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촌을 형성하고 조장했다는 걸 인정하라고 하는데, 인정할 증거가 없습니다.”
지난 달 29일 오후 2시 서울지방법원 560호 법정에는 답답한 공기가 흘렀다. 피고인 ‘대한민국’ 측 변호인은 계속해서 “근거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미군 기지촌 ‘위안부’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의 세 번째 변론 기일이었다.
이 소송은 작년 6월 25일 122명의 미군 기지촌 ‘위안부’들에 의해 제기됐다. 이들은 국가가 직접 기지촌을 형성하고 ‘기지촌 정화대책’ 등을 통해 기지촌의 정비, 발전을 주도했으며, 다양한 방법으로 기지촌 여성들에게 성매매를 권유하고 조장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당시 성매매를 금지하고 있던 국내법, 국제법 등을 위반한 불법이다. 원고 측은 그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 침해와 정신적 고통 등에 대해 한 사람 당 최소 1천만 원의 위자료를 지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불법으로 ‘위안소’와 기지촌을 형성, 관리한 정부
우리에게 ‘위안부’라는 용어는 일제 강점기에 동원된 일본군 ‘위안부’만 익숙하다. 하지만 사실 ‘위안부’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존재했고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용한 용어다.
정부는 한국전쟁 중에 연합군을 위해 부대 내 위안소를 설치했고, ‘위안소에서 외군을 상대로 위안 접객을 업으로 하는 부녀자’를 위안부라고 정의했다. (“청소 및 접객영업 위생사무 취급요령 추가 지시에 관한 건” 보건부방역국 예규 제1726호. 1951년 10월) 당시는 1947년 공포된 ‘공창제도 등 폐지령’으로 성매매가 불법이었다.
전쟁 중에 설치된 ‘위안소’는 1954년 모두 폐쇄됐다. 그러나 한국에 장기 주둔하게 된 미군 수만 명의 ‘성욕 해소’가 미군기지 주변의 문제로 떠올랐다. 1957년 7월 1일 유엔군 사령부가 도쿄에서 서울로 이전하게 되자, 이 문제는 국내의 시급한 현안이 됐다.
보건사회부, 내무부, 법무부 장관이 회합을 갖고 ‘유엔군 출입 지정 접객업소 문제 및 특수 직업여성들의 일정 지역에로의 집결 문제’에 합의했다. 얼마 후 보건사회부는 차관회의를 열어 ‘위안부를 일정 지역에 집결시키고 이 지역 외에서 외군상대 성매매 행위를 엄중 단속하는 문제, 기지촌 위안부의 성병 관리 문제’를 논의했다. (차관회의내의안, 총무처, 1957년 7월 6일)
정부의 기지촌 관리는 1957년 2월부터 ‘전염병 예방 시행령’에 의해 진행됐다. 전염병 예방의 핵심은 다름아닌 ‘기지촌 위안부의 성병 관리’였다. 그것은 일반 공중의 이익이나 감염인의 건강 보호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성구매자인 미군을 위해 ‘성병에 걸리지 않은, 깨끗한 신체’를 대기해 놓기 위해서였다.
1961년 11월 ‘윤락행위 등 방지법’이 제정되고 UN의 ‘인신매매금지 및 타인의 매춘 행위에 의한 착취 금지에 관한 협약’에 가입하는 등, 한국 정부는 표면적으로는 성매매 금지정책을 표방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62년 ‘특정 윤락 지역’ 총 104개소를 지정하여 이곳만큼은 경찰에 등록하게 하고 성매매 단속을 면제했다.
특정 윤락 지역에는 용산역, 영등포역, 서울역 등지의 성매매 집결지와 이태원, 동두천, 의정부 등지의 기지촌이 포함됐다. 정부는 식품위생법(1962)과 전염병예방법(1954)에 의해 이 지역을 관리했다. 특히 기지촌 ‘위안부’에 대한 성병 관리와 단속은 더 철저히 했다.
1970년대 국가 주도 ‘기지촌 정화운동’ 실체는?
1969년 닉슨독트린(7월 24일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의 힘으로’ 하도록 격려한다며 아시아 주둔 미군을 축소하겠다고 선언. 이후 1만 8천명의 미군이 감축됨)이 발표됐다. 1970년대 한국에서 실시한 ‘기지촌 정화운동’을 추적한 <동맹 속의 섹스>(삼인, 2002)의 저자 캐서린 문은 닉슨독트린 이후 한국 정부가 안보 위기에 처하면서 한미동맹을 강화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강구했다고 보고한다.
한-미 관계의 권력 불균형 속에서, 미군은 오랫동안 불만을 가져왔던 ‘기지촌에서의 흑인 차별’ 문제나 ‘미군의 성병 감염으로 인한 사기 저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미군들 눈에 비친 한국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정부는, 미군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강력한 대책을 내놨다.
정부는 1971년 청와대 직속 ‘기지촌 정화위원회’를 발족하고 1972년에는 ‘기지촌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같은 해 7월 박정희 대통령은 예산 11억 5천만 원이 책정된(당시 1년 예산이 6천억원이었음) 기지촌 정화위원회 프로그램을 승인했다. 이때부터 기지촌 정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도로와 인도 포장, 위생 설비, 가로등, 주거 개선 등의 ‘환경 정화’에 가장 많은 예산이 쓰였다. 다음으로 많은 예산이 투입된 것이 ‘성병 관리’다. 당시 민군관계 소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기조 씨는 2003년 2월 9일 방영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섹스동맹- 기지촌정화운동” 편에서 “성병 관리가 가장 중요했다. 첫 번째 항목이었던 게 사실”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캐서린 문은 <동맹 속의 섹스>에서 “매매춘과 성병 관리는 항상 모든 부분에서 한국 정부와 미 군대간의 협력 부족과 긴장을 낳는 주요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한국 정부는 기지촌 정화운동 초기부터 성병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고 말한다.
‘토벌’, 강제 수용…폭력적인 기지촌 ‘성병 관리’
정부는 1962년부터 기지촌 ‘위안부’들을 보건소에 등록하게 하고 성병 검진 결과를 기록한 증서(검진증 또는 보건증)를 소지하게 했다. 또 정기적인 성병 검진을 강제로 받게 했다. 미군과 한국경찰, 보건소 등이 합동단속을 통해 성병 검진을 받지 않은 여성을 찾아내 강제로 연행하여 검진을 받게 하고, 성병에 걸린 여성들은 동의 없이 치료했다. 이 과정은 마치 범죄자를 추적하고 수사해 처벌하는 것 같았다. 당시 기지촌 여성들 사이에 ‘토벌’(무력으로 쳐 없앰)이라고 불릴 정도로 폭력적이었다.
“토벌 나온다고 하면 감찰들이 다 갈쳐줘. 자기네 족속들 안 잡아가게. 야, 토벌 나온대, 오늘 클럽에 나가지 마! 야 집토벌(한국경찰과 보건소, 자치회의 합동단속)도 한대, 이러면 (언니들이) 다 숨지. (포주집) 안방에 가서 앉아 있고, 안방 장롱에 들어가 있구, 다 숨어. 왜냐하면 그 '언덕 위에 하얀집' 거기 가기 싫고, 그리고 끌려가면은 경찰서로 간다구. 경찰서로 가면 2박 3일 유치장에 살고 있어야 돼.” -기지촌 ‘위안부’ 국가배상 소송 원고의 증언, 고소장 37쪽.
성병에 감염된 여성은 ‘낙검자’라고 불리며 성병관리소(낙검자수용소)로 보내져 완치될 때까지 감금됐다. “건물은 온통 철책에 가리워져 병이 나을 때까지는 꼼짝달싹도 못하도록 감시를 받아야”(「人權(인권)유린」과「國民保健(국민보건)」의 사이, 동아일보 1978년 3월 13일자)했다. ‘위안부’들은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등 여러 방법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다시 붙잡히거나, 골절상을 입거나, 심지어 추락사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원고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런 수용소는 1990년대 중반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치료 방식도 폭력적이었다. 보건소 직원들은 기지촌 여성들에게 적정량 이상의 페니실린을 투약했다. 이번 소송에 참가한 122명의 위안부 중 성병관리소에 수용된 경험이 있는 여성들은 공통적으로 말한다. “페니실린을 맞아야 하는 건 큰 공포였다, 페니실린 쇼크로 죽거나 마비 증상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불안했다.” 실제로 주사를 맞고 쇼크를 겪고서 응급처치를 받아 살아난 여성도 있다.
이번 소송에 함께하고 있는 박정미 한양대학교 비교역사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는 ‘페니실린 남용’과 관련된 국가 시책을 정부의 공식 문건에서 찾아냈다. 페니실린 쇼크 사고가 빈번히 발생해 의사들이 투약을 꺼리자, 1987년 보건사회부가 법무부에 “국가 성병 관리 사업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의사가 사전에 페니실린 과민성 반응 검사를 실시한 경우 사고가 발생해도 의사를 면책해 줄 것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낸 것.
이에 법무부는 의사가 반응 검사와 더불어 “필요한 응급조치를 다한다면 면책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고 답신했다. 정부는 기지촌 ‘위안부’의 건강이나 생명보다 미군을 위한 성병 통제를 더욱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박정미 “한국 기지촌 성매매정책의 역사사회학, 1953-1995년”, <한국사회학> 제 49집 제 2호, 2015년)
기지촌 여성에 대한 성병 관리는 군사안보를 위해 국가가 여성의 신체를 통제하는 극악한 형태였다.
정기교육 실시 “외화 벌어들이는 애국자, 민족주의자”
미군 기지촌 ‘위안부’를 대상으로 애국교육도 수시로 실시됐다. 소송에 참여한 원고들의 증언에 따르면, 국가는 미군과 함께 월 1회(미군의 성병 발병률이 증가할 때는 월 2회 시행되기도 함) ‘위안부’들을 기지촌 내 클럽 등에 모아놓고 강의를 실시했다. 미군부대에서 나온 미군 의무부대 장교, 한국의 보건소 직원, 경찰서장, 군수, 자매회장, 관광협회장 등이 역할을 분담해 교육했다. 공무원들은 기지촌 여성들을 ‘외화를 벌어들이는 애국자, 민족주의자’라고 치켜세우고 한편으로는 취업 보장, 노후 보장, 전용 아파트 건립 등 혜택을 약속하기도 했다.
“(언니, 그 회의에 나온 사람들 중에 언니들이 애국자라고 얘기하는 거를 들어본 적이 있어? 언니들이 우리나라를 살리는 애국자라고?) 그럼! 그럼! (누가 그런 얘기를 해?) 그건 군수가 얘기를 해.” (고소장 31쪽)
소송을 제기한 122명의 미군 기지촌 ‘위안부’들은 국가의 이런 행위가 “미군 상대 성매매 관련 내용을 반복적으로 주입하고 순종을 강요함으로써 (자신들을) 위안부로 길들이려고 한 것”이라고 말한다. 당시 성매매가 불법 행위라는 것을 모른 채 ‘국가가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힘들어도 참고 해야 하는 일’이라고 인식했었고, 그래서 더더욱 ‘위안부’ 생활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기지촌 여성들은 미군에 의한 살인, 폭행, 갈취, 감금 등의 범죄와, 성매매 알선업자(포주)에 의한 강간, 구타, 약물 투여, 강제 낙태, 감시, 감금 등의 범죄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위안부’들은 기지촌 인근 파출소나 시, 군 공무원들에게 피해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한 적도 많지만, 대부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증언한다. 원고 측은 이에 대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야 할 국가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위법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기지촌 여성들이 국가의 책임 묻는 최초의 소송
이번 소송은 기지촌 여성의 최초 증언록인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한울아카데미, 2013)을 펴낸 새움터를 비롯해 기지촌여성인권연대, 한국여성단체연합 등의 단체들과 학자들, 30명의 공동변호인단이 함께하고 있다.
기지촌여성인권연대 소속 단체인 두레방(My Sister’s Place) 김태정 상담실장은 “2011년, 2012년부터 학자들, 변호사들, 기지촌 활동가들이 모여서 소송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했다”고 전한다.
“두레방이 만들어진 1986년부터 기지촌 여성들과 함께하면서, 여성 스스로 선택하는 게 아니라 이 나라가 만든 구조로 인해 성매매를 하게 되는 현실을 목격했다. ‘국가가 책임지고 보상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해 왔다.”
소송에 참여한 미군 기지촌 ‘위안부’ 122명의 연령대는 50대~70대이며, 작년에 소송을 제기한 후 벌써 두 명의 여성이 운명을 달리했다.
미군 기지촌 성매매 문제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군기지가 주둔했던 국가나 지역(필리핀, 일본 오키나와 등)과 미국령인 지역(푸에르토리코, 괌, 하와이 등)에도 기지촌이 형성되어 있거나 성매매가 존재해왔다.
3차 변론이 끝나고 모인 간담회에서, 두레방의 유영님 원장은 “대한민국 정부를 대상으로 한 이번 소송은 기지촌 여성들이 국가의 책임을 묻고 진실을 밝히는 차원에서 제기된 세계 최초의 소송으로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또 “1차는 한국 정부에 책임을 묻고 2차적으로는 미국에 책임을 물을 것”이라며 “미군기지가 주둔해 있던 지역의 여성들의 폭넓은 연대를 끌어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4차 변론은 7월 24일 서울지방법원 560호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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