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쓰는 사람, <여성, 목소리들>의 저자 안미선의 연재 칼럼입니다. –편집자 주
내 말을 들어줄 이가 없을 때
살다 보면 말할 데가 없을 때가 있다.
내 친구는 이혼을 하고 나서 말할 데가 없었다 한다. 서울의 거리에서 행인을 쳐다보며 ‘저 사람들 아무나 붙잡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했다. 말이 너무너무 하고 싶은데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사별을 했던 친척이 전화를 해서 조언했단다. “아무도 네 말을 듣지 않을 거다. 사람들은 너무 바빠서 다른 사람 말에 신경 쓰지도 않고 들을 시간을 내주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넌 이제 기도를 해라. 하느님한테 말해라. 네가 살려면 하느님을 붙들어라. 그분만 네 말을 들어주실 거다.”
한 성폭력 생존자는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견뎌낼 수 있었는가?”는 청중의 질문에 “기도를 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나에게 있었던 일을 모두 신에게 말했고 구해달라고 했다. 계속 언어로 말을 할 수 있어서, 들어주는 신이 있어서 나는 정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가정폭력 피해자들의 모임에서 한 상담가는 딱하다는 눈을 하고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했다. “종교가 있어요?” 없다고 하니 이렇게 말한다. “불행한 결혼생활을 종교의 힘으로 견디기도 하지요. 믿는 신이 있다면 좋을 텐데…” 안다. 그 말은 틀렸다. 그러나 그날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경험보다 상담가의 권위적인 조언을 믿고 싶어했다.
말을 하기 어려운 이유는 많다. 들을 사람이 없다는 것인데, 자신이 가진 것이 고통밖에 없다면 들을 사람이 더욱 없어질 것이다. 말할 수 있는 자리를 얻고, 타인에게 들어줄 시간을 청하는 것은 쉽지 않다. 가진 것 없고, 상처를 받고, 고립된 사람은 자신이 겪은 일을 언어화할 방법도 모르지만,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 말했다 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으며, 들은 사람은 손쉽게 자신을 비난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상처가 약점이 되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멀리하는 이유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기를 쓰고 가진 척하고 아프지 않은 척한다. 가진 척하면 또 그 곁에서 아픈 사람이 생기고, 아프지 않은 척하면 그 곁에서 더 말 못하게 되는 이가 생긴다. 그리고 어쩌면 증오가 싹튼다. 차별하는 법을 배우게 되고 차별을 하고 싶어진다. 사람을 정말 미워하게 된다. 미워하게 되면 세상은 온통 이해관계만 관철된 곳으로 보인다. 그게 세상살이의 지혜로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좀더 지나면 좋은 것과 나쁜 것, 숭고한 것이 이 세계에 함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쁘기만 하거나 좋기만 한 것은 없다. 현실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거나 이상만을 좇을 수 있는 삶은 없다. 어떤 길로 갈 것인지는 자신의 선택임을 알게 된다.
자기 말을 배반하지 않고 들어줄 이는 자신
자기 언어를 믿는 것은 어렵다. 자신의 언어를 믿고 자신을 지키고, 세상에 아름다운 것이 있다는 것을 믿으려면, 자기 말을 자신은 있는 그대로 들어주어야 한다. 모든 청중이 사라졌을 때 자신의 말을 배반하지 않고 들어줄 이는 자신이다. 그 말들이 자신의 독(毒)을 비우고 가슴 밑바닥의 눈물 같은 흔적에서 맑은 어떤 것을 뜻밖에 길어 올려 줄 것이다. 자신의 원념이 무엇이고 욕망이 무엇인지,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것은 무엇인지, 마침내 무엇을 바라는지 가리켜줄 것이다.
말이, 말들의 무덤이, 말들의 싹들이, 말들의 뿌리가 알려주는 ‘나’는 의외의 것이다. 그것은 한사코 빛을 향해 몸을 트는 식물 같은 것이기도 하다.
내가 분리된 내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면 내 말은 다시 세상과 연결된다. 죽어도 죽지 않는 것이 세상에 있으며 삶은 보이지 않는 세상 밖에서도 지속되는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우리가 서로를 믿지 않고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에서도 우리는 협력하며 서로만을 믿고 의지하며 살고 있다. 비인간적인 것들은 언제나 지극히 인간적인 것들의 힘에 의해 유지되어온 것이다. 비인간적인 것들과 싸우는 것과, 우리의 인간적인 힘을 깨닫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일 테다.
살다 보면 혼자만의 힘으로 버틸 수 없는 순간이 온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가 있다. 그때 우리를 살리는 것은 타인의 손길, 시선, 또는 한 권의 책, 혹은 자신의 말이다. 어떤 것이든 자신을 다시 세상과 연결 짓지 않고, 의미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살아갈 힘을 얻을 수는 없다.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전부가 아니며, 나의 말이 나오는 심연과 다른 이의 심연은 맞닿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말이 갇힌 감옥에서 나올 때, 다른 이의 말과 빛이 들어와 숨을 쉰다.
창조성은 이미 우리의 일부이다
<아티스트 웨이>(줄리아 카메론 저, 임지호 역, 경당)는 그러한 나의 시간에 버팀목이 되었던 책이다. 아침마다 알몸뚱이로 뒹굴다시피 모닝페이지를 썼다. 누구에게 받지 못하는 격려를, 스스로에게 해줄 필요가, 모든 여자들에게는 있다.
“우리 모두 창조적이다. 창조성은 다양한 형태로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자연스러운 생명력이다. 피가 우리 몸의 일부이며 우리가 발명해야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창조성 역시 우리의 일부이다. 창조성은 우리 각자가 우주의 위대한 창조적 에너지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방대하고 힘찬 영적인 샘물로부터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창조력을 증폭시키기 위해 길어오는 샘물이다.
우리는 창조성을 너무 협소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엘리트주의적인 어휘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창조성이란 ‘진정한 예술가’와 같은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는 자질로 간주하는 문화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동은 창조적 선택을 요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아티스트 웨이> 336p
그리하여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 그러할 때면은 나의 몸은 항상 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 오늘은 필경 여러 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보다 암만 불러도 싫지 않은 긍지의 날인가보다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 긍지의 날인가보다 이것이 나의 날 내가 자라는 날인가보다 -김수영 시 <긍지의 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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