히스테리를 일으켜 혐한(嫌韓), 혐중(嫌中)이 나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이라는 기억이 일본 사회에서 사라진 것은, 그 사건이 ‘국민적인 역사’의 바깥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 국민이 기억하는 것은 ‘공습이 일어나 들판이 불타고 배고팠던 시절이 있었지만, 평화국가 일본으로 도약했다’는 역사입니다. 하지만 도쿄는 일본인의 힘만으로 만들어진 도시가 아닙니다. 또한 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역시 역사적인 기억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 역사를 ‘타자가 존재하고 있는 기억’으로서 다시 짜는 것입니다.
아베 정권이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용인함으로 인해 앞으로 일본이 하게 될 전쟁은, 국내는 여전히 평화롭지만 해외에서는 자위대원이 죽음을 당하거나, 경우에 따라 어린이도 죽거나 침략자로서 동원될 수도 있는 전쟁입니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전쟁 체험’을 계승하는 것만으로는 앞으로의 전쟁을 현실적으로 생각하기가 점점 어려워집니다. 우리들이 지금 어떤 전쟁의 위기에 직면해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과거를 보아야 합니다. 중일전쟁, 베트남전쟁 등 일본의 역사에서도, 외국의 역사에서도,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답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일다>와 제휴 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의 여성주의 언론 <페민>에서 제공한 기사입니다. 고주영님이 번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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