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쓰는 사람, <여성, 목소리들>의 저자 안미선의 연재 칼럼입니다. –편집자 주
며칠 전, 열 살짜리 아이가 학교를 마치고 오다가 말했다. “엄마, 나 수영 못하는데……” 내가 무심코 넘겼는데 몇 번이고 같은 말을 한다. 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 덧붙인다. “어쩌지, 나 아직 수영 못하는데, 세월호……” 그러니까 아이는 어른들이 특별히 일러주지 않았어도 세월호에 대해 듣고 오랫동안 속으로 걱정한 것이다. 아직 수영을 못하는데, 난 어떡하지, 하고.
‘그건 수영을 못해서 생긴 일이 아니야, 안전의식이 없어서 생긴 일은 더더욱 아니야, 학생들은 마지막까지 줄을 서서, 질서를 지키며, 구명조끼를 입고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살 것을 믿으면서.’ 내가 말하면 아이는 되물을 것이다. ‘그럼 왜 그런 일이 벌어졌냐’고.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광화문 광장에서 만난 한 동화작가는 어린이들에게 세월호 사건을 어떻게 설명해줄 거냐고, 동화작가로서 참담하다고 했다. 초등학교에서는 세월호 1주기를 맞아 안전인권 토론회를 학생들과 열겠다고 했다. 텔레비전에서는 수학여행 때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안전교육을 거듭 시키는 신 풍속도를 뉴스로 내보낸다. 그리고 대통령은 팽목항으로 가서 ‘고통을 극복하고 새롭게 살아가라’는 식의 연설을 했다.
한쪽에서는 세월호 사건을 기념식처럼 연례행사로 자리매김하고, 한쪽에서는 유가족과 시민들이 거리에서 다치고 공권력에 끌려간다. 광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의례적인 행사가 되는 바로 그 옆에서, 규명되지 않은 진실을 위해 싸우는 이들이 울부짖는다. 세월호 사건으로 함께 아파했던 사람들은 1주기에 두 가지 언설을 동시에 들었다. ‘고통을 극복하고 나아가라’, 개인의 힐링을 부추기는 것 같은 신자유주의적 언설과, 다른 한편으로 진상 규명을 위해 세월호 특별법 정부 시행령을 폐기하고 세월호를 인양하라는 주장이었다.
세월호 특별법은 정치인이 만든 게 아니다. 길바닥에서, 찬 바닷가에서 온몸으로 통곡하고 절규한 유가족들의 요구가, 그와 함께한 시민들의 요구가 조금씩 법을 만들고, 후퇴하는 법을 부여잡고, 침몰하는 의식을 각성시킨 것이다. 사건을 금방 기정사실화하고, 단정 짓고, 빨리 과거로 보내려는 세력과 맞서온 것이다.
아이가 다시 학교에 가려고 문을 나서다 한마디 한다. “우리나라는 안전한 곳이 아니야.” 나는 배웅하다 말고 멈칫했다. 4월 내내 아이는 골똘히 무언가 생각하다가 한마디씩 한다. 가방을 메고 신주머니를 들고 학교에 터벅터벅 걸어간다.
다시, 아이를 기다리는 길목에서 다른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뛰어가는 것을 본다. 가방에는 노란 리본들이 달려 있다. 아이들은 기억하고, 자기 가방에, 옷에 노란 리본을 달고 추모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애를 쓰며 궁리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그날 저녁상 앞에서 불쑥 그런다. “대통령이 최고라 해도, 사람들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 힘이 없는 거야. 그러니까, 엄마. 사람들이 바라는 걸 해주지 못하면 대통령은 아무 힘을 가질 수 없어. 그러면 사람들이 바라는 걸 얻게 되는 거야……” 아이는 혼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한 걸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초등학생 아이가 권력은 사람들의 힘에서 나온 것이고, 사람들이 요구하는 걸 스스로 얻는 게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민주주의라는 말을 아직 일러주지 않았어도 이미 민주주의를 믿는 아이들이 지켜본다. 세월호가 어떻게 기억되고 진실이 규명될지. 시민들의 요구는 어떻게 묵살되고, 어떻게 계속 싸움이 이어지며, 오만한 권력은 어떻게 되는 건지. 엇갈리는 언설들 속에서 어떤 길을 갈지,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힘없고 말 못한다 해도 함께 지켜보며 새기고 있는 무수한 시선들, ‘살고 싶다’는 욕망이 신뢰와 불신의 갈림길에서 어떤 길을 갈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취한 행동이 그것에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이라는 예감에 문득 걸음을 멈추게 된다.
<금요일엔 돌아오렴>(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창비. 2015)은 세월호 유가족 열세 분의 육성 기록을 담은 책이다. 읽는 법을 배워야 할 책이다. 슬플 것 같아 이 책을 못 읽겠다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이 책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슬프지 않다. 꼭 읽었으면 좋겠다’ 하고 말한다.
<금요일엔 돌아오렴>은 북콘서트를 통해 전국 지역에서 많은 이들과 만나고 있다. 새로운 증언과 독후감과 이야기를 통해 또다른 말을 향해 열려 있는 책이다. 이 책은 더 많은 목소리가 발화되고,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해준다. 독자는 책에서 울음소리와 절규를 듣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서 태어나는 말들을 목격한다. 와해된 세계에서 어떤 말이 생겨나는지 보게 된다.
‘우린 믿었죠, 살아 있다고. 부모들은 아이들이 살아 있기를 바라니까 믿을 수밖에 없죠. 밤낮으로 지켰어요.’(291p) 유가족은 과거와 현재를, 기억과 실재를, 사라진 것과 현존하는 것을 언어로써 부둥켜안고, 산산조각 난 세계를 이어 맞추며 믿음을 지켰다. ‘부모들이 팽목항에 있는 동안 바다를 보며 나눴던 피눈물 나는 이야기들이 피어올라(186p)' 거기에는 논리도 상징도 필요치 않다. 겉보기에 연관 없는 사실도 조각 난 파편으로써가 아니라 의미를 가진 것으로 기억 속에 자리 잡게 된다.
어떤 시(詩)도, 유가족이 존재를 걸고 입 밖에 낸 말들의 힘에 미치지 못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역설도, 상징도, 삶을 약속하고야 마는 이들의 말이 지닌 힘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긴다. 말이 사라진 자리에서, 세상의 의미가 파괴된 자리에서, 유가족은 말을 하기 시작했고, 그 말의 의미를 몸으로 실천했다.
나는 이 책을 기록한 작가들에게도 경의를 보낸다. 눈물과 고통 앞에서 먼저 하염없이 울고 견디며 띄엄띄엄 나오는 그 육성을 온몸으로 받아 품은 그들의 작업도 주목되었으면 한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의 말을 어떻게 들을 수 있는지, 작가들은 참사 후의 자리에서 몸과 언어의 경계를 넘나들며 성찰하고 실천했다.
독자는 작가들이 만났던 그 울음과 목소리를 온전히 그대로 들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어 이전의 고통과, 고통 다음의 언어가 얼마나 치명적인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에 건네는 사려 깊은 선물인지 알게 되는 것이다. 작가기록단의 김순천 씨는 4월 10일 세교연구소 주관으로 열린 심포지엄 “세월호 시대의 문학” 토론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가족의 언어는 고통의 언어이지만, 또한 지극한 사랑의 언어입니다. 그들을 유일하게 살게 하는 힘이 사랑입니다. 그분들의 언어는 타인을 향한 언어이며, 연대의 언어입니다. 그분들은 그렇게 성장하셨고 우리도 그렇게 성장해야 합니다.”
희생된 학생들이 모두 다른 사람들이었듯, 제각기 유일한 한 세계였듯, 유가족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 다른 목소리가 책에 실려 있다. 자식의 죽음에 대한 다른 기억들, 삶에 대한 다른 기억들, 싸움에 대한 또다른 의미들, 유가족들은 서로의 다름을 책을 통해 알게 되기도 했다. 이 책은 ‘유가족’이라는 전형적인 이미지를 담은 것이 아니라 모두 제각기 다른 한 사람의 목소리를 싣고 있다. 유가족들은 곁의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서로 다른 추억 속에서 자식을 생생히 기억하고자 한다. 그리고 함께 진실을 규명하고자 한다.
갑자기 끝이 난 관계는 지난 시간을 후회와 죄책감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러나 희생된 학생들은 사라지지 않고 현존한다. 사랑이 이어놓은 시간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다. 아이들과 함께 하려는 부모는 결코 자식들을 덧없이 손에서 놓지 않았다. 아이들을 기억하고 그 모습, 체취, 목소리, 웃음을 필사적으로 기억했다. 언어의 한계도, 시간의 한계도, 체력의 한계도 벗어날 때 그들은 새로운 언어로써, 영원한 현재로써, 자기 몸으로써 자식을 지켜낸다.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해요?” 질문하면서.
함께 그 죽음을 목격한 사람들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같이 묻게 된다. 그건 우리 모두가 맞닥뜨린 질문이 되었다.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특별한 대답이다. 떠나갔지만 떠나보낼 수 없는 자식에 대해, 설명해줄 수 없어 작별인사도 나눌 수 없는, 아직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은, 가슴에 생생히 살아 있는 한 사람에 대해, 한 사람이 자신의 전부를 걸고 진실을 약속하며, 또한 공동체에 그러한 결단을 촉구하며 내미는 뜨거운 악수다.
나무 신호성(단원고 2학년 희생자 학생이 쓴 시)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는 곳 식물들이 모여 살 수 있는 곳 이 작은 나무에서 누군가는 울고 웃었을 나무 이 나무를 베어 넘기려는 나무꾼은 누구인가 그것을 말리지 않는 우리는 무엇인가 밑동만 남은 나무는 물을 주어도 햇빛을 주어도 소용이 없다 추억을 지키고 싶다면 나무를 끌어안고 봐보아라 -136p
“우리는 순수해야만 침몰하지 않습니다. 순수성을 잃어버린 순간 다 말려듭니다. 우리는 그동안 평범하게 자식 키워온 부모이지만 그 사람들은 평생 동안 술수를 써가며 권력을 유지해온 사람들인데 그들의 방식으로는 우리가 이길 수 없는 것이죠. 그런 식으로 싸워서 이긴다 해도 이긴 게 이긴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 카메라 방송은 자꾸 틀리고 어설프고 망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틀리면서, 어설프면서, 망가지면서 답을 찾아가는 것이죠. 우리가 하는 방송 작업은 단순한 (수동적인) 기록 작업이 아니라 기록을 새로 써가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찍는 방송들은 세월호가 안 빠지게 하기 위해 달려야 하는 방송이기 때문입니다. 외부 사람들은 기술을 갖고 있지만 이건 사명감 없이는 못하는 일이니까요. 이게 늦는 것 같지만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해요. 기계를 다루고 일을 할 줄 아는 걸 떠나서 사명감, 416 정신을 가지고 있느냐. 왜냐하면 하루이틀 그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게 초심이에요. 초심을 잃지 않아야 유가족 방송입니다.” -185p(문지성 학생의 아버지 문종택 씨 이야기)
“어쨌든 진실이라는 목표 하나 보고 달려가다 보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렇지만 내가 끝장을 봐야 해, 내가 결과를 내야 해 그런 생각은 아니에요. 전에는 저쪽 길로 갔다면 지금은 방향을 틀어서 이 길로 가는 건데, 그냥 끝까지 갈 뿐이지요. 어쨌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간다. 그거예요. 이 길 가다보면 또다른 사람들이 있으니까. 우리 가고 난 뒤에 다른 사람들이 언젠가는 밝혀줄 거다, 그건 확신해요. 우리가 앞서서 얼마만큼 가줬으니까 다음 사람들이 거기에서부터 출발하면 되니까.” -160p(이창현 학생의 어머니 최순화 씨 이야기)
이 기사 좋아요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모퉁이에서 책읽기 관련기사목록
|
많이 본 기사
문화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