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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을 지게 한가득 물건을 올리고 이리저리 피해가면서 걷는 장서방은 광수에미보다 한 발짝 늦을 수밖에 없고 또 급히 그들을 따라잡아야 할 이유도 없다. 소향이 광수에미가 산 물건을 들고 장서방에게 오거나 장서방이 흥정하고 있는 그들 곁으로 가거나 그저 장서방도 모처럼 여유롭게 장구경을 하고 있다.
지게 위의 물건들이래야 그저 부피만 수북할 뿐 무게라고 해야 장작 한 아름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오히려 홀몸으로 어슬렁거리는 것보다 무엇인가 몸을 꽉 잡아주는 느낌조차 있어서 장서방은 힘든 것도 없다. 생각 같아서는 탁주 한 사발이 간절하지만 그것이야 조금 후에 태광을 만나면 한 잔 쭉 들이키리라 생각하고 마른 침만 꿀꺽 삼키며 광수에미는 어디에 있나 하고 휘둘러보는데, 장 끝자락에 지게를 받쳐두고 장작을 팔려는 사람들 뒤에 소향이가 한 무리의 사람들과 무어라 말을 주고받는 것이 보인다. 가만히 보니 그 무리는 아침에 묘지 둥지에서 보았던 그 문둥이 무리였다. 이상하지만 별생각 없이 몇 발짝 옮기니 광수에미가 자신을 보고 놀란 듯 어색한 말을 늘어놓는다.
-안 그래도 찾고 있었는데 오데 있다 옵니꺼? 이것도 좀 들어주이소- 땅바닥에 있던 보따리 두어 개를 장서방에게 내주지만 눈은 두리번거리며 연신 소향이 쪽과 사방을 훑어댄다. 장서방은 지게를 내려 고이고 물건을 올리고 새끼줄로 묶고 다시 지게를 지고 있으니 소향이 왔다. 광수에미는 소향의 손을 꼭 잡고는 장서방에게 -인제 살건 앵간히 다 샀으이께네 장씨는 광수아부지한테 가 있으이소. 내는 요 앞에 한 군데만 더 들맀다 갈낍니더. 가이소 어서!- 하면서 손으로 방향까지 가리킨다. -예, 안 그래도 목도 말랐는데…. 그럼 먼저 갑니다- 하고는 성큼성큼 사람들 틈으로 장서방이 사라진다.
저만치 장서방이 보이지 않자 광수에미는 잡고 있던 소향이 손을 잡아채며 작은 소리로 묻는다. -물어봤나? 뭐라 카더노?- -그 대장이예. 아프다고 합니더- 소향이 눈을 찌푸리며 안됐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 그럼 그 문디가 맞긴 맞네! 쿤데? 아푸다이? 오데가 아푸다꼬?- 소향이 주춤거리며 잡힌 손을 슬그머니 빼내며 -얼매 전에 우리 동네 누군한데 뚜디리 맞았다 캅디더. 케서 뼈도 뿌러지고. 마이 아푸답니더- 하며 광수에미의 눈을 쳐다보자 광수에미는 말없이 눈만 동그랗게 뜨고 도로 소향을 쳐다본다.
장서방은 정육점 앞에 지게를 받쳐두고 선 채로 뚝배기 한 사발을 들이킨 후 입가를 닦아 문지르며 열린 점방문 안을 향해 태광에게 -인제 갈 준비 합시다. 광수아버지. 아이들도 찾고- 하고 소리친다. 남정네 두어 명과 무언가 실랑이를 하던 태광은 장서방에게 -내가 지게는 보고 있으이 장씨는 아아들 좀 찾아보소. 약장사 있는데 있을 끼구만- 하고 도로 앞에 있는 사람들과 말씨름을 하기 시작한다. -아! 법이 있으몬 법대로 하는 기지. 와 내기 자꾸 카요?- 하자 앞에 있는 자는 사정조로 -케도, 종가에서 힘만 써몬사 안될 건 또 뭐요? 설이 코앞인데 동네사람들이 조상은 모시야 안 되겠소? 카이… 회장님한테 우짜든지 설 전에 좀 나오구로 해달라 카소- 술잔을 입에 한 번에 털어 넣은 태광은 안주를 집으며 얼굴을 찌푸려댄다. -내 요번 일은 생각할수록… 괘씸타 말이요. 우리 집안을 우째 보고…. 그 따우 사단을 맹그는지. 아주 본때를 보이야 다신 그런 일이 안 일나지- 마치 독백처럼 안주를 우물거리며 중얼거리지만 앞에 있는 사람들 들으라는 말이다.
장서방이 아이들을 데려오고 소향이 광수에미를 앞세워 오고 또 사람들 틈에서 성가셨던 태광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고 모두 장을 뒤로 남기고 돌아오는데 광수에미의 얼굴에 푸른 화가 등등하게 서려있다.
귓전으로만 흘려들었던 창호아바이가 거지떼를 매질했다는 일이 바로 자기 오라버니 일 줄이야. 그것도 뼈가 부러지고 머리통이 터지고 아예 꼼짝도 못할 정도로 병신을 만들었는데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창호어마이 하고 같이 앉아서 노닥거리기까지 했었다. 드러내놓고 문디 오라버니를 감쌀 수는 없어도 속으로는 창호네가 밉다. 미운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작살을 내고 싶다. 하지만 방법도 없다.
-니 무신 일 있나? 와 그리 얼굴이 벌겋고 말 한 마디 없노?- 낌새가 이상함을 눈치 챈 태광이 마누라한테 묻는다. 치마꼬리를 겨드랑이에 올려 끼운 광수에미는 태광의 말에 대꾸도 없이 콧바람만 씩씩 불어내며 걷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태광을 보고 -창호아바이는 요새 오데 있는교?- 창호아버지의 질문은 갑자기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그걸 내가 아나? 오데 가서 있겠지. 설이 됐으이 안 오겠나? 쿤데 그건 와 묻노?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태광의 얼굴만 한참 쳐다보는 통에 같이 걷던 일행이 모두 멈추어 섰다. 태광도 그런 마누라가 이상하기만 하다. 입을 꾹 다문 후 입가를 씰룩거리던 마눌이 아무 대답도 없이 다시 걷기 시작하자 일행은 모두 다시 걷는다.
건넌방에서 밥상을 앞에 놓고 저녁을 먹는 두 형제는 말이 없다. 태섭은 요 며칠 사이에 벌어지는 이상한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고 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저 모를 일이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만큼 이리저리 궁리를 해보아도 답이 안 보인다. 태광은 허기진 배를 채우느라 말할 시간도 없다. 한참 동안 숟가락질을 해대던 태광이 비로소 허리를 뒤로 젖히며 여유를 찾자 입을 연다.
-행님. 오늘 장에 갔다가 마을 사람 몇이 만났는데- 하고 아직 다 먹지 않은 밥그릇을 밀치며 꺼억 하고 말을 중단하다가 계속 한다. -설도 됐고 했으이께네. 제사라도 지내구로 풀어달라고 합디더- 입맛도 없어서 그저 깨작거리던 태섭은 숟가락을 상위에 올려놓고는 뒤로 엉덩이를 빼낸다. 태광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안다. -안 그래도. 다 마을사람들이고 종친들인데…. 우짜까 하다가 서장한테 말해놨다. 노병구만빼고 다 풀어주라고- 하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든다. -예? 카모? 태우도 풀어주라 켔심니꺼?- 말썽으로만 일관하는 태우가 태섭도 밉기는 그지없지만 다른 사람은 다 풀어달라고 청하는 마당에 같은 죄목으로 붙들려있는 태우만 계속 붙들어두라고 할 수도 없는 까닭이다. -병구만 빼라꼬 했으이 태우도 나오겠지. 자슥, 생각할수록 눈에 박힌 가시다 가시- 담배연기를 길게 뿜어내며 여전히 머릿속에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생각한다. -그 자슥 그 꼬라지로 제사에 또 올 낍니더- 태광도 미운 태우를 빈정거리며 떨어진 입맛에 상을 문전으로 밀어내며 밖을 향해 큰소리로 말한다. -상 내고 물 좀 가온나-
그때 마당에 사람들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부른다. -회장님 계십니꺼!?- 문전에 있던 태광이 문을 열 때쯤 무리의 사람들이 이미 마루 위로 올라서고 있었다. 대여 섯 명의 모두 잡혀갔던 마을사람들이다. -우짜다가… 회장님한테 면목 없이 됐심더. 이해하이소-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죄스런 말로 사죄부터 해대며 태섭이 방면해준 데 대해 고맙다고 인사를 해댄다. 하지만 태섭은 도대체 이 이상스런 일이 어디서 어떻게 벌어지게 되었는지 사람들 얼굴을 둘러보며 또 생각하지만 자신이 하지 않은 일에 자신이 모두 인사를 받고 심지어 서장까지 머리를 조아려대며 자신에게 청을 한단 말인가? 그래도 일단은 체면을 차리고 본다. -그리 서있지만 말고 앉으소. 태광아, 뭐 좀 들이라 케라-
아래채에서 저녁을 먹던 장서방은 숟가락을 놓자마자 지펴놓은 군불이 잘 타는지 보기 위해 일어나 나갔다. 소향이 술상을 건넌방에 들이고 장서방은 다 못 먹은 저녁을 먹으러 아래채에 도로 들어가자 광수에미는 하늘거리는 남폿불을 쳐다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쉰다. 소향도 그 한숨의 뜻을 알 것 같다. 하지만 작은아지매가 말하지 않는 한 소향이 먼저 비밀에 관해 말하고 싶지는 않다. 비록 문둥이지만 그래도 오라버니인데 걱정이 안될 수 없으리란 생각에 남은 저녁을 먹으며 소향은 작은아지매의 얼굴 표정을 살피니 한숨을 계속 해댄다.
설을 하루 남겨놓은 종가마당은 분주하다. 한편에서는 떡매질을 해대고 가마솥 뚜껑을 엎어놓고 아낙들이 전을 부쳐댄다. 광수에미는 연신 광을 들락거리며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고 소향은 정기를 들락거리며 동네 아낙들이 부쳐놓은 전이며 포를 대나무 광주리에 담아 들인다. 장서방도 물지게를 벌써 몇 행부를 져 날랐는지 모른다.
솟을대문 밖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모여 있는 아이들이 자기 엄마가 눈짓으로 불러주기를 기다리며 모여 있다. 종종 잘못 부쳐진 전이나 꼬다리를 눈치껏 아이들에게 먹이는 것이 이렇게 풍요롭게 먹을거리가 넘쳐나는 부잣집에서는 그저 알고도 모른 척 넘어가기 때문에 먹기 힘든 음식을 기다리며 아이들은 대문간에서 모여 있고 그 가운데 광수며 재수도 섞여서 같이 놀고 있다.
소향은 정기에서 단술을 준비한다. 이틀 전에 자신의 방에서 띄운 단술이 잘 익었다. 물론 이런 것을 해보지 않은 소향에게는 어색한 준비지만 작은아지매가 시키는 대로 이불로 덮어서 아랫목에 묻어두니 절로 쌀이 둥둥 떠오르며 달콤한 냄새가 배어 나왔다. -잘 익었나?- 광수에미는 옹기에 퍼 옮기는 소향에게 묻는다. -예, 잘된 것 같심더. 한 그릇 디릴까예?- -그래! 맛이나 보재이- 옹기 속을 들여다보며 광수에미는 소향이 건네주는 사발을 받아 마신다. -잘 익었다. 내 안 카더나? 인제 니도 우짜는지 알것제?- -케도… 아직은 모리는 기 너무 많심니더- 소향이 웃으며 답하지만 하나씩 배워나가는 대갓집 음식에 마음이 뿌듯하기도 하다.
-소향아- 나직하게 광수에미가 부른다. 그리고 소향이 대답도 하기 전에 정기 문간을 힐끗 보고는 말을 잇는다. -그 안있나. 광수 삼촌 말이다. 아무 케도 마음이 씨이서 안되겠다. 한 번 알아봐야 되겠는데. 우짜몬 좋을꼬? 울매나 안됐는지. 맘이 안 편타!- 소향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 이제는 꺼리지 않고 말하는 광수에미다. 하지만 소향인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라 그저 작은아지매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그때 정기문 바로 밖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광수네 여 있나?- 팔에 얼룩진 광목으로 둘둘 말아 붙인 창호어마이가 들어선다. 순간 광수어미이는 얼굴이 차갑게 변하면서 입이 일자로 닫힌다. -바쁜데. 내 팔은 하나지만 케도 할 일이 있을 낀데 와 안 불렀노?-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능청을 떠는 창호어마이를 노려보며 광수에미는 딱 부러지는 목소리로 -여는 니 올 데가 아이다. 여는 발도 들루치 말고 나가거라. 내 입에서 험한 소리 나오기 전에- 하고 등을 돌려 정기를 나가려는 광수에미를 창호어마이는 성한 손으로 옷깃을 잡으며 -와 카노? 내가 미안타 안하나? 소향아. 니기도 내가 미안타! 아바이 없이 겨울 날라고 하다보이 그런 일도 생긴 거 아이가! 광수네가 이해해라 고마!- 턱을 앞으로 당겨 고개를 약간 숙이는 꼴이 천상 죄지은 사람의 몰골이다.
광수에미는 육중한 허리 뒤에 양손을 받치고 몸을 꼿꼿이 세우고 창호어마이를 돌아보며 -니 같은 인간은 내 말도 붙이기 싫다 안 카나? 퍼떡 안 나갈래? 정월 음식 하는데 니 같은 인간이 들모 부정 탄다 부정 타!- 하고는 휑하니 가버린다. 평소 같았으면 그런 모진 소리를 듣고 그냥 있을 창호어마이가 아니지만 며칠 전에 벌어진 사단 때문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창호어마이는 동네사람들 모인 대갓집 마당에서 소란을 피울 일이 아니라는 마음으로 그냥 슬그머니 나가지만 이 모든 것이 창호아바이가 을순이 임신 때문에 문디를 작살낸 결과로 빚어지는 줄은 꿈에도 모른다.
섣달을 하루 남긴 겨울해가 뉘엿이 기울 때쯤 음식준비를 거들던 사람들도 손에 한 뭉텅이씩 얻어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소향은 여전히 바쁜 정기살림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오른다. 그래서 광속에서 음식을 정리해 넣고 있는 작은아지매를 부른다. -아지매요. 잠깐 저 좀 보이소예- 몸이 무거운 광수에미는 일어나기가 성가시다. 그냥 앉은 채로 되물어본다. -와?- 소향은 생각이 떠오른 김에 말해버리고자 광수에미를 재촉한다. -얼른 와보이소. 지가 할 말이 있심더- 소향이가 자기를 부르는 일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이 든 광수에미는 하루 종일 움직인 육신을 끙 하는 소리와 함께 일으켜 정기로 간다. -뭐꼬? 뭔데 사람을 오라 가라 카노?- 말은 그렇지만 나무라거나 원망의 흔적은 전혀 없다. -지가 생각을 해봤는데예. 대장 말입니더- 소향이 서두를 내놓자 광수에미가 대장 하고 순간 어색한 말에 이해가 되지 않다가 금방 문디대장이라는 뜻을 알아차린다. -그래, 뭐꼬?- -우떻심니꺼? 장씨아저씨 보고 한번 들다보고 오라 카모?- 광수에미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얼굴이 경직된다. -그기 말이라고 하나? 안 된다! 그건! 카고… 니… 이건 절대로 아무한테도 말하모 안 되는 거 알제? 니 정말로 내캉 죽는데이. 알았나?- 광수에미는 눈에 불을 켜고 당부를 한다. -아지매예. 지는 절대로 그런 말은 안 합니더. 걱정하지 마이소. 케도 장씨아저씨는예. 알아도 될 거 같은 생각이 들어서예. 하지만 아지매가 안 하라모 지는 말 안합니더- -오이야! 지발 내 말 맹심하제이. 알것제?-
광수에미는 뒤돌아서 광으로 간다. 광에서 전을 대소쿠리에 재우며 광수에미도 생각을 해본다. 장서방이 입이 무겁고 사람 됨됨이가 되긴 된 사람이지만 그래도 어찌 광수 삼촌이 문디라고 말하겠나? 그러다가 동네사람들이 알기라도 하는 날에는 자신이나 광수며 재수는 이 동네에서 살기도 힘들 게 될 것인데. 그래도 이 추운 겨울에 어디 어떻게 아픈지나 알고 싶은 오라버니다. 손에 들린 음식을 보고 이런 것을 먹어보기라도 할런지. 의원이라도 보았는지. 살인값도 안 내는 문디라고 그리 사람을 반죽음으로 몰아붙인 창호네가 더 괘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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