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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바라만 봐도 숨이 멎을 듯한 들판을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신흥에 있는 땅을 팔아서 지난 몇 달 만에 다 써버린 것이 갑자기 떠오른다. 매년 농사만 끝나면 조합에 뭉칫돈이 쌓이곤 하는 것이 절로 되는 줄만 알았는데 태섭은 처음으로 난감함을 경험하며 뒤돌아 마을을 바라보며 걷는다. 철들고 나서 이처럼 온 들판이 바다처럼 변한 것이 처음이다. 마을 한쪽에 있는 사당의 지붕이 보인다. 그러나 그 주위로는 집이란 집은 모두 기둥만 서있거나 아니면 폭삭 주저앉아있다. 먼발치에서 보이는 종가도 정기쪽 지붕이 훤히 이마를 드러내고 있다. 그나마 자신의 집은 무거운 기와 탓에 지붕이 조금 벗겨진 것이라 생각하며 맥없이 걸으며 귓전에 들리는 사람들의 아우성이 벌집 소리처럼 느껴진다.
해가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보리 가마며 밀이며 물에 흠뻑 젖은 것들을 펴 널기 시작한다. 이제 나락은 기대할 수 없는 입장이다. 곡식이 될 수 있는 보리나 밀도 비록 비에 젖어 불긴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들이 입의 거미줄을 걷어줄 유일한 곡식이다. 그리고 늦은 오후가 되자 들판의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청태가 흐르는 물살에 누운 것처럼 벼는 모두 진흙을 뒤집어쓴 채 나자빠져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손도 쓰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버려진 채로 추석날이 처참하게 저문다.
소향도 큰아지매도 누구도 추석 음식을 내놓지도 않고 저녁이 저물었다. 오직 소향이 간단한 저녁상을 겸상으로 안방에 들였지만 그것도 거의 그대로 나왔다. 방안에 누운 소향은 마음이 온통 삼천포에 가있다. 사물을 분간할 만한 나이에 두어 번 보았고 들었던 큰 바람이라는 것을 떠올려보지만 이렇게까지 무서운 힘을 가진 큰바람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데 이번에는 어떤지 마음이 콩밭에 있다. 바로 바닷가에 있는 장터이니 바람을 그대로 맞을 것인데 장터에 즐비하게 서있는 점방들이라는 것이 송판조각으로 얼기설기 지은 것들 아닌가? 지붕이 날아가 버렸을 수도 있다. 그리고 건어물들도 모두 비에 젖을 수도 있고 그리고는 곧 썩어나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엄마와 대포아지매의 강한 품에 대해 믿음이 있어서인지 식구들이 바람이나 물에 험한 일을 당했으리라는 것은 상상이 안 된다. 어떤 일이 있어서도 엄마가 그리고 대포아지매가 동생들과 자신들은 분명히 잘 지켰으리라 생각이 든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자 소향은 그동안 오랫동안 바느질 그릇에 넣어두었던 몽당연필과 종이를 꺼내들고 호롱불에 불을 댕겨 편지를 쓴다. 무엇이 그리 바빴는지 글공부도 게을리 한 탓에 종이 위의 글이 생각같이 적어지지 않는다. 쓰고 긋고, 또 쓰고 지우고 하기를 한참이나 씨름하다가 겨우 몇 줄 완성한 것이 태풍에 별일 없냐는 것뿐이지만 지친 소향은 그것만도 전해지면 충분할 것이라 믿는다.
하루 만에 쉬어빠진 추석음식들을 아무 말 없이 큰아지매는 소향에게 건네주고 소향은 아깝지만 거름더미에 버린다. 장서방은 순경이 잡으러 오든가 말든가 신경도 쓰지 않고 아침에 하늘이 빼꼼히 보이는 정기 쪽 지붕을 고치느라 사다리를 놓고 연신 오르락내리락 한다. 당장이라도 또 비가 온다면 우선은 정기를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태광이도 손수 별채를 수리하고 있다. 아무도 누구도 품을 얻을 수도 없고 팔지도 않는 상황이다. 각자의 집에 쏟을 품도 귀하디귀한 태풍 후의 난국이다. 그래도 태섭은 방안에 들어앉아 꼼짝도 않는다. 날라가 버린 들판의 지전뭉치들이 앞으로의 자신의 험난한 길을 예고하기라도 한 듯 속으로 생앓이를 하고 있다. -소향아, 너 혹시 보살님 어디 있는지 아나?- 비바람에 정기에 있는 살림살이가 모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소향이 물 함지를 놓고 씻어 정렬하고 있는데 큰아지매가 정기문 앞에서 묻는다. -지는 그때 얼라하고 가신 후로는 모립니더. 와예?- -그래?- 하고 돌아서다가 다시 소향에게로 몸을 돌린 큰아지매는 -혹시 삼천포에 연락이 닿으면 한 번 오시라고 해라- 하고 마당으로 내려가 지붕에서 기왓장을 이리저리 끼워 맞추고 있는 장서방을 올려다본다. -지서는 안 갈 건가?- 분명히 장서방도 들었지만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한다. -가더라도 밥값은 하고 가야지요. 하늘이 보이는 지붕하고 동네 개가 드나드는 담은 막고 가야 안 됩니까?- 찰흙을 기왓장 속으로 메워 넣으며 답하자 -장서방은 정말로 병구 아재를 그리 했는가?- 소향도 큰아지매도 또 태섭도 태광이도 아무도 믿지 않지만 본인인 노병구와 태우만 장서방이 꾸루와이를 해했다고 하니 물어보는 것이다. -그랬다니 그런 모양이지요. 술 취해서 정신이 없었는데 어찌 압니까? 이집에는 해가 안되도록 하겠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방안에서 두 사람의 주고받는 소리를 다 듣고 있던 태섭은 아! 그래! 장서방이 그런 일에 엮어 있었지 하고 비로소 깨닫는다. 불과 며칠 전에 순경이 출두하지 않는다고 찾아왔을 때 잡아가려면 잡아가라고까지 했었지만 태풍의 참상 속에 그만 모든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지만 장서방이 감옥에 간다 한들 자신이 나설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태섭은 마음을 간단히 접는다. 수확할 것도 없이 된 마당에 머슴 하나 없어진다 한들 대수는 아니다 싶다. 그래도 그동안 쏟아 부은 돈과 정성을 생각해볼 때 참의원선거는 그대로 손을 놓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드는 태섭은 어떻게 해서라도 선거운동은 진행하고 싶다. 하지만 마누라도 이미 신흥땅값도 다 써버린 것을 알고 있는 마당에 또 땅을 처분한다면 하는 생각에 미치자 보고 싶지 않은 마누라의 얼음장 같은 얼굴이 떠오른다. 하지만 무슨 수라도 나겠지 하며 등을 돌려 눕는데 밖에서 낯선 소리가 들린다. -행님, 계신교!- 분명히 마누라가 마당에 있는데 그리고 지붕에는 장서방이 또 소향이도 있는데 자신을 찾는 것이 의아한 태섭은 일단 문을 열고 밖을 보니 태우가 꾸루와이를 등에 업고 마당 한가운데 서있다. 기가 차다. 저 죽일 놈은 정말로 금령 김씨인지 믿을 수가 없다.
태섭도 아무 말도 못하고 쳐다만 보는 동안 큰아지매도 그저 둘을 쳐다본다. 정기에서 나온 소향 역시 큰아지매나 영감이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아무 말도 못한 채 모두를 두리번거릴 뿐이다. 지붕위에 있는 장서방이 제일 먼저 입을 연다. -어디 병원에 가시는 길이요? 아니면 지서로 가시는 길이요? 어디든 가던 길 가면 돼지 여기는 왜 오셨소?- 장서방을 머슴 취급하는 태우는 장서방에게는 얼굴도 마주하지 않지만 소리는 다 들었다. 그리고 대답을 방문을 열고 내다보고 있는 태우에게 한다. -뱅구 행님이 사람 구실하기 틀맀다고 이집으로 가자 케서 왔심더. 지는 그저 내리놓고 갈랍니더- 하고 다짜고짜 소향의 방문을 열고 꾸루와이를 지게 위 바랭이속을 비우듯 방안으로 쏟아놓자 꾸루와이는 아무 말도 않고 그저 모로 픽 쓰러진다.
-네놈은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여간해서 큰소리 지르지 않는 태섭이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아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며 대청으로 나온다. 태우는 너무도 태연하게 바지를 털어내며 -지는 그저 여 가자고 해서 온 깁니더- 라며 달랑 한마디만 하고는 대문 쪽으로 걸어 나간다. 그것이 태섭을 더 화나게 만든다. 신발을 신는 둥 마는 둥 화기 가득 서린 얼굴로 마당에 내려선 태섭은 여전히 열린 소향이 방안을 본다. 꾸루와이가 매눈을 뜬 채로 자신을 보고 있다. -병구, 자네! 이럴 건가!- 마땅히 할 말이 없는 태섭은 겨우 꾸루와이의 이름을 부르고 그리고 자네라는 제법 존칭도 함께 붙여주고 또 이럴 수 있느냐는 사정조의 말만 했다. 종가의 체면이 여기서 다 무너지는 듯하다. 하지만 저 찰거머리 같은 놈을 멍석말이로 두들겨 팰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나간 지가 오래 아닌가?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지도 않은 태섭이다. 즉답을 하지 않던 꾸루와이는 문지방에 고였던 팔을 바꾸며 끈적끈적한 태도로 말한다. -행님, 지는 인제 사람 구실 못 합니더! 머리 보이소! 내가 정신이 혼미해서리 걸음도 못딛습니더. 우짭니꺼? 종갓집에서 한솥밥 묵는 사람이 해코지 했으이 책임지야 될 일 아입니꺼?- 하고는 뒤로 벌러덩 누우며 이상한 신음소리 같은 것을 쏟아낸다.
소향은 자신의 방안에 들어간 짐승 같은 놈 때문에 발만 구른다. 그리고 지붕위의 장서방은 전개되는 모든 것을 다 내려다보고 있지만 간섭하지 않는다. 간섭은 후에 하면 되기 때문이다. 큰아지매는 기가 차지만 자신이 들어서서 무엇을 달리 할 만한 것이 없음을 알고 아무 말이 없다. 담 너머 별채에서 태풍 뒤처리를 하고 있던 태광이도 광수에미도 다 보고 있지만 달려오지 않는다. 모두가 지쳤기 때문이다. 태풍에 지쳤고 태우와 꾸루와이에게 지쳤다. -걱정들 마십시오. 오늘 해지기 전에 이 지붕이 다 이어지면 저 방안의 놈도 저도 깨끗이 이집에서 나갈 겁니다. 다들 그냥 방안에 들어가십시오. 소향아, 너 방안에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값도 없는 것이다. 걱정 말고 너 하는 일이나 해라. 상관하지 말고- 태섭도 큰아지매도 어안이 벙벙할 뿐 달리 무슨 방도가 없다. 장서방 말마따나 그저 장서방이 해결해주기만 기다릴 수밖에, 소향도 뒤돌아보면서 정기로 다시 들어가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 자신의 방을 연신 힐끔거린다.
장서방은 다시 빠른 손놀림으로 지붕을 이어나간다. 기와가 날아가 땅에 떨어져 깨지는 바람에 모자란 기와는 무너진 담 위에 있던 것으로 우선은 대처하느라 사다리를 내려온 장서방은 소향의 방안에 누워있는 꾸루와이를 조용히 들여다보고는 -어이, 너나 내나 오늘이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다. 잠시 내가 지붕 마칠 때까지 염불이나 외고 있어라. 저승길을 가도 지붕은 이어놓고 가야지 머슴 밥값이 되지. 안 그러냐?- 하고 씩 웃으며 꾸루와이를 본다.
순간 꾸루와이의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동안 투전판에서나 술집에서나 싸움질에 이골이 난 꾸루와이다. 싸울 때 사람의 얼굴에 나타나는 화는 겁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가끔씩 싸울 때 웃는 사람이 있다. 그 중에서도 겁에 질려서 억지로 웃음기를 띤 얼굴은 비겁함이 한눈에 보이지만 살기 도는 싸움판을 여유 있게 웃으며 맞이하는 사람을 경험한 적이 있는 꾸루와이는 지금 보는 장서방이라는 놈의 웃음이 바로 그 웃음이라는 것을 느낀다.
지난여름에 샘터에서 자신에게 소곤거리던 목소리도 감히 저항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꾸루와이는 그동안 여러 사람들을 상대해보았지만 장서방처럼 뜻대로 되지 않는 자는 처음이다. 지금 이대로 장서방이 지붕 일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면 정말로 황천길을 갈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들자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뒹군다. -아이고, 사람 죽네! 사람 죽어! 이집에서 사람 죽이네- 그런 소리가 나든지 말든지 장서방은 기왓장 여러 장을 어깨에 올리고 사다리를 오르고 곡소리에 놀란 소향은 정기문밖에 나와 서서 발을 동동 구른다. 참다못한 소향은 달음질하여 방문을 열어젖히고 소리를 지른다. -아저씨! 이카지 마이소! 우리 아저씨가 그칼 사람도 아입니더! 가이소 고마!- 우리 아저씨라 장씨를 부르는 소향은 방안에서 듣고 있을 종갓집 두 사람이 충분히 들을 수 있을 만큼 악을 쓴다. 사실 소향의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은 따로 있다. -네놈이 을쑤이를 해했고 그래서 아 낳다가 을쑤이가 죽었으이 니놈은 짐승이라고- 온 동네에 외쳐 꾸루와이의 패행을 알리고 싶지만 누가 알아줄 것인가 하는 체념과 낙심이 그저 딴소리로 악만 쓰게 한다. -우리 아저씨는 그칼 사람이 아입니더! 퍼떡 가이소. 내방에서 나오란 말입니더!- -이 씨팔년이 뭘 안다고 주디 놀리노? 니, 지난번에 내기 물 먹있다고 이번에도 그리 될 줄 아나? 개같은 년, 오데 어른한테 대들어? 쌍년이!- 소향이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꾸루와이의 육두문자는 소향의 입을 꾹 다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저 짐승이나 할 수 있는 말이라 놀라서 다물어진 입을 열지도 못하고 서있다.
태섭도 큰아지매도 비록 방문은 닫고 있지만 밖의 동정에 온각 촉각이 곤두서있던 참에 곡소리가 나니 문을 아니 열 수가 없다. 결국 마루로 다시 나선 태섭은 소향의 방 앞으로 가서 뒹구는 꾸루와이를 입을 다물고 쳐다보다가 신을 벗고 방안으로 들어간다. 바로 이것을 꾸루와이는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장서방도 다 보고 있었다. -영감님! 소리치는 놈치고 죽을 놈 하나도 없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그놈 그냥 버려두십시오. 이제 다 되갑니다. 몇 장만 이면 됩니다- 하면서 여전히 손을 놀린다.
태섭은 다리를 고쳐 앉으며 정중하게 꾸루와이를 불러 우선 곡소리라도 진정시키려 한다. -아저씨, 가이소! 내방에서 나가란 말입니더!- 소향이 또 악을 쓰자 뒤에서 큰아지매의 말이 들린다. -너는 빨리 부엌으로 가거라! 누구한테 그런 말을 듣냐? 네가 지금 그런 말 들을 때가 아니다. 나설 일도 아니고!- 뱃속의 아기를 염려해서 하는 말인지 아니면 꾸루와이의 험담을 그저 피하라는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소향은 장서방이 지붕에서 내려오기만 하면 꼭 무슨 일이 크게 벌어질 것 같은 예감에 휩싸여 마음이 다급하고 암울하다. 그런데도 집주인 내외는 남의 일로만 치부하고 그저 보고만 있는 것이 괘씸하고 미워서 물러설 수가 없다. -장씨 아자씨가 그칼 아저씨가 아인줄 큰아지매도 아실 낍니더. 그래도 우째 그저 보고만 있을 낍니꺼?- 자신에게 남긴 장씨 아저씨의 말이 생각난다. 다 운명이라고, 홀몸이라 어디 가면 못 살 거냐고. 소향은 장씨 아저씨가 간다는 사실이, 아니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이 겁이 나서 지금 큰아지매한테 퍼붓고 있다. -너, 입 안 다무냐? 부엌으로 가라는 내 말 안 들리냐!- 이번에는 큰아지매가 목청을 돋운다. 그야말로 태풍이 한번 쓸고 간 뒤에 또 한 번 악 쓰는 소리가 집안을 휩쓸고 있다. 그래도 소향은 겁이 나지 않는다. 장씨 아저씨가 이집을 떠난다면 자신도 다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헝클어진 머리카락 속에 가득하다. -못 다뭅니더! 저런 사람은 사람도 아입니더! 저번에도 카디만 이분에도 똑같이 사람을 애를 믹이는데 우째 큰아지매는 지 보고만 입 다물어라는 말입니꺼?- -뭐라고?! 너 지금 뭐라 했어?-
그러나 큰아지매는 움직이지는 않고 그저 마루에 꼿꼿이 서서 눈만 매섭게 째린다. 지붕 위의 장서방이 하던 일을 다 놓고는 급히 사다리를 내려와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막으려 소향의 등을 떠밀며 정기 쪽으로 몬다. -아무 말 하지 말고 너는 부엌에만 있거라 어른들이 다 알아서 할 거다. 알았지? 내 말대로만 하면 다 괜찮을 거다. 그저 어른들이 하는 대로만 믿고 있거라- 대청에서 눈을 무섭게 노리며 소향을 보던 큰아지매도 그것으로 일단 순간을 넘긴다. 무엇이든지 천천히 해결하는 그녀 특유의 방법이다. 또 장서방도 자신의 일 때문에 불똥이 소향에게 튀는 것을 원치 않아 일단 수습했다. 물론 소향의 마음을 다 알고는 있지만 이제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도 거의 바늘구멍같이 협소하다는 것을 느끼며 이참에 저 죽일 놈을 아예 도륙을 내고 자신도 종지부를 찍을 참이다. 눈에 홍희의 모습이 보인다. 누님도 친구들도 보인다. 그러나 지금 그런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다. -제가 지붕하고 담하고 손을 다 보고 갈까 했었는데…. 아무래도 겨우 지붕밖에 할 수가 없군요. 그래도 본채에 비는 막을 수 있으니 담이야 천천히 해도 되겠지요- 하고 대청의 큰아지매를 보며 장서방은 긴 한숨과 함께 말을 남기고 도로 사다리 위로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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