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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한창 햇살이 따가운 정오 무렵 이왕 나선 함창길에 반찬 귀한 것을 생각하여 생선가게에 들린 광수에미는 염장생선 몇 마리를 손에 들고 바쁜 걸음으로 태봉으로 돌아왔다. 논에서 풀 뽑고 있는 서방과 장서방의 점심을 소향에게 부탁은 하였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광수에미는 곧장 종가 대문을 들어서며 소향이부터 찾는다.
정기문은 열려있지만 인기척이 없고 소향이 방문 앞 댓돌에 고무신이 놓여있다. 지금쯤 들에서 점심을 먹고 있거나 아니면 보따리를 들고 올 때쯤인데? 어째서 집에 있지? 대청 위의 안방을 본다. 늘어진 대발 사이로 자신을 내다보고 있는 형님의 모습이 보인다. -소향아! 니 방에 있나? 뭐하노?- 채 소향이 대답도 하기 전에 대청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네, 이리 좀 올라오게!-
필시 들에서는 점심을 굶고 있을 예감이 든 광수에미는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소향이 문을 열고 나오자 광수에미는 대뜸 -니? 논에 밥 냈나?- 한다. 안방에 대답하는 것이 뒷전인 광수에미는 다그치듯 소향이에게 묻자 소향이 안방 쪽을 보면서 죄지은 목소리로 -언지예, 못했심더- 대답한다.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는 광수에미다. 일꾼들이 논에서 땡볕 아래서 일하는데 점심도 내다주지 않았다? 안방에서 불렀던 기억도 없다. 다짜고짜 별채로 달려간 광수에미는 정기에서 불부터 지핀다. 하지만 그동안 거의 매끼를 종가에서 해먹다시피한 탓에 정작 살림 사는 자신의 정기에는 먹을거리가 없는 걸 깨닫고는 화가 더 치솟는다. 불을 지핀 지가 오래 돼서인지 연기도 잘 빠지지 않고 거꾸로 아궁이로 나오는 탓에 목에 코에 주먹만 한 돌멩이라도 막힌 양 연신 켁켁 하며 늦은 점심을 부랴부랴 하는데 벼락같은 서방의 목소리가 정기문 밖에서 들린다.
참도 거르고 물도 한 잔 마시지 못한 채 점심을 기다렸던 장서방과 태광은 기어이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마땅한 핑계도 없는 광수에미는 그저 부랴부랴 점심을 준비하여 마침 장에서 사온 자반을 얻어서 마루로 상을 내놓았다. -이왕 집에 온 거 까짓 낼 하모 우떻노?- 태광의 게으른 변명이다. 장서방도 지금은 그런 태광의 뜻을 거스르고 싶지 않다. 목이 타들어가도 물도 한 잔 못 먹고 제초를 하다가 늦은 점심을 먹고 나니 그저 생각나는 것은 낮잠뿐이다. -그러지요. 풀도 어디 안 가고 기다려줄 겁니다-
후줄근한 바지자락을 걷어 올리고 종가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사실 기다리고 있던 안방 큰아지매가 장서방을 마루로 불렀다. -자네는 무엇보다도 종가 일을 우선하는 것이 도리일 텐데 몸 무거운 소향이 보고 샘에서 물 길러 오라고 독을 비워놓고 남의 일을 하러 다니는가?- 무슨 일인지 금방 알아챈 장서방은 긴 말 하기 싫다. -예, 그렇습니다. 제가 미처 살피지 않았군요. 두 말씀 안 하시도록 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목마르고 배고팠던 참에 광수네에서 점심을 배부르게 먹고 나니 몸은 천근같이 무겁지만 정기에 물독이 비었다니 당장 물부터 져 날라야 할 판이다. 아래채 소향이 방문이 더울 텐데도 닫혀있다. 집안에 흐르는 분위기가 마치 뜨거운 여름 태양에 삶겨 풀 죽은 호박잎처럼 늘어져있다.
* * *
꾸루와이는 모자를 꾹 눌러쓴 거지를 멀찌감치 따라가다가 그자의 얼굴이라도 볼 마음으로 콩 심는 발걸음을 빨리하여 따라잡았다. 장터에서 벗어난 그자가 향하던 쪽은 점촌 쪽이 아닌 이안 쪽이었다. -어이! 어이!?- 입에 붙어있는 상놈의 말투가 낮이나 밤이나 아무 데서나 나온다. 모르는 사람일진데도 그리 부르는 것은 오직 그자의 차림새 때문이다. 그자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꾸루와이를 보며 자신을 부르는 것을 확인하는데 꾸루와이의 눈이 커지면서 -이거? 문디 아이가?- 하고 놀란 듯 절뚝 걸음을 뒤로 내딛는다. 그자는 아무 말 없이 잠시 꾸루와이를 보다가 돌아서서 가려는데 꾸루와이가 이번에는 아주 사납게 그자를 부른다. -야, 니! 일로 와봐라- 하지만 꾸루와이는 그 자리에서 선 채로 그자 쪽으로 다가가지는 않는다. 그자는 걷던 걸음을 순간 멈추는 듯하다가 도로 걸어가 버린다. -야, 니 내 말 안 들리나? 문디야! 오라카이!- 사방을 휘 둘러보며 큰소리를 내지만 꾸루와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그자는 그 소리를 들은 둥 마는 둥 계속 저만치 걸어가고 간격은 이미 집 한 채를 돌아서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도대체… 종갓집 둘째 며느리가 무슨 일로 문디를 백주대낮에 은밀히 만났는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필경 무슨 연유가 숨어있다고 냄새를 맡는다.
* * *
음력칠월이 닥치자 풀더미가 성난 듯 치솟아 자란다. 광수에미는 고구마밭 매기에 지쳐가고 태광은 자신의 손으로 짓는 농사일에 지쳐간다. 소향은 뱃속에서 움직이는 태아를 느끼면서 조석으로 마시는 탕약이 이제 몇 번만 더 먹으면 끝난다고 안심하고 있다. 태섭은 내년 봄에 있을 선거 핑계로 얼굴도 보기 힘들 정도로 밖에서 나돌고 그림자 길게 늘이는 여름햇살이 아직도 서산마루에 걸릴 때쯤 소향이 정기에서 풍로에 부채질을 하며 오늘도 자신과 큰아지매의 입치레 할 것을 마련하고 있다.
-안에 있소?- 하는 소리에 한쪽 눈에 매운 연기가 들어가 고인 눈물을 담은 소향이 정기 밖을 보는데 보살님이다. 한여름 내내 사람이 그리웠던 소향이 부채를 손에 쥔 채로 뛰어나간다. -아이구 보살님예, 운제 오싰습니꺼?- -내, 지금 오는 길이다. 아이구. 니 배가 마이 부르네 이제!- 소향의 배를 내려다보며 무당은 웃음기 띈 얼굴로 말한다. 무당의 소리를 못 들을 리 없는 큰아지매도 부르기 전에 마루로 나서서 무당을 맞고 둘은 대청위에 앉는다. -안 그래도 한번 오셨으면 하던 참이었습니다. 소향아, 화채라도 좀 내오지?- 마루에 앉지는 않고 봉당에 서서 무당을 보던 소향에게 큰아지매가 시킨다.
-자가 편지를 보냈더구만. 아지매가 기대린다고? 남해는 섬이 많아서리. 아이구 더버라! 여기저기 댕기다 보민 한여름이 다 갑니더. 삼천포에 온 기 한 파수 전인데 자 어마이가 그래도 아들 낳아달라고 치성 디린다 해서리 들맀디만 팬지가 왔다꼬 케서 왔지예. 그래, 우째 여름은 잘 나고 계십니꺼?- 손에 쥐고 있던 수건으로 연신 땀을 훔쳐내던 무당이 소향이 수박을 띄운 화채를 건네주자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다 마셔버린다. -시원타! 참, 내 정신 좀 봐라. 여 너거 엄마가 주라 카더라. 건어물이다- 옆에 끼고 있던 보따리를 소향에게 밀어내준다. 소향은 엄마라는 말에 왈칵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보따리를 풀어 헤친다. 조기며 대구며 심지어 그렇게도 먹고 싶었던 도다리 말린 것까지 곱게 싸 보냈다. -그걸 들고 여기까지 오셨네. 힘드셨네요. 소향아, 그건 넣어두고 너 혼자 두고두고 먹어라. 우리 먹는 건 광에도 있으니 아무도 주지 말고!- 담 너머 광수네를 일컬어서 하는 말이렷다. 소향은 혼자만 엄마의 손길을 느끼고 싶은 마음으로 보따리를 주섬주섬 챙겨서 정기로 들어서고 마루위에 남은 둘은 말을 주고받는다. -언젠가 제가 보살님 한 번 오셨으면 하고 소향이에게 물었는데 그때 편지를 보낸 모양이네요- -그케 우째 자는 배우지도 안 했는데 글도 알꼬? 아는 참 영리하지. 아무튼 아는 잘 구했심더!- 듣기로는 자기 칭찬으로 들리기에 큰아지매는 웃으면서 아무 말도 안한다.
-무신 일로 보자 켔심니꺼?- 성질 급한 무당은 무슨 돈벌이라도 될 소식부터 궁금하다. -지난번에 동네 태봉제에는 잘 모시고 또 수고비도 잘 챙겨드렸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마침 서울에 있는 통에 염려가 됐습니다만 수고 하셨습니다- -자 어마이도 이번에 쌀 두 말 들이서 치성 디맀심더. 비록 자기 손은 아니지만 케도 소향이를 위해 하는 거 아입니꺼?- 둘이서 주고받는 말이 영 따로 놀고 있다.
-안 그래도 저도 치성을 드릴까 해서 보살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절에 갈 수도 있지만 더워서 번거롭기도 하고 또 보살님이 소향이 구하실 때부터 수고하셨으니 득남할 때까지 힘써 주셨으면 합니다- 무당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무엇보다도 그저 돈벌이 되는 말만 나오면 신이 나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큰아지매의 마음속에 묻고 싶었던 것은 따로 있다. -맞심더! 삼신할매가 다 알아서 한다고 해도 정성을 디리고 보살피야 손을 볼 수 있고 또 본다 해도 아주 장군감으로 튼튼한 애기를 볼 수 있는 거 아입니꺼?- 물론 소향의 뱃속에 든 아이를 위해서 정성도 올릴 목적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태섭의 선거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큰아지매는 그러나 둘이서 있는 장소에서 묻고 싶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날 잡아서 바로 해야 될 낍니더. 지가 남해섬에서 굿 날짜가 잽혀있어서리- 큰아지매의 눈치를 보면서 핑계를 대는 무당의 속마음은 한시라도 빨리 지전을 손에 넣고 싶어서이다. -그럼 보살님이 날을 잡으시고 또 뭐가 소요되는지 말씀을 하시면 돌아오는 장에서 구하지요- -아이구, 마님! 무슨 굿이나 제도 아이고 그저 정성 디리는 겁니다. 그저 백설기나 한 말 하시고 초나 한 대 마련하시모 되지예- 금방 마님이라는 말이 술술 나온다.
소향이 겸상을 차려 들고 마루에 올린다. -아이구, 이집 영감님은 오데 가싰습니꺼? 우리꺼정 저녁을 묵게? 소향아, 니는 와 여서 안 묵고?- -지는 정기서 무울랍니더- 밥상 위에는 언제 구웠는지 아까 무당이 들고 온 조기가 곱게 두어 마리 구워져 있다. 사실 소향은 오늘만큼은 엄마가 보내준 생선을 맘껏 먹고 싶어서 혼자 정기에서 먹으려는 참이다. -소향아, 이건 보살님이 들고 오신 거 아니냐? 조기네? 네 것은?- 큰아지매가 상 앞으로 몸을 당기며 소향에게 묻자 -지꺼도 있심더. 잡수이소예- 하고 정기로 가버리고 허기를 느꼈던 무당도 체면치레하지 않고 밥을 퍼 넣으며 아예 한 손에는 조기 한 마리를 통째로 들고 뼈를 발라내며 먹는다. 소향이 정기에서 혼자 밥을 먹는 것에 맘이 놓인 큰아지매는 천천히 무당에게 묻는다. -영감이 언제 들어오실지 모르지만 요새 바빠서…. 보살님! 우리 영감 관운 좀 봐주시지요?- 먹는 둥 마는 둥 숟가락을 상위에 모아 올리고 무당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며 묻자 안방마님이 손도 안대는 조기에 신명이 난 무당은 입가에 번질거리는 기름기를 그대로 남긴 채로 오물거리며 답한다. -관운예?- 하고는 입안에 든 것을 마저 삼키고 나서 -무신? 출장하실 겁니꺼?- 하고 물을 꿀꺽꿀꺽 마신다. -글쎄. 그럴 일이 좀 있습니다. 이따가라도 들어오시면 한번 봐주시지요-
관운을 묻는다면 무슨 관직을 의미하는데… 무당은 생각해본다. 전에 소향과의 사주를 보느라 방안에서 한 번 본 적이 있고 또 지난번 태봉제를 의논하면서 건넌방에서 본 적도 있다. 그때 본 얼굴을 떠올리며 지금 묻고 있는 관운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무당의 마음에는 영 탐탁치 않는 느낌이 든다. 나이를 사십을 훌쩍 넘긴 사내가 이제껏 아무 것도 하지 않다가 갑자기 관직을 운운한다? 이집 마나님이라면 해도 벌써 해먹었을 것이지만 그 영감이라는 자는 영 나약하게만 생각이 든다. 한양에서 공부했다는 것이야 만석꾼 집안 덕이고 얼굴을 보아하면 그저 강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 아닌가? 그 얼굴에는 호령하는 기색도 안보이고 위엄 있는 모습도 안 보인다. 그런 자의 관운을 보아달라면 필경 관직이 근거리에 있는 모양인데 하며 속으로는 또 배추색 같은 퍼런 지전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라입시더. 지야 치성 올리자모 한 며칠 있을 낀데. 오늘 아이라도 영감님 볼 날이 있겠지요-
* * *
이미 날이 제법 어둑어둑해지고 뒷산 어디에서 울어대는 초저녁 뻐꾸기 소리가 요란한데 갑자기 그동안 근 한 달여 동안 발걸음도 하지 않았던 광수에미가 허겁지겁 대문 안으로 들어서며 숨 가삐 말을 늘어놓는다. -아이고, 보살님예. 우짭니꺼? 아까부터 을쑤이가 다 죽어갑니더-
지난달 언제쯤 제초 일 한답시고 장서방을 대동했던 것 때문에 틀어진 광수에미가 종가에 발도 들이지 않았었다. 하지만 저녁에 담 너머로 보살과 겸상을 하고 있는 형님을 보고나서 샘에 갔다가 불과 샘하고 두 집 건너있는 창호네에서 나는 아우성을 듣고 알았다. -무신 말이고?-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있는 큰아지매는 아무 말도 없고 무당은 인사도 없이 갑자기 누가 죽어간다는 광수에미의 말에 되묻는다. -을쑤이가 아를 놓는 모양이라예. 쿤데 산파도 안 불렀고 아는 안 나오고 저카다 둘 다 죽는 거 아인지 모리겠심더- 벌써 정기에서 나와 서있던 소향이 자신의 심장이 요동치는 느낀다. 무당은 느긋하게 -산달이 운젠데 산파도 안 부르고 카노?- 숨을 골라가며 광수에미는 말을 하지만 마루에 앉아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큰아지매의 눈치를 힐끔거린다. -운제 아가 들어선 지도 모리는데 산달이 운젠 지는 우째 압니꺼? 배부른 거만 보고 그저 오늘내일 하고 있었지예- -쿤데? 니는 와 내 보고 카노? 내는 산파는 아이다- 뜬금없이 자신에게 산고 겪는 사람 말을 하는 것에 무당은 남의 산에 산불 보듯 말한다. -그기 아이고예. 창호네가… 아이구, 참!- 하고 혀만 차고 마는 광수에미다. 둘 다 죽어나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방문을 밖에서 잠가두고 비명소리가 나오든 말든 들어가 보지도 않는 창호어마이가 비록 짐승 같지만 선뜻 걸어 들어가서 호통칠 수 없는 자신이 안타까워 그저 혀만 끌끌 차고 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제일 빨리 느끼는 소향이 -누구라도 있습니꺼? 을순이하고? - -있긴 누가 있노? 그 독한 년이 글쎄 딜다도 안 본다. 아는 안에서 죽어가는데도- 소향의 눈에 화가 서린다. 이럴 수가 있는가? 사람 아닌가? 을순이도 사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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