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쓰는 사람, <여성, 목소리들>의 저자 안미선이 삶에 영감을 준 책에 관해 풀어내는 연재입니다. –편지자 주
처음에는 나 혼자였다.
제주도 버스정류장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한 여자가 다가와 자신이 중국인이라며 ‘만장굴’이 어디냐고 묻는다. 버스를 타고 여행하는 그녀는 걱정이 많다. 어떤 버스를 타고 요금을 얼마나 내어야 하는지 잘 모른다. 숙소에서 알려줬다며 '만장굴'과 '섭지코지' 행선지가 쓰인 종잇조각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단지 도시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충동적으로 비행기를 타고 오긴 했는데 그다음이 문제였다. 딱히 갈 데 없이 앉아 있던 참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버스에 올라탔을 때 나도 기사에게 같은 행선지를 말했다. 가이드가 생겼다며 그녀는 일없이 좋아했다. 좋아할 사람은 나였다.
둘이 되었다. 행선지에 내린 다음엔 우두커니 서 있었다. 굴은 여기서도 한참 멀단다. 그때 한 여자가 버스를 갈아타러 갔다가 놓쳤다며 이쪽으로 되돌아왔다. 그래서 셋이 되었다. 같이 택시를 탔다. 중국여자의 이름은 리지안, 또 다른 여자의 이름은 지은이었다.
굴속에서 리지안은 사진을 열심히 찍는다. 가족들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나보고 왜 사진을 찍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기억에만 남기면 된다고 대답했는데, 잠시 후에 그녀는 또 물어왔다. 그래서 혼자 산다고 대충 얼버무렸다. 그 답이 꽤 처량하게 들렸는지 리지안은 자기 사진기로 나를 찍어주겠다고 열심히 권했다.
지은은 우리보다 야무졌다. 셀카봉을 준비해와 혼자 브이자까지 하며 사진을 찍는다. 지은은 행선지를 표로 다 그려놓고 버스 노선과 시간, 택시비, 거리까지 꼼꼼히 표기했다.
굴에서 나오는 길, 리지안은 다음 행선지로 어떻게 갈지 걱정하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우린 우르르 지은의 다음 행선지로 같이 갔다. 메이저랜드였다. 인공 미로 속에서 리지안은 손가락으로 풍경을 가리킨다. 하늘과 나무와 눈과 돌담이 나란히 색 띠를 펼쳐놓은 것처럼 눈앞에 보였다. 우리는 그 앞에 서 있었다.
리지안은 열심히 내 사진을 찍어주고 내 신발 끈이 풀렸다고 알려주고 지은은 우리를 미로 속에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연신 뒤돌아보고 나는 모퉁이에서 작은 눈사람까지 만들었다. 나무에 매달린 작은 종이 나오자 지은과 리지안은 번갈아 치며 사진을 찍고는 나보고도 쳐보라 한다. 고개를 젖히고 쇠 종을 치는데, 그 음색이 뜻밖에 차갑고 맑다. 나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그러자 리지안이 사진을 찰칵 찍었다. 호의로 새겨진 한순간이다. 우린 같이 비빔밥을 먹었다.
리지안은 이제 섭지코지로 가겠다고 했다. 차가 없는데 들쭉날쭉하게 정한 코스라니. 기상악화로 바닷가 바람이 심할 거라고 지은이 말렸다. 리지안의 결심은 확고하다. 버스가 근처에 안 가 택시를 이용해야 갈 수 있다고, 차라리 우리랑 움직이자고 내가 말해도 안 된다. “여행에서는 자기가 보고 싶은 걸 봐야 해요.”
지은은 리지안의 소중한 종잇조각에 가는 방법을 꼼꼼히 적어주고 행선지 이름의 발음기호까지 써준다. “돌아오더라도 그 길을 가고 싶다.”고 리지안이 무심코 말했다. 나는 그 말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가고 싶은 길이라는 건 그런 것이다.
둘이 되었다. 지은과 나는 비자림에 갔다. 비자나무 숲을 걸으며 지은이 자기 이야기를 한다. 이십대 초반의 지은은 첫 직장에 다니고 있고 신년의 이 휴가를 위해 작년에 쉬지 않고 크리스마스 때조차 일했다. 벼르고 별러서 온 휴가인데 첫날 눈이 내려 슬펐다. 가고 싶었던 산굼부리도 못 가고 성산항에서 배는 묶였으며 에코랜드에서 기차는 멈춰 섰다. 둘째 날인 오늘 정말 신이 나야 한다. 내일이면 벌써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지은은 한 순간도 허투루 쓰지 않으려고 아주 열심히 계획을 짰고 이번 여행은 ‘푸른색’을 보는 게 주제라고 했다. 여행의 주제라니.
“이렇게 여행을 왔는데 앙상한 나무만 보는 건 너무 안됐잖아요. 숲의 푸른색을 보면 힘이 날 거니까 일정을 그렇게 정했어요. 종달리에서 묵었는데 당근밭이 온통 푸르러요. 당근밭이 얼마나 예쁜 색인지 몰라요. 당근 케이크도 처음 먹었는데 맛있었고요.”
지은은 환한 얼굴로 열심히 비자림의 숲길을 걸어간다. 천 년이 다 된 큰 비자나무 앞에서는 멈춰 서서 “이렇게 줄기가 하늘로 뻗은 나무는 그만큼이나 뿌리도 땅속에 같은 모양으로 퍼져 있겠죠? 우리 발밑에도 그 뿌리가 지나가겠죠?” 하며 즐거워했다. 나는 지은의 맑고 생기 있는 감성이 바람이나 햇볕처럼 좋았다.
맛있는 것도 먹을 참이다. 전복 돌솥밥을 먹겠다고 동쪽의 거친 바다 앞을 걸어갔다. 바람은 세차고 모자는 벗겨져 날아가고 퍼런 바다는 출렁이는데 아무도 없는 그 바닷길을 걸어가며 우린 큰소리로 깔깔대었다. 하늘에는 하늘만 있고 옆에는 시퍼런 바다만 있으며 온몸을 후려치는 바람에 맞서 우리끼리 기를 쓰고 걸어간다는 것이, 한 그릇 따뜻한 맛난 밥을 먹으러 아무도 없는 오후의 바닷길을 함께 비틀거리며 걸어간다는 것이 이렇게 신나고 즐거울 줄이야.
갈증이 나는데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듯, 멈추어 있던 심장의 나뭇가지 같은 혈관에 푸른 수맥이 돌듯 그렇게 가슴이 펄떡이며, 살아서 즐거운 한때가 마른 땅 위에 반짝이며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비로소 나는 여행이 하고 싶어졌다.
다시 비를 맞는 저녁
먼지 속에서 빗방울이 뭉쳐지고 있을 때 떨어진 꽃잎이 어 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떨어진 꽃잎은 불 꺼진 집이 아닐까 생각했다. 대륙을 건너온 구름의 입자들은 입이 무 겁다. 빗방울을 오래 문지르면 말없이 말라갔다. 꽃물을 버 리고 말라가는 꽃잎 같은 고비사막을 걸었던 낙타의 털 끄 트머리거나 마른 꽃잎의 부서진 몸, 파리 눈과 거미 다리, 당신의 날개 부스러기들도 그러하다. 지구가 별을 가만히 끌어당기고 있다. 돌을 던지면 공중에서 먼지가 되던 날도 오늘은 아프지 않다. 아프지 않다고 물방울이 얼굴에 부딪 혀온다. 골목으로 물고기들이 꽃잎처럼 헤엄쳐 갔다.
-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이승희, 문학동네, 201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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