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한 번씩 성병 검사를 했습니다. 누구도 그 이유가 뭔지,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지, 지금 이게 잘하고 있는 건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고, 그런 얘기를 꺼내기 어려운 분위기였습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의사였고, 사람을 건강하게 하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 보건소 근무를 자원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 행위가 정말 이상해보였습니다. 공무원 신분이라서 행정적으로는 할 수밖에 없었지만, 의료인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습니다.”
문정주 씨(58세,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료관리학교 겸임교수)는 1983년에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1995년에 의정부보건소에서 의무사무관으로 근무하게 됐다. 가정의학전문의로 공공의료와 지역사회 의료 체계에 관심이 많았던 문씨는 ‘보건소에서 일하고 싶다’는 오랜 꿈을 갖고 있었다. 꿈이 이루어져 기뻤던 것도 잠시, 문씨는 그곳에서 “환자를 중심에 놓는, 환자의 건강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 의료인으로서의 원칙을 지킬 수 없었다.
‘진료’라고는 부를 수 없는 강제적 행위였다
3월 18일, 서울지방법원 466호에서는 122명의 미군 기지촌 ‘위안부’들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의 변론이 있었다. 원고 측은 국가가 직접 기지촌을 형성하고 기지촌의 정비, 발전을 주도했으며 기지촌 여성들의 성병을 관리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미군 상대 성매매를 하도록 조장했다고 주장하며 책임을 묻고 있다.
이날 증인으로 출석한 문정주씨는 1995년부터 2년 남짓 의정부보건소에서 의사로 근무했다. 재판정에서 한 시간 넘게 당시 상황을 차분하고 날카롭게 증언하는 문씨에게서 한 사람의 의료인으로서의 고뇌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문씨가 일하게 된 의정부보건소는 근처 기지촌 여성들의 성병 관리를 도맡아했다. 보건소 건물로 들어서면 오른편에 꽤 널찍한 성병 관리 진료실이 있었다. 함께 일하게 된 두 명의 간호공무원은 이미 수년간 성병 관리 업무를 해오던 사람들이었다.
다른 식품업계 종사자들의 경우 장티푸스, 결핵, 피부질환 등을 검사한 후 보건증을 발급받으며, 그 유효 기간은 1년이었다. 그러나 기지촌 여성들이 발급받는 증서는 달랐다. PASS(패스)라고 불린 이 증서는 특별한 증명 서식도 없이 스탬프로 날짜만 찍혀 있었고, 유효 기간은 단 일주일에 불과했다.
기지촌 여성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보건소에 와서 옷을 벗고 검진대 위에 올라가 다리를 벌리고 몸 깊숙한 곳의 분비물을 채취 당했다. 진료 기록이나 차트도 없었다. 여성들의 이름과 성병 감염 여부가 적힌 대장만 있었을 뿐.
문정주씨는 보건소에서 근무하기 전, 성병 진료를 하게 될 것이라고 미리 전해들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진료라고는 차마 부를 수 없는 어마어마하게 강제적인 행위”를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분들(기지촌 여성들)을 짐짝 다루듯, 굉장히 무신경하게 대하는 모습이 충격적이었습니다. 검사 시간은 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고 그마저도 옷 갈아입는데 걸리는 시간이 더 많았어요. 검사는 주로 간호사가 하고 의사는 검사 결과에 따라 약 처방을 해주는 식이었는데, 그분들의 몸의 증세가 어떤지에 대해서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검체(시험, 검사, 분석 등에 쓰이는 물질)를 제공하기 위해 오는 거였어요.”
문씨는 당시 보건소에서 이루어진 성병 검진과 치료는 환자에게 어디가 아픈지 묻거나 약을 먹은 후의 반응을 묻고 살피는 ‘진료’라기보다 “행정적 처리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122명의 소송 원고들은 국가가 기지촌 여성의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군에게 ‘성병에 걸리지 않은 깨끗한 신체’를 대주기 위해서 성병 관리를 주도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를 위해 기지촌 ‘위안부’들을 보건소에 등록하게 하고, 성병 검진 결과를 기록한 증서(검진증 또는 보건증)를 발급하며 성병 검진을 강제로 받게 했다는 것. 문씨의 증언은 원고들의 이러한 주장을 강력히 뒷받침하고 있다.
미군, 경찰, 보건소가 단속한 건 성매매가 아닌 ‘성병’
문정주씨가 일할 당시 의정부보건소에서는 이 검사를 왜 하는지, 그것도 일주일에 한 번씩 하는지 말을 꺼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저 당연한 일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검사를 받으러 오는 여성들이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를 한다는 사실을 안 문정주씨는 ‘알면서도 경찰이나 사법기관이 이걸 왜 가만히 놔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 윤락행위방지법이 시행되고 있었고 ‘윤락행위’로 처벌받는 사람들의 얘기도 뉴스로 접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이 의문이 풀릴 기회가 찾아왔다. 보건소가 문 닫는 시간을 몇 분 남겨두고 헐레벌떡 뛰어 들어 온 여성. 성병 검사를 받으러 왔다는 그녀에게 “꼭 이 시간에 와야 했냐”고 묻자 그 여성은 “요새 단속이 말도 못하게 심해서 지금 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보건소 직원들에게 물어보니, 경찰과 보건소 직원들이 합동으로 유흥업소 단속을 나간단다. 불법이었던 성매매 행위를 금지시키려고 단속하는 게 아니라, 성병 검사를 받지 않은 여성들을 색출하기 위한 단속이었다.
“보건소 직원들이 말하기를, 업소 문 앞에 여성들의 사진이 붙어있고 밤에 단속을 나가서 성병 검사를 받지 않은 여성들을 잡아온다고 하더라고요. 그때까지 경찰이나 사법기관이 ‘몰라서’ (성매매를) 단속 못 한다고 생각했던 제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문정주씨의 증언은 기지촌 여성들이 지금까지 제기해 온 주장을 입증한다. 원고 측 증언에 따르면, 미군과 한국경찰, 보건소 등이 합동단속을 통해 성병 검진을 받지 않은 여성을 찾아내 강제로 연행하였고 성병에 걸린 여성들은 동의를 받지 않고 치료했다. 이 과정은 마치 범죄자를 추적하고 수사해 처벌하는 것처럼 폭력적이어서, 당시 기지촌 여성들 사이에 ‘토벌’(무력으로 쳐 없앰)이라고 불렸다.
1990년대 중반까지는 성병에 감염된 여성들을 감금하는 성병관리소(낙검자수용소)도 있었다. 한번 들어가면 완치될 때까지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미군 ‘위안부’들은 옥상에서 뛰어내리거나 옷을 줄줄이 묶어서 밧줄을 만들어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다시 붙잡히거나, 골절상을 입거나, 심지어 추락사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문씨 역시 간호사들에게 수용소에 대한 얘기를 전해 들었다. 성병관리소가 보건소로 이사 오기 전, 2층에는 입원실이 있었는데 마치 감옥에 가두는 것처럼 낙검자(성병 감염된 여성)들을 가두었다는 것. 보건소 직원들은 “전에는 강제입원까지 시켰는데 이제는 세상이 편해져서 (주사만 맞고 보낸다)”고 말하곤 했다. 공무원들이 기지촌 여성들을 어떤 시선과 태도로 대했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일반 환자들은 그런 식으로 진료하지 않았다
이날 법정에서 판사는 문정주씨에게 “일반인들 중에도 성병 진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문씨는 “내가 일하는 동안 한 번 있었고 남성이었다”고 답하면서 “기지촌 여성들이 왔을 때와 사뭇 다른 분위기 속에서 진료가 진행됐다”고 말했다.
“일반인이 왔다면 성병 치료를 위해 주사를 놓아야 하는 상황이더라도, 부작용이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설명하고 환자가 원하지 않는다면 먹는 약으로 처방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분들(기지촌 여성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어요. ‘낙검이다’ 하면 바로 주사를 놓는 거예요. 몇 번은 여성들이 ‘여기서 주사 안 맞고 외부 산부인과 가서 치료하겠다’고 해서 언성이 높아진 적이 있었어요.”
이렇게 성병 치료는 기지촌 미군 ‘위안부’들의 동의 없이 이루어졌다. 바로 벤자딘 페니실린 투약이었다.
소송에 참여한 미군 ‘위안부’들은 “페니실린을 맞아야 하는 건 큰 공포였다, 페니실린 쇼크로 죽거나 마비 증상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불안했다”고 말해왔다. 문씨는 공판에서 “벤자딘 페니실린은 일반 의료 기관에서는 부작용 때문에 쓰기를 꺼려했다. 지금은 시장에서 퇴출됐을 정도로 수많은 쇼크사를 일으킨 약물이다. 하지만 한 번만 주사하면 되는 편리함 때문에 사용한 것 같다”고 진술했다.
“여분의 예산으로 외음부 보호제를 신청했어요”
기지촌 여성들이 아플 때 보건소를 찾아오는 경우는 없었다. 오직 성병 검사 때만 왔다. 보건소에 제일 많이 드나드는 건 미군 기지촌 ‘위안부’ 여성들이었지만, 보건소가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건 없었다.
문정주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 했다. ‘묻지마 검사’ 과정에서도 짧게나마 여성들에게 몸 상태에 대해 물었다. 성매매로 원치 않는 임신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침 가족계획을 위한 예산도 있으니 원하는 여성들에게 루프(자궁 내 피임장치)를 삽입해주자는 제안도 해봤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예산 집행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차가운 답변만 되돌아왔다.
고심 끝에 문씨가 찾아낸 일은 외음부 보호제를 나눠주는 일이었다.
“그분들이 자신의 성기가 더럽다고 생각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보건소에 검사하러 오기 전에 박박 씻을 텐데, 사실 그게 캔디다(곰팡이)를 더 심하게 만들거든요. 그래서 여분의 예산으로 외음부 보호제를 신청했어요. 항생제나 소독약이 아닌 젖산으로 만들어진 약이었습니다.”
이번 소송을 제기한 122명의 미군 ‘위안부’들의 연령대는 50대~70대이며, 2014년 6월 소송이 시작된 후 벌써 두 명의 여성이 운명을 달리했다. 이들은 힘겨운 기억을 토해내며 직접 진술서를 작성하거나 구두 진술을 하고 있다. 문정주씨는 한때 기지촌 여성들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으로서의 책임감으로, 법정에서 증언을 하며 자신의 몫을 해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몫은 무엇일까.
다음 공판은 5월 13일 2시, 서울중앙지방법원 466호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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